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부터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지더니 뭔가 무척 쓰고 싶은 아침에, 1999년 언젠가, 2001년(즉, 모스크바) 언젠가 무지막지하게 써놓았던 글 두 편을 다듬어 본다. 이십대 중반, 그 꽃다운(!) 나이에 나는 정말 괴상하고 살벌한 생각을 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세 번째 '악몽'을 써본다. 이 악몽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아주 다른 나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 "내가 결석한 나의 꿈." 최근 계속 맴돌던 싯구를 찾아본다.
「오감도: 시 제 15호」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럽혀 놓았다.
3. (...)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들 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내게 가르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아마 메모하기가 힘들었는지 3연, 5연은 빠져 있다. 출처는 권영민 편집 전집. 옛날에는 <문학사상사> 전집으로 읽었고 작년에 <뿔> 전집으로 읽었다. 잘 만든 책인데, 또 좋은 출판사였는데 없어져서(?) 뿔난다 ㅠ.ㅠ
좀 많이 읽어 식상한 감은 있으나 <거울>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거울>이 저 <오감도>의 온건(?) 버전 쯤으로 읽힌다.
「거울」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 내게 귀가 있소 /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마는 / 거울 아니었던 들 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 잘은 모르지만 외로 된 사업에 골몰할 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요마는 / 또 꽤 닮았소 /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염상섭의 <삼대>를 아주 느린 속도로(ㅠ.ㅠ) 조근조근(^^;;) 읽어가며, 이토록 타자 (+ 사회) 지향적인 작가가 있구나, 생각한다. 반면 10년 안팎(?)으로 설치다 간 저 어린 작가는 시종일관 '나-자의식'을 팠구나, 싶다. 물론, 산문을 읽어보면 전혀 다른 이상, 즉 김해경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분열 내지는 이중인격이야말로 이상의 문학의 핵심일 법하다. <권태> 같은 좋은 수필들은 제쳐놓고, 이런 편지만 봐도 뭔가 아찔하다. 생활인-자연인 이상과 문학가 이상은 이토록 다른 것이다.
- 편지 중 마지막. <9>
어제 동림이 편지로 비로소 네가 취직되었다는 소식 듣고 어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와서 나는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이 집안 걱정을 하여왔다. 울화가 치미는 때는 너에게 불쾌한 편지도 썼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놓겠다. 불민한 형이다. 인자(人者)의 도리를 못 밟는 이 형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가정보다도 하여야 할 일이 있다. 아/쪼록 늙으신 어머님 아버님을 너의 정성을 위로하여 드려라. 내 자세한 글, 너에게만은 부디 들려주고 싶은 자세한 말은 2, 3일 내로 다시 쓰겠다.
- 1937. 2. 8. 동생 김운경(金雲卿)에게 보낸 마지막 엽서. (4, 1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