제발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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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병상에서 읽기엔 부담스러운 소설이다. 극도로 간결한 문체와 단일 플롯과 제한된 배경의 이동과 화장실에 앉아서도 몇 편의 이야기쯤 훌쩍 통과할 만치 short story들로만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카버가 다루는 이야기들은 거창하지 않다. 그는 뚱보 식욕가, 개를 내다버리는 남자, 불면의 아내, 잘못 걸려 온 전화, 말썽꾸러기 아들, 거짓말, 숨겨도 좋을 진실, 어린 밀렵꾼 등, 우리가 흔히 보아왔거나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관계의 균열이거나 단절이라는 점에서 그는 사악하다.

레이몬드 카버의 명성에 관해서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 왔다. 카버를 말하는 사람들은 체호프와  헤밍웨이와 하루끼와 미니멀리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의 단편들을 단 한 개도 읽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약간의 수치심이 끼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냉큼 그를 사들여 야금대면서 체호프를 들먹이고 싶지도 않았다. 요즘의 나는 너무 시끄럽다. 침묵마저 소란스럽다.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무언가에게 뒤를 내 준 것처럼 불안하고 의지없이 진행되는 행위에 환멸을 느끼는가 하면 얕은 꿈들에게 잠을 방해 받은 채 몽롱한 시간을 보내다가 울고싶어지는 때도 있다. 이렇게 나를 들썩이는 것들에게 '제발 조용히 좀 해!'라고 외치는 순간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필연이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좋고 나쁨으로 가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의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악연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지만 마이너스 곡선을 그리기에는 충분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건 정말 끔찍한 회색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번역을 한 손성경 교수의 '카버의 작품에 그려진 삶은 우울한 회색이다.'라고 끝머리를 장식한 말을 보고 웃음이 났다. 카버의 인물들은 평범하지만 그들 모두는 일상의 균열을 간직한 자들이다. 하지만 카버는 그들의 균열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한다. 작은 힌트마저 남겨놓지 않는다. 독자는 다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허나 그마저도 인물들의 일상이 아닌 독자 자신의 일상과 빗대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유추의 결과는 독자의 일상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보는 이에 따라 균열의 원인이 달라진다.   

카버의 인물들은 모두 흔들린다. 그들은 피로하고 음울하며 비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한 채 막연한 불안 상태에 있다. 前震의 흉계에 대해 눈치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떠한 방어기제도 마련하지 못한 채 외로움에 침잠하고 만다. 그들에게 소통 가능한 사랑이란 달동네에서 명품족에 관한 뉴스를 주워 듣는 것만큼이나 먼 세계의 일이다. 그들은 위안도 사랑도 평화도 걸치지 못하고 태어난 그대로의 헐벗은 모습으로 일상에 던져진 고아들이다. 회색 일색이다.

내일 퇴원하기로 결정했다. 일주일 넘게 일상을 외면할 수 있을 만치 넉넉한 인생도 아니고 병원밥과 생활이 따분해지기도(이렇게 말하니 교통사고를 빙자한 나이롱 환자가 된 듯하여 껄쩍지근하네그려) 한 탓이다. 오늘, 일상에 균열을 가하는 제법 충격적인 소식(?)을 통보 받았다. 미래에 관한 전면적인 개편을 감행해야 하는데 아직은 얼떨떨한 상태라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불행은 왜 한꺼번에 오는 것일까? 불행아, 제발 조용히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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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4-04-09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마저 소란스럽다.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생계-딱 까놓고 말해서 돈버는 일.
1주일간의 유예더라도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한다는 걸 아니까,즉 우리는 인간이니까,병상에서도 마음 부릴 곳이 없나봅니다.-_-;카버 읽는 걸 뜯어 말렸어야하는데...충고나 뜯어 말림 이런 것을 할 만큼 자기 확신이 강하다면 사는 게 좀 수월할지.아..참.그리고 이젠 무슨 책 안 읽었다고 부끄러워지고 뭐 그러진 않더군요.이 현실! 이거만큼 압도적인 텍스트가 어디 있을라구요.

비로그인 2004-04-09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체홉을 읽고, 레이먼드 카버를 찾아 들어왔다 리뷰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글쎄요, 결국 한권의 책이라는 것은 그것이 제 독자와 올리는 혼례가 더 행복하고 생산적인 것일 때 더 큰 문학적 가치를 갖는것이라고 미셀 투르니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독자가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요소들과 책속의 인물들 사이의 동화작용에서 상호소통하며 그것이 독자에게 체화되어 재발견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인데, 그게 좀 힘들었나 봅니다. 상황이 좀 더 나아지고 다시 읽으면 좀 더 여유롭고 너그럽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녀물고기 2004-04-09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잖아도 몸도 마음도 한가해지면 다시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생계가 목을 조/여/와/요. 으 으 으 윽.

마녀물고기 2004-04-0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소통이란 참으로 즐겁군요. 오시는 분들 감사, 글 남겨주시는 분들 예쁘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