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문학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정신-머리 구조'의 괴상함에 자주 놀라곤 했다. 그들의 역사 중 제일 극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제정 말기일 텐데, 최근에 검색어 순위에도 오른 괴승(요승) 라스푸친의 등장과 전횡이 특히 그랬다. 얄궂은 땡중 하나가 나타나 황실을 뒤흔들었다, 왕자의 혈우병을 고쳐주어 단번에 황후의 신뢰를 얻었다,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아 죽이는 데 애먹었다 등. 생김새가 어떠하였을까. 늙은 사진. 아, 너무 못생겼구나. 젊었을 때는 좀 나았겠지, 그래도 황후를 후린 사람인데. 웬걸, 정말 너무 아닌 얼굴이다, 슬프다 -_-;; 마흔 넘으면서 진정한 외모지상주의가 돼 버린 내 눈에 그는 이 점이 제일 도드라진다. 그러게, 러시아. 

 

 이런 식의 참칭의 연원은 물론 깊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가짜 드미트리, 보리스 고두노프 등)이 등장한 동란의 시대가 대표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정치소설'(정치팜플릿) [악령]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메커니즘도 이것. 굳이 말하자면,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가짜 드미트리'인 셈이고 그를 움직이는 진짜 수장은 '악령 스타브로긴'. 그러나 그 '스타브로긴'마저 꼭두각시라면? 그렇다면 그를 움직이는 더 근원적인 힘은 무엇? 여기서 소설을 한층 복잡해지고 '정치소설'이라는 장르와 결별, 더 높은 층위로 이월한다.

 

 

 

 

 

 

 

 

 

 

 

 

 

 

 

<악령>에서 포착된 테러-혁명의 씨앗은 20세기 러시아역사에서 실제로 실현된다. 이 소설 속 쉬삐굴린사태는 1860년대 트베리 시의 소요를 모델로 했다. 밀린 품삯을 받기 위해 도지사 앞에 몰려든 '선량한'(!) 노동자들을 도지사(폰 렘브케 - 그는 못 됐다기 보다는(이게 더 무섭다!!!) 그저 띨빵하고 한심한 지휘관의 상징이다)는 '폭도'로 몰아버린다. 여기서는 '발포'까지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런 것이 1905년, 1917년 혁명으로 이어졌으리라. 간만에 상기해본다. 

 

 

 

 

 

 

 

 

 

 

 

 

 

 

 

결국,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 어쨌거나 이건 남의 나라 얘기인지라 오랫동안 학적, 미학적 호기심을 갖고 읽어 왔다.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라는 표현이 자주 들리는데, 역시나 이런 것이 떠오른다.

 

마트료쉬카는 피스가, 속의 갯수가 많을 수록, 또 그림이 스티커를 붙인 것이 아니라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린 것일 수록 비싸다. 이런 조잡한 것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까야(열어야) 바닥이 보이는 거냐.

 

  

남의 나라 얘기인 줄 알았던 일들이 지금, 여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어 놀랍다.

또한, 과거 얘기인 줄 알았는데 바로 지금, 어제오늘내일 일어나고 있어서 놀랍다.

('과거'라 함은 내가 요즘 현대문학사를 읽고 정리하는 중이라서 그렇다.) 

 

도무지 초현실주의 국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같다. '기생수'와 그 기생수에 먹힌 숙주의 나라. 그런데 그 기생수가 정녕 무시무시한 생김새의 만화 속 기생수도 아닌, 뭐뭐뭐 같이 생긴 뭐뭐뭐, 라니, 헐헐. 

 

 

텔레비전 없이 산 지 20년 넘었다. 당연히 티브이 뉴스를 따로 챙겨본 적이 없다. 어제는 뉴스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다. 따뜻한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 미안할 수밖에. 마음만은 나도 애 데리고 가서 말하고 싶었다. "관악구에 사는 아줌마입니다~ 우리 공주님이 '하야'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등등. 그리고 내가 낸 세금 다시 내놔,~ 이런 말까지-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 그대로 소설집 나왔다.

좀 튕길 수 있으면 좋으려만, 솔직히 말해, 너무 기쁘다! 사심 없이, 마냥.

 

 

 

 

 

 

 

 

 

 

 

 

 

 

 

표지 이미지에 고양이를 제안하며 떠올렸던 그림은 피카소의 데생 두 점.  '엎드린 개 자세'를 취하는 고양이, 그냥 멍 때리는 것 같은 고양이.

 

 

지금의 표지, 전체적인 모양, 양감과 질감, 모두 다 마음에 든다. 10여년 전 <현대문학>에 실었던 단편 하나를, 모 평론가 선생님의 충고대로, 뺀 것은 무척 잘한 일인 듯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작가 프로필 사진. 좀 더 밝고 경쾌한 사진이 쓰이길 바랐는데, 좀 진중하고 가라앉은(?), 떫은(?) 표정의 사진이 들어갔다. 그날, 그러니까 지난 여름에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중 마음에 들었던 것을 올려 본다. 사람 일 어찌 될지 모르니 제일 젊고 제일 예쁠 때(그게 바로 지금이다!) 찍어두자.

 

집 근처 구청과 일반 주택 사이를 오가며 찍었다. 굳이 멀리 갈 필요 있나. 다 거기서 거기지.

 

등단 20년(이 숫자에, 헉, 했다!), 조촐하지만 목록을 한 번 만들어 본다.

 

삼십대에 쓴 것. <고양이의 이중생활>은 200?년도 한겨레문학상 본심에 떨어진 소설이다.

 

 

 

 

 

 

 

 

 

 

 

 

 

 

이십대에 쓴 것. 정말 안 팔렸지만 <그러니 내가 어찌 나를...>은 참 아끼는 소설이다.

 

 

 

 

 

 

 

 

 

 

 

 

 

 

 

어째 삼십대가 더 부실하냐?? 네가 면죄부가 돼라.

 

 

 

 

 

 

 

 

 

 

 

 

 

 

 

 

 

 

 

 

 

 

 

 

 

 

 

 

 

 

 

이미지 넣다 보니 <악령>은 이십대 중반, 유학 가기 전에 했던 번역이다. 이후 번역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듯한데 소설은 뭐냐. 계속 전락한 셈이 됐지만, 나는 나의 소설이 무척 성실하게 시간을 좀먹어 그 나름의 진화(퇴화 역시 진화다!)를 거듭하고 있다고 믿는다. 쓰는 것만이 답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몽 2016-10-1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축하드려요~
김연경님 번역을 사랑하는 독자로 (우연인지 위에 있는 책 다 있네요) 소설도 정말 기다려졌었거든요~
얼른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사진도 너무 예쁘세요.^^

걸으며자는사람 2016-10-13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도손 2016-10-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축하드립니다!

푸른괭이 2016-10-14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댓글이 세 개나 달리다니! 다들 감사합니다!^_^

always 2016-10-1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푸른괭이 2016-10-19 14:23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주문도 좀... ^^;
 

어젯밤부터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지더니 뭔가 무척 쓰고 싶은 아침에, 1999년 언젠가, 2001년(즉, 모스크바) 언젠가 무지막지하게 써놓았던 글 두 편을 다듬어 본다. 이십대 중반, 그 꽃다운(!) 나이에 나는 정말 괴상하고 살벌한 생각을 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세 번째 '악몽'을 써본다. 이 악몽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아주 다른 나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 "내가 결석한 나의 꿈." 최근 계속 맴돌던 싯구를 찾아본다.

 

오감도: 시 제 15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3. (...)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들 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아마 메모하기가 힘들었는지 3연, 5연은 빠져 있다.  출처는 권영민 편집 전집. 옛날에는 <문학사상사> 전집으로 읽었고 작년에 <뿔> 전집으로 읽었다. 잘 만든 책인데, 또 좋은 출판사였는데 없어져서(?) 뿔난다 ㅠ.ㅠ

 

좀 많이 읽어 식상한 감은 있으나 <거울>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거울>이 저 <오감도>의 온건(?) 버전 쯤으로 읽힌다.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마는 / 거울 아니었던 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염상섭의 <삼대>를 아주 느린 속도로(ㅠ.ㅠ) 조근조근(^^;;) 읽어가며, 이토록 타자 (+ 사회) 지향적인 작가가 있구나, 생각한다. 반면  10년 안팎(?)으로 설치다  간  저 어린 작가는 시종일관 '나-자의식'을 팠구나, 싶다. 물론, 산문을 읽어보면 전혀 다른 이상, 즉 김해경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분열 내지는 이중인격이야말로 이상의 문학의 핵심일 법하다. <권태> 같은 좋은 수필들은 제쳐놓고, 이런 편지만 봐도 뭔가 아찔하다. 생활인-자연인 이상과 문학가 이상은 이토록 다른 것이다.

 

 

 

- 편지 중 마지막. <9>

 

어제 동림이 편지로 비로소 네가 취직되었다는 소식 듣고 어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와서 나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이 집안 걱정을 하여왔다. 울화가 치미는 때는 너에게 불쾌한 편지도 썼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놓겠다. 불민한 형이다. 인자(人者)의 도리를 못 밟는 이 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정보다도 하여야 할 일이 있다. /쪼록 늙으신 어머님 아버님을 너의 정성을 위로하여 드려라. 내 자세한 글, 너에게만은 부디 들려주고 싶은 자세한 말은 2, 3일 내로 다시 쓰겠다.

- 1937. 2. 8. 동생 김운경(金雲卿)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4, 177-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이 너무 궁하던 차, 어제 수업 직후에 은행에 돈 빌리러 갔다가 나의 우수했던(!) 신용 등급이 하락하여 5백만원도 빌릴 수 없음을 확인, 아연실색하였다. (작년에는 그 자리에서 천만원을 빌려주더니!) '수신'(이런 어려운 용어란?!)이 꾸준히 5백은 되어야 한다나. 아니, 그 5백이 안 되니, 돈을 빌리려는 것인데! (같은 이유로 그 유명한 '마이너스 통장'도 안 된다니!) 하지만 돌아서서 생각해보면, 뭐, 오래 곱씹을 것도 없이, 그들이야말로 옳은 것이고, 나야말로 (거지임에 덧붙여) 등신임이 금방 깨달아진다. 그리고 나만 아는 '등신-스러움'의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이 모든 것이 전부, 소설 때문이라는 점이다! 정말 문자 그대로 '빌어먹고 (날도 추워지니!) 얼어죽을' 소설이다. 폐가망신하기 위해 소설 쓰나 보다. 흥, 그래도 계속 쓸 테다. 안 쓰고 수가 있나. 시시콜콜, 이런 정황 역시 너무 소설적이다.

 

 

 

 

 

 

 

 

 

 

 

 

 

 

 

 

소설이 언제부터 '돈'을 문제 삼나. 단순히 가난(빈곤), 기아 등등이 아니라 '돈' 말이다. 아무래도 자본주의가 있어야하고 대도시가 있어야 하고 또한 돈의 희로애락을 다 보여주려면 장편이어야 한다. 역시 발자크. 그의 인생 자체가 '돈 있음(넘침)'과 '돈 없음'의 시소 놀이임을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으면 알 수 있다.

 

 

 

 

 

 

 

 

 

 

 

 

 

 

 

 

대놓고 '돈 타령'하지 않으나 쥘리앙 소렐이 꿈꾸었던 그 부르주아(그 이전엔 귀족이었을 터) 사회 역시 결국 돈에 기반한 것. <마담 보바리>는 예의 그 시니컬한 플로베르의 세계관이 반영된바, 돈(=신용카드 빚)으로 신세를 망치는, 19세기판 프랑스 파리판 '된장녀'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을 정도다. 엠마가 사랑 때문에 망했다는 사람은 소설 대충 읽은 거다. 소설(특히 연애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미모(치장)이고 거기에는 엄청나게 돈이 든다. 엠마는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 위해 옷을 너무 많이 산다(맞춘다). 굳이 돈이 화두는 아니지만, 내친 김에 에밀 졸라도 떠오른다. <인간짐승>은 유감스럽게도 읽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졸라스러운' 제목이다.

 

 

 

 

 

 

 

 

 

 

 

 

 

 

 

 

돈에 대한 가장 건전한(-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관, 말하자면, 근검절약하는 중산층의 세계관의 모델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이 청혼(심지어 연애, 라고 하기도 뭣한!)과 결혼(심지어, 결혼식)의 과정, 즉 '짝짓기'로 이루어진 그녀의 소설에서 결혼 상대들의 재산, 재력은 무척 중요한 요건이다. 문제는 등장인물이 거의 모두, 이런 문제를 꺼림칙하거나 불편한 어떤 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이게 그들 인생의 제일 중요한 화두이다.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물론 걸작임에는 확실하지만!) 이 소설은,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해 말하듯, 돈 냄새를 풀풀 풍긴다. 그것이 거의 푸짐한 똥냄새처럼 느껴졌던 소설. 역시 미국소설답다는 느낌을 비교적 최근에도 받았다. 데이지를 얻기 위해 돈을 펑펑 써대며 연일 화려한 파티를 여는 개츠비, 정녕 위대하다.  

 

 

 

 

 

 

 

 

 

 

 

 

 

 

 

 

러시아의 문학의 경우, 귀족-지주 작가는 돈 냄새가 자욱한 소설을 쓴다,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외모와 매너와 재력 때문에) 열등감을 많이 느낀 투르게네프의 소설이 시종일관 온건한 사상과 세련된 서정주의로 가득 찬 것도 돈 많은 여지주의 외아들(?)이었던 그의 태생과 무관하지 않다. 한데, 그보다 더 부자였던 톨스토이는 훨씬 더 사실적인(!), 말하자면, 생활밀착형 소설을 쓴다. (언젠가 그와 돈 얘기를 했다.)

 

 

 

 

 

 

 

 

 

 

 

 

 

 

 

 

소위 세기말의 작가, 체호프는 어떤가. 사실 지금 이러고 있는 건 체호프 때문인데, 그에 관한 논문의 최종 교정본을 고치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해서이다. 

 

(...) 이런 시작에 걸맞게 다음날 치러진 결투(19)는 시종일관 희극적이다. 무엇보다도, 새벽 5, 결투의 참여자들이 모두 모였고 위치도 정해진 상황에서 계속 꾸물대자 먼저 입을 연 의사의 말이 압권이다

 

- Вам, вероятно, еще не успели сообщить моих условий. Каждая сторона платит мне по 15 рублей, а в случае смерти одного из противников оставшийся в живых платит все 30.”(444) 

아무래도 여러분에게 저의 조건을 아직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군요. 양측 모두 저에게 15루블씩 지불하고, 적수 중 한 쪽이 사망할 경우 살아남은 쪽이 30루블은 모두 지불한다, 입니다.”

 

심지어 이 말을 꺼낸 것도 굳이 돈 때문이 아니라, 사모일렌코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온 까닭인지, 관련자들에 대한 증오(“просто из ненависти, 444) 때문이다. 이런 정황까지 포함하여 결투에 입회한 의사가 소위 수임료를 언급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유례없는 일일 법하다.

 

<결투>의 주인공들은 정말 한심의 극치다. 고등백수, 한량인 라옙스키는 빚이 맨날 놀고 먹느라(카드, 술) 최소한 7백루블이나 되고 그의 사실상의 아내인 나제쥬다 역시 (보바리처럼!!) 옷을 너무 질러서 역시나 옷가게에 3백루블이나  빚을 졌다. 이곳, 카프카스의 터줏대감인 마음 좋은 의사(사모일렌코)는 사람들한테 돈을 너무 많이 빌려줘서 완전히 빈털털이인데다가, 더 가관인 건, 이놈한테 돈을 빌려주기 위해 저놈한테 꾸는 식으로 살아와서, 그 자신도 빚쟁이라는 것이다. 정말 너무 체호프적인 인물들이다!

 

 

 

 

   

 

 

 

 

 

 

 

 

 

 

체호프 주인공들의 이런, 뭐랄까, 어딘가 초월한 듯한 극도의 한심함은 희곡에서 더 도드라진다. 돈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오는데(특히 <벚꽃 동산>은 부동산이 처분되는 이야기니 더더욱), 인물들의 어린애 같은 울음과 또한 역시나 어린애 같은 웃음이 독자를 역시나 울게도, 또 웃게도 만든다. 한 반 세기전, 고골은 바로 이 돈(=속됨, 속물성, 비루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미쳐 죽었다.

 

 

 

 

 

 

 

 

 

 

 

 

 

 

 

 

소설 속 돈, 의 테마에서 절대 빼놓은 안 되는 작가는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다.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은 돈(혹은 가난)에서 출발, 그 흐름을 타고 이어진다. 가난해서 사랑도 잃고, 돈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고, 돈 때문에 아비 죽이고. 오죽하면 연구서 제목까지 이렇게 빠질 정도이다. 

 

 

 

 

 

 

 

 

 

 

 

 

 

 

 

물론, 출발은 돈이었을지언정 그 기나긴 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돈은 저 멀리 밀려나고 세상에는 오직 쓰는 나와 쓰이는 소설 밖에 없었을 터이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걸작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한데 우리 문학에서 돈은 어떤가. 아, 정녕 우리는 너무 굶주렸던 것인가. 도무지 돈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불가능했던 듯하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소설은 이런 것들. 특히, '해학'의 작가로 알려진 김유정의 <소나기>(아내에게 매춘시키는), <땡볕>(뱃속에 사산한 아이를 가진 채 죽을 것이 예견되는 아내) 등은 다시 읽어도 그 가난과 무지의 무게 때문에 너무 충격이었다..ㅠ.ㅠ 항상 굶주렸던 어린 아이가 떡을 많이 먹어 죽는(?) 결말의 단편도, 나의 유년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어, 울컥, 했던 소설이다.  

 

 

 

 

 

 

 

 

 

 

 

 

 

 

 

아마 그 다음은 지난 시절, 노동자 소설 같은 걸 꼽을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나. 고작해야 이 정도?

 

 

 

 

 

 

 

 

 

 

 

 

 

 

--- 

 

솔직히 그렇지 않나. 헬조선이라고는 하지만, 더 이상 돈-빈곤은 우리의 문학적, 소설적 화두가 아닌 시대가 됐다. 덕분에 소재-주제를 찾기 더 힘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으려나. 여하튼 다른 의제가 필요한 때다. 차라리 지진? -_-;;

 

언젠가 여동생이 말하더라. 돈이 있으니 싸울 일이 없다고, 너무 행복하다고. 물론 일상의 소소한 불행, 다툼이야 끊이지 않지만, 오히려 돈 덕분에 그것이 쉽게 무마된다는 것. 돈이 있어 보니, 우리 성장기의 많은 불운이 거의 99프로 돈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겠더라고. 심지어 육체적인 부분, 가령 차 멀미를 많이 하는 것 역시도, 소화기 장애와 자동차에 익숙치 않음(당연히 자가용이 없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다녔고 여행도 다니지 않았으니)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현재, 부유한 인세생활자에서 거렁뱅이 시간강사로 전락하니,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어디에 나오는 대사대로, 세상이 거의 통째로 나를 멸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역시나 체호프식으로 희극 비스므리하게, 받는다. 아웅, 어디선가 돈벼락이 떨어져야 할 텐데, 과연 어디서? 그러게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 않나. [고래]에서도 어느 장면에서 지붕에서(??) 돈이 떨어졌는데, 읽으면서 너무 행복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꿈과 희망'을 주는 소설이 필요하다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부는 즐겁지만 어렵고 또 어렵지만 즐겁다.

오래 전, 그러니까 학부 시절이니 20여년 전에 읽었던 문학사 책을 펼쳐본다. 그때 읽었던 것도 있고 읽으려 했다가 놓친 것도 있고 아마 읽었으나 그 사실 자체를 까먹은 책도 있고 반대로 안 읽고서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도 있고 뭐 그럴 것이다. 도서관(새로 정리된 서고가 익숙치 않아, '길치'인 나로서는, 정말 짜증난다오 ㅠ.ㅠ) 한 번 돈 다음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은 주문해서 보는 중이다. 

 

 

 

 

 

 

 

 

 

 

 

 

 

 

 

전부 다(!) 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현대문학사, 그 중에서도 소설 부분에만 집중한다. 권영민 선생은 정녕 교과서의 대마왕(^^)임을 보여준다. 내용의 알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 줄 넘어가는 문장도 없이 무척 간결하고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최대한 정독 중. 조동일 선생의 저 유명한 저서는 앞 부분은 딱 자르고 5권만 주문. 조만간 읽기 시작할 터.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 관련 그의 역작은 이것일 터. 언젠가 재미있게 읽은 듯하다.

 

 

 

 

 

 

 

 

 

 

 

 

 

 

한편, 이 참에 꼼꼼하게 읽어야지 다짐했다가 어마어마한 분량과 (익히 아는!) 너무도 진지한(ㅠ.ㅠ) 문체에 짓눌려 지레 포기한 역작은 이것. 하지만 경제 사정이 회복되는(과연 언제?ㅠ.ㅠ) 대로, 바라건대 겨울 방학 쯤엔 사서 볼 수 있길 바란다. (지난 여름, 정말로 우연찮게(!!) 아이의 유치원 근처에서 이 책의 필자를 만났다, 헐. 우리 아이한테 만원 주셨다...^^;;)

 

 

 

 

 

 

 

 

 

 

 

 

 

그 다음, 우리의 현대 문학 연구에서 결코 빼먹을 수 있는 그, 그의 그 많은 책들. 김윤식 선생이 김현 선생과 쓴 <한국 문학사>는 작년인가, 김유정에 관한 글을 쓰면서 비교적 정독한 바 있어, 다른 책을 더 주문했다.

 

 

 

 

 

 

 

 

 

 

 

 

 

 

 

사실 그는 각종 문학사도 많이 썼지만, 작가론-저서도 많아서 좇아가기가 힘들 정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론 아무래도 이광수 연구, 염상섭 연구,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임화 연구이다.(이상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고 여전히 감동(!) 받았다.) 

 

 

 

 

 

 

 

 

 

 

 

 

 

 

물론 문학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인바, 어떤 훌륭한 연구서도 연구되는 대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즉, 해당 작품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그럴 시간이 없으니 연구서를 읽는 것이다. 문학사를 뒤적이며 꼭 (다시) 읽고 싶은 몇몇 소설을 뽑아본다.

 

 

 

 

 

 

 

 

 

 

 

 

 

 

 

물론 일순위는 춘원 이광수. 내게 그는 아무래도 연애소설 작가처럼 남아 있는데, <무정>도 그렇고 <사랑>인가, <유정>인가 아무튼 고등학교 읽은 무슨 장편소설 한 편이 정녕 순애보처럼 기억되어 있어서 그렇다. <흙>, <단종애사>, 이런 걸 읽은 뒤의 느낌도 그렇다.

 

 

 

 

 

 

 

 

 

 

 

 

 

 

 

염상섭은 교과서에 실렸던 <삼대>를 비롯하여 대학 시절에 읽은 다른 소설까지, 단 한 번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소설가이다. 그를 다시 읽으려는 것은 역시나 공부(^^;;), 즉 의무감에서이다.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의 진가가 보일지도.

 

 

 

 

 

 

 

 

 

 

 

 

 

 

 

그밖에 언젠가 읽었던 이런 소설도 꼽아본다. 

잘 썼다, 못 썼다, 를 떠나 너무도 강렬했던 소설인 최서해의 <탈출기>, <기아와 살육>, <홍염>(?) 뭐 이런 것도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하다. 그 다음, 처음 읽는 순간부터 너무 좋았던 김동인. 그는 단편을 잘 썼지만, <운현궁의 봄>, <젊은 그들> 같은 장편도 어릴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시간을 어디까지 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열심히 읽어보자, 다짐해 본다. 공부는 적절한 강제가 필요하니 강의 커리큘럼도 여기에 맞추어 조금씩 변경한다. 읽을 작품의 목록은 계속 추가될 것이다.

 

-

 

'추석'의 '추'가 '가을'을 의미함을 증명하듯,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추석 날 오후부터 하루 반을 앓아누웠다. 꽉 막힌 코를 풀어가며, 까마득한 옛날(ㅠ.ㅠ)에 초고를 잡아둔 러시아문학 연구서를 다듬으며, 음, 반성해 본다. 국문학자들은 아무리 게을러도 외국문학자들에 비하면 반타작은 족히 하는 듯하다. 어지간하면 다 연구서 몇 권. 반면, 외국문학자는 (과연 외국어 배우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해서??ㅠ.ㅠ) 평생 퇴직할 때까지 연구서 한 두 권 없는 교수가 태반이다. 아, 물론, 평생 '퇴'할 '직'도 얻지 못하기 일쑤지만, 이것이 게으름을 정당화해주는 못한다. 그럴수록 더더욱 공부가 답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