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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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작가 인생을 조망할 때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가 변태와 탈각의 순간을 보여준다면 <죄와 벌>(1866)은 그 이후의 모습이 진면목을 드러낸 첫 소설이다. 차기작인 <백치>(1868)와 <악령>(1871)은 세기의 걸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1880)로 가는 과도기적 작품이자 그 자체로 혼돈과 무질서로 점철된 묵시록이기도 하다. <백치>의 기본 서사가 열정-수난이라면 <악령>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시작된다.

 

 

2. 희화된 소설-비극<악령>

 

1) 정치소설로서의 <악령>: 허무주의 vs. ()허무주의

 

<악령> 극우-보수작가인 도스토옙스키가 예술보다는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기치를 내걸고 네차예프 사건을 소재로 쓴 정치소설, 심지어 정치팸플릿이다. 1860년대 러시아의 급진사상을 일컫는 허무주의(니힐리즘), 나아가 혁명을 통한 유토피아 건설의 꿈은 또한 필연적으로 신과의 투쟁’(무신론)과 닿아 있다. 이 맥락에서 쓰이고 읽힌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2)이나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1863) 같은 ()허무주의 소설은 <악령>에 비하면 오히려 온건한 소설이다. 젊은 날 사형선고까지 받은 이력이 있는 사상범이었던 만큼,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허무주의는 단순히 젊은 급진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온한사상에 대한 과도한 불안은 사실 통렬한 자기반성의 산물이며, 임종을 앞둔 스테판 베르호벤스키의 말은 작가의 참회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작품의 제목과 제사를 제공한 게라사(가다라)의 마귀(besy)’을 거칠게 해석하면, <악령>의 거의 모든 인물, 심지어 러시아 전체가 악령(besy)’에 들린 돼지 떼. 그런데 악령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기에 살아있는 육체에 빙의(憑依)되어야만 하는 존재이고 이 단어에 붙은 복수의 표식은 악령과 희생양, 폭력과 성스러움의 내밀한 근친 관계(지라르)를 암시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을 니힐리즘의 은유로 취하되 그 복잡다단한 양상을 크게 현실 층위와 관념 층위에서 형상화한다.

 

 

 

 

 

 

 

 

 

 

 

 

 

 

 

먼저 현실 층위의 정치-혁명에 관한 한, 시갈료프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는 혁명가의 두 양상(이론과 실제)을 보여준다. 시갈료프의 세계 체제론은 간단히 10분의 1(무한한 자유와 전제주의)10분의 9(절대복종)의 변증법에 근거한 지상낙원 건설 기획이다. ‘우리 편(nashi)’의 모임에서 시시껄렁한 소일거리로 소비되는 이 이론이 표트르의 칼과 결합하는 순간 거사-과업으로 바뀐다. 바쿠닌식 무정부주의를 구현하는 혁명가(‘열광자’)로서 그는 스타브로긴에게 이반 왕자-의 역할을 맡기고 동시에 공통의 피-죗값(샤토프 살해)으로 민중(5인조)을 올가미처럼 묶으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속된 불협화음과 웃음’, 무엇보다도 표트르의 이기주의와 부도덕성 때문에 혁명은 야비한 정치 협잡으로 전락한다. 그가 하필 샤토프를 지목한 것에 개인적인 원한(샤토프가 제네바에서 그의 뺨에 침을 뱉었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는 어딜 가든 배신과 밀고를 일삼고 유령’ 5인조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기에(키릴로프에게 손가락을 깨물려 상처를 동여맨 게 전부이다!) 더더욱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텍스트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인 미학적 죽음을 선고받는다.

 

한편, 권력의 상징인 신임 도지사 안드레이 안토노비치 폰 렘브케 역시 다분히 괴상한 인물로 그려진다. 자폐적인 성격이나 독특한 취미(종이접기, 소설 창작 등)는 차치하더라도 계속 마뜩잖은 정치적 행보를 보인다. ‘좌익스테판의 집을 수색하고 물품을 차압한 것은 부하 직원(블룸)의 착오라고 쳐도 시피굴린 공장 사태는 질박한 민중과 얼빠진 권력의 우스꽝스러운 충돌 그 자체다. 율리야 렘브케의 파국도 그녀의 허영심과 공명심, 오랜 세월 미혼의 굴욕을 견뎌야 했던 보상심리의 산물인 양 묘사된다. 표트르의 혁명에 동참한 5인조(럄신, 리푸친, 비르긴스키, 톨카첸코, 에르켈)와 그 밖의 인물(레뱌드킨, 에르켈)도 혁명의 희화를 위해 창조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진보 진영의 감상적 퇴물 스테판과 중도 성향의 온건파 속물 작가 카르마지노프가 얼떨결에 합세한다. 저속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매순간 스캔들을 갈망하는 대중의 존재(율리야 렘브케 패거리)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화자(안톤 라브렌치예비치 G-v) 역시 시피굴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사관처럼 주변을 수소문하고 현장답사까지 나간다. 여기서 연대기 작가의 성실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알 권리를 내세워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근대 저널리즘의 맹점이 드러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악령>이 위대한 것은 정치적 층위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층위, 종교-신학적 층위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정치 혁명을 통한 지상낙원이, 참으로 역설인데, 지상에서 불가능하다면, 또 다른 가능성은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몽상 속에서 점쳐볼 수밖에 없다.

 

2) 샤토프의 토끼와 키릴로프 인신(人神)’

 

해방된 농노이자 대학생 혁명가였던 샤토프(빛나는 인물)는 소설 속에 메시아의 도래를 꿈꾸는 슬라브주의자로 등장한다. 이 전향에 스타브로긴이 개입된 것으로 얘기된다. ‘토끼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토끼(=)’가 필요하다는 식의 대화에서 암시되듯, 샤토프에게는 믿음의 과제가 부여되었다. 러시아와 러시아 정교를 믿는다고 외치는 그가 정작, 신은 믿느냐는 스타브로긴의 추궁에는 유보적인 답밖에 내놓지 못한다. “나는나는 신을 믿게 될 겁니다.”(상권, ??.) 그리고 샤토프의 사상 자체도 맹목적인 국수주의와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현에 가깝다. 실상 혁명의 관념을 신의 관념으로 대체했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 관념의 대립 쌍인 속에서, 관념인이 아닌 그저 한 인간샤토프에게 일어난다.

 

대체로 샤토프는 스타브로긴에게 관념적 층위의 논의에 앞서 신분적, 물리적 주종 관계로 묶여 있다. 마리(마리야 샤토바)의 임신 및 출산은 분신이 원상에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희생제의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기적과 구원이란 그리스도가 러시아 땅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가 돌아와 (주인 나리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낳는 일일 것이다. 샤토프의 운명에서 핵심은 작가가 희극적으로 과장해놓은 외모(땅딸막한 몸집, 못 생긴 얼굴, 어설픈 행동거지)가 동정이라면 모를까 어떤 카리스마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덧붙여 작가는 그를 성스러움이 거세된 무의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애절한 휴먼드라마라면 모를까 숭고한 비극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말하자면 관념’(혁명, )도 죽고 인간도 죽은 것이다.

 

 

 

 

 

 

 

 

 

 

 

 

 

 

키릴로프에 관한 한 작가는 관념을 살리기 위해 인간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속성을 최소화한다. 가령, 샤토프와 같은 스물예닐곱이라는 나이는 깡그리 잊힐 만큼 무의미하고 건축기사라는 직업은 스테판의 유쾌한 농담대로 그의 사상에 대한 아이러니일 뿐이다. 자살에 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지만 소문만 무성하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차만 마시며 밤새도록 깨어 있다가 동틀 녘에야 잠자리에 든다. 이런 황폐한 무위 상태야말로 가히 관념인의 탄생을(그리고 뇌전증 발병을) 위한 질 좋은 토양인 셈이다. 간단히, 키릴로프는 도스토옙스키의 많은 백수 중 단연코 으뜸, 진정 종이로 만든 인간이다. 한편, 그의 인신(人神)’은 기독교의 근간인 신인(神人)’의 변형이며 그 자신은 과거의 샤토프보다 더 메시아에 가깝다. 자살을 통해 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그로써 그 자신은 최초의 인신이 된다는 것이 인신 사상의 요지다. 그 자체로는 대단히 양가적인 이 궤변이 논리적, 미학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 이 인물의 도덕성과 믿음의 깊이다. , 표트르가 치사한 행동분자여야 하는 것처럼, 스타브로긴이 미남의 부유한 귀족이어야 하는 것처럼, 또 샤토프가 불쌍하고 못생긴 농노여야 하는 것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어야 한다.

 

키릴로프는 매순간 좋음을 느끼기에, 자살의 관념에 탐닉하는 만큼이나 삶을 사랑하고 즐긴다. 죽을 날을 세면서도 건강을 위해 공놀이와 맨손체조를 한다. 완전히 고립된 채 살지만 누구와도(샤토프, 페디카, 옆집 갓난아이) 조화로운 공존을 영위할 수 있다.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 값비싼 권총을 수집하는 것도 굳이 자살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를 즐기는 듯싶다. 그가 관념을 먹어치웠든 관념이 그를 먹어치웠든, 어쨌든 진정한 니힐리스트는 니힐-()’를 꿈꾸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 순간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키릴로프가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미묘한 역설이야말로 훗날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를 매혹시킨 핵심적인 요소였으리라. 윤리적인 완성은, 비루한 현실과 각종 부조리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꿈꾸는 궁극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의 형이상학적 욕망’(지라르)을 잔혹하게 단죄한다. 최후의 순간을 사도가 아니라 원숭이표트르와 함께하게 한 것은 오히려 사소한 장치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표트르와의 우스꽝스러운 드잡이에서 드러나는, 키릴로프의 목숨에 대한 집착이다. 그의 자살은 그가 평온한 오만함을 자랑하며 꿈꾼 것과는 달리, 또한 독자들이 속 편하게 환상을 만드는 것과는 달리 절대로 원칙의 실현이 아니었다. 지리멸렬한 유예 끝에 행해진 자살은 관념의 실현이 아니라 마지못해 끝낸 면피용 숙제에 가깝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통해 최초의 인신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시체가 됐다. 말하자면 얻은 것은 관념의 육화는커녕 아무것도 없고, 잃은 것은 삶 자체, ‘햇살과 잎사귀.

 

 

3) 스타브로긴: 인간의 가면 vs. -악마의 가면

 

<악령>의 모든 논의는 이 소설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스타브로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신화적인 도식을 따르면, 분신들의 희생은 주인공-영웅의 삶-부활을 담보하고 이를 통해서 성스러움이 확보된다. 하지만 분신들의 파국에 이어 주인공마저 자살함으로써 <악령>신성한 희극(Divine Comedy: 신곡)’, ‘소설-비극’(이바노프)도 아닌 희화와 그로테스크로 점철된 희비극이 된다. 스타브로긴은 신적인 존재임에도 희뿌옇고 신비스러운 아우라가 아니라 엄연히 살과 피를 가진 소설 속 인물로 창조되었다. 그의 유물론적 토대를 제거 혹은 은폐하는 방식은, 키릴로프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젊음과 미모, 체력, 부와 세속적 지위 등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그로써 1860년대 러시아 귀족사회가 낳은 패륜적 돌연변이라는 사회적 동기화가 이루어진다. 그의 존재를 규정하는 핵심어 부정(否定)’(다리야에게 보내는 편지)은 상태나 정황이라기보다는 무한한 운동성(‘’)을 말하며 부정의 순환은 곧 그를 부정(不定)’으로 몰아간다. 아마 그 기저에 깔린 것은 어린 시절 가정 교사 스테판이 심어준 우수의 감각이었으리라. 그것을 채우기 위해 그는 신의 인간 창조를 변주하며 특정 대상에게 자신의 관념을 집어넣고 형상(obraz: 성상이라는 뜻도 있음)’을 고착시킨다. 그럴수록 정작 그 자신은 아예 형상이 없는(bezóraznyj), 고로 추한(bezoráznyj) 존재가 된다.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관념이 지상에 왕림할 때는 어쨌든 형상과 이름을 빌려야 하고, 그 때문에 그는 가면을 쓴 자, 요컨대 참칭자 드미트리’(마리야 레뱌드키나의 폭로)가 될 수밖에 없다. 스타브로긴의 다른 시험(리자 투시나 - 파괴적인 열정의 시험, 마리야 레뱌드키나 - 원시적 구원 가능성의 시험, 다리야 샤토바 - 영원한 안정의 시험 등)도 그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심연의 깊이를 확인시킬 따름이다. 자살이라는 결말 역시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라는 신비스러운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 이바지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이미 편집자의 강압이 없음에도) 그토록 공들여 쓴 한 장()을 <악령>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까지 묻혀있던 원고 티혼의 암자에서스타브로긴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스타브로긴은 고해를 들어주는 자(confesser-confessor)가 아니라 고해하는 자(confesser)이며 인간의 가면을 쓴 신-악마에서 -악마의 가면을 쓴 인간으로 내려선다. 물론 그의 서류는 명백히 고해성사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지만, 여기에 그의 원죄이자 십자가(‘스타브로긴의 그리스어 어원은 십자가를 뜻함)가 들어 있기도 하다. ‘위대한(크나큰) ’(특히, 마트료샤를 상대로 한 범행)를 범한 자로서 악령에 들렸다 치유된 환자처럼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 동시에 악령의 수장으로서 돼지 떼와 더불어 파멸하기를 바라는 것, 둘 다 진실이며 또한 거짓이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욕망과 그것을 거부하는 척력 사이의 충돌, 형식적으론 고백()고백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내적 분열이 밖으로 표출될 때는 자연스레 웃음이 발생한다. 티혼 앞에서 스타브로긴이 보이는 신경질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서류를 둘러싼 정황이 모두 우스꽝스럽다. 문건을 작성한 것은 일정 부분 자기 징벌이라고 쳐도 그것을 3백 부나 인쇄하고 번역해서 외국으로 보내겠다는 생각은 어처구니없다. 신실한 참회와 위악적인 노출증 사이의 경계는 실로 애매하다. 과연 그는 무위와 권태에 허덕이며 저질의 범죄나 저지르는 28세의 귀족 청년일 따름인가.

 

티혼의 예측대로 스타브로긴은 또다시 출구를 찾듯 새로운 죄악 속으로 뛰어든다. 그의 모든 범행은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하고 점잖게 행해진다. “아무도 탓하지 말라, 나 스스로 한 일이다.”(하권, ??) 자살 이후 남겨진 유서는 강렬한 반면, 독자의 상상의 몫으로 남겨진 그의 최후(다락방에서 목을 매달 비단 노끈에 열심히 비누칠하고 망치로 벽에 못을 박는 모습)는 희극적이다. 그것까지 포함하여 그는 나는 그를 나의 심장에서 꺼냈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고백에 충분히 부합하는 인물로, 작가 자신의 십자가로 남는다. 이는 <악령>의 숙명이기도 한데, 이 소설은 묵시록적 파토스의 균열과 희화를 고스란히 품은 채 새로운 신화의 영역을 연다.

 

*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나의 첫 번역서이다. 1990년대 후반 석사과정생이었던 나는 모 출판사에서 기획한 도스토옙스키 전집 출간 작업에 원문 대조 교열 인력으로 참여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초여름 <악령>의 번역가로 이름 석 자를 올리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때 이미 나는 두 권의 소설집을 낸 소설가이기도 했다. 이십 대의 나는 물론 사십 대의 내가 번역가보다는 소설가로 더 성장해 있길 바랐지만, 보다시피 인생은 그렇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동안 많은 독자가 내 번역으로써 도스토옙스키를 만나고 나 역시 인세 생활자로서 그 덕분에 먹고산다. 20년 만에 대대적인 개역 작업을 하며 제일 놀란 것은 분량이 줄어들어서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은 변함없지만 나의 번역본은 더 맛깔스러워졌다. 이 압축의 능력이 번역가-소설가 20년 인생의 성취랄 수 있겠다. 이만하면 존재의 알리바이로는 충분하다.

 

 

 

 

 

 

 

 

 

 

 

 

 

 

 

 

 <악령>하면 1993년부터 인생의 한 시절을 함께한 친구가 떠오른다. 그 친구는 당시 내 눈에는 세계문학 고전을 다 꿰고 한국문학도 최근 작품까지 안 읽은 것이 없었다. 도스토옙스키도 대표작뿐만 아니라 저 고릿적 <정음사>판 전집을 섭렵한 친구였다. 가진 밑천이라곤 문학책 좀 읽은 것밖에 없었던 나는 그 친구 앞에서 늘 주눅이 들곤 했다. 그 친구가 제일 좋아한 소설이 <백치>와 더불어 <악령>이었다. 특히 키릴로프를 참 좋아했다. 학업을 계속 이어갔더라면, 이 소설만은 그 친구가 나보다 잘 번역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악령>은 여러모로 지옥에서 보낸 한 철’(랭보) 같은 책이다. ‘자살-관념에 탐닉하느라 우리 자신이 저 햇살과 잎사귀같은 존재임을 그때는 몰랐다. 감히 모를 수 있었던 것도 청춘의 특권이다.

 

<악령>은 자살(키릴로프, 스타브로긴), 피살(샤토프, 레뱌드킨 남매, 페디카), 자연사, 병사와 사고사(스테판, 마리와 신생아) 39명 중 13명이 죽는, 그야말로 선혈이 낭자한 소설이다. 저들의 푸른 무덤 위에서 여러분 삶의 꽃을 피우시라. 여러분, 아니,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한 시절을 축복한다.

 

 

 

 

 

 

 

 

 

 

 

 

 

 

 

 

 

** 최근에 자료를 다시 좀 검색해보니 <악령>의 등장인물이 39명인 것으로 보인다. <열린책들>판 해설에는, 내가 직접 센 것인데, 몇명 빼먹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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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1-07-11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령은 백치 다음으로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었는데, 읽으면서 계속 내가 악몽도 아주 심한 악몽을 꾸나 싶을 정도의 소설이었습니다. 여름때 식중독으로 신림 고시원에서 혼자 죽을 지경으로 끙끙 앓을 때 꿨던 악몽같은 기분?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기도 하지요. 전 열린책들 판으로 읽었는데 번역이 가장 스타브로긴 스럽지 않았나 싶어요...^^ 민음사판도 읽어야 하겠습니다....

푸른괭이 2021-07-11 12:10   좋아요 2 | URL
2-3년 동안 작업했어요, 읽기가 더 편하실 겁니다^_^
<백치>도 빨리 시작하고 싶은데 밀린 번역이 좀 있네요 -_-;;

Comandante 2021-07-19 15:30   좋아요 0 | URL
멋진 번역이 더 멋져졌군요. 백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소설입니다.

푸른괭이 2021-07-19 18:11   좋아요 1 | URL
앗,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타브로긴‘님!^_^
 

 

벌써부터 세일즈포인트가 올라가는 걸 보니 확실히 도-키답다. <악령>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손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여러분은 고급 독자다. 다른 한편, 이 소설이 접수가 안 된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급^^; 독자인 건 아니다. 정말이지 어려운(난해하고도 난삽한) 책이다.

 

 

 

 

 

 

 

 

 

 

 

 

 

 

 

 

 

"표지만 바꿔서 냈나?"

오, 나이브한 질문이여! 여동생의 질문에, 일반 독자들도 그리 생각하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억울하지만, 그것도 세상의 이치, 일의 원리가 아니겠나 싶다...^^;; 모름지기 일이란 내가 좋아서 해야 하는 법, 나는 <악령>이 (어렵지만) 좋고 또 번역 일이 (힘들지만!) 좋다...^^;  

 

<닥터 지바고> 완고, 송고한 다음 열린책들판 <악령>을 스캔 뜨고 그 파일을 한글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부터 했다. 물론 다 깨진 파일을 멀쩡한(?) 파일로 일일이 만들고(알바라도 부탁할 조교가 없다 ㅠㅠ), 이른바 개역에 돌입했다. 원래는 한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책으로 볼 때는 이 정도 번역도 괜찮다 싶었던 것이, 막상 파일로 만들어 손대기 시작하니 아주 세상이 캄캄했다. 어휴, 내가 뭐하러 이 고생을 사서 하지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하면 할 수록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악령>이 뭔가 굉장히 애절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번역 시작할 때 아이가 초등 입학했다. 원고 넘겼을 때 아이는 (코로나와 함께) 3학년이 되었고, 원고가 책이 되는 동안 아이의 4학년 여름방학이 멀지 않은 시점이 됐다.(4-2 우공비 전과목세트 주문해야 할 때다^^;;)

 

 

 

나의 첫 <악령>은 저것. 편집부를 통해 디자인 관련으로, 저 이미지를 보내면서,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종교성, 즉 퇴마의 느낌이 드는 것을 쓰지 말 것, 둘째, 살인이나 혁명의 느낌 없는 이미지를 쓰면서 은근하게 뭔가 음산한 분위기를 전할 것. 굳이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악령> 표지는 노골적으로 후덜덜한 이미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오래 전 대학 시절에 읽은 범우사 <악령>은 참 좋다. 상권은 초록색, 하권은 저런 갈색. (이철 번역, 두고 두고 감사한다!) 그리고 내가 받은 표지 시안은 이것.

 

 

표지 그림도 너무 좋고(거의 흙빛의 갈색도 좋고), 진홍색, 적자색의 띠(?) 색깔도 너무 좋았다. 다만, 실물을 받아보니 붉은 느낌보다 갈색 느낌이 강해서, 그게 다소 아쉬웠다. 저 표지의 원화는 에곤 실러.

 

(self-seer: man and death)

 

사실 표지 시안이 거의 확정되기 전, 내 나름으로 떠올린(<바니타스 정물화> 검색하다가 새로 알게 된)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것과 너무 결이(!) 비슷하여 놀랐다. 저 시안을 처음 봤을 때 내가 한 말. "앗, 덜 외롭고 좋네요." 정말이지 '인간'만 있지 않고 '죽음'도 있어서, 저렇게 해골만, 담배만 있는 것보다야 낫다. 한편으론, "나는 나의 고독과 함께 결코 혼자가 아니라네", 이런 조르주 무스타키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기도...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놀라워라. 밀밭과 평범한 얼굴들-초상화들과 아늑한 방과 해바라기와, 그리고, 해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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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6-27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령> 표지 보면서 안 그래도 푸른괭이님 번역이구나, 진짜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차후 반드시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푸른괭이 2021-06-27 13:19   좋아요 1 | URL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읽어볼 만한 소설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독자들이 보다 더 접근하기 쉬운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교하게 됩니다.

초란공 2021-06-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많으셨네요^^ 표지까지 고민하시고~ 저도 고급 독자가 되고 십습니다~!^^

푸른괭이 2021-06-27 21:13   좋아요 1 | URL
예, 이 기회에 한 번 시도해보세요!
 

픽션과 기교

 

 

 

 

 

12월을 태우고 11월을 적시는 마음으로

10월을 닫고 9월을 여는 마음으로

 

구불구불 머리 숱 많은, 큼직한 초식동물처럼 우울한 청년과

키스하고 싶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마구 허우적대며 

서로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몸 속으로 빨려 들고 싶다

 

8월을 버리고 7월을 줍는 마음으로

6월을 보내고 5월을 맞는 마음으로

 

이렇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 맞고 있음에도

죽지 않다니, 고문보다 살아 있음이 더 징그러워

미끄럽고 끈적하고 시큼한 것이 에로틱해

 

4월이 지나고 3월이 오는 마음으로

2월이 매장되고 1월이 부활하는 마음으로 

 

상처 딱지에서 상처의 핏물로, 얻어 맞는 순간으로

그렇게 독하게 도치된 시간의 순서로

라면에 달걀을 풀고 유정란 껍질을 톡 까는 거지

 

 

 

*

 

 

 

 

 

 

 

 

 

 

 

 

 

 

 

 

<에이프릴 마치>(4월 3월)은 <<픽션들>> 중 <허버트 퀘인>에 언급되는 소설 제목.  

고문 얘기는 재독, 정독한 조지 오웰 <1984>의 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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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후회 

 

 

 

 

꿈에서

너무나 달라진 고향집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고

휴대폰을 잃고 전화 거는 방법을 잃고 심지어 아이도 잃었다

 

내가 이런 꿈을 꾸려고 다시 잤나

이런 식의 연속 잃음을 겪으려고 무려 한 시간이 넘도록 자고 있었나

 

 

 

 

*

 

 

시인 신해욱의 소설 <해몽전파사>를 샀다. 사는 김에 시집 <무족영원>도 샀다. 나도 잠이라면 워낙 많이 자서 꿈도 많이 꾸는데, 시인-소설가가 무슨 얘기를 해놓았을지 궁금하다. 시집 처음 나왔을 때 '무족영원'은 제목이 특이하여 검색해보고 너무 징그러워서 ㅠㅠ 안 샀던 것인데, 이번에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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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위로

 

 

 

버스를 놓쳤어

이젠 비까지 오겠어

빗물에 미끄러지겠군

 

최악이라고?

아직은 최악이 아니야

더 기다려봐

 

오늘 바닥을 쳤어

천만에, 지하도 있는걸

B1인 줄 알았는데 B3야  

 

 

 

*

 

비정상회담

https://www.youtube.com/watch?v=h_8l8W-qQ6c&t=792s

프랑스인들이란 정말^^; 일본식도 마음에 든다. 난또까나르. 어떻게든 되겠지.

 

아는변호사(아변) : 내가 무너져 내리던 날

https://www.youtube.com/watch?v=sa9DylSt0iI

여기가 제일 (밑)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가 -_-;;

 

*

 

 

도중에 직원이 바뀌어서, 아쉽게도 ㅠㅠ 분위기도 바뀌었다. 장미가 없어서 저 짙은 보라색의 리시안셔스를 샀다. 한 대에 저렇게 각기 다른 색 꽃이.  지난 겨울에서 봄, 참 좋았다. 꽂집 드나는 재미가. '고터'에서 사온다고 한다.

 

지난 3월, 비오는 날, 낙성대 어디에서 당첨된 도시 텃밭, 농부증 받아들고 학교 뚫고 집으로, 텃밭으로 가던 길. 그때는 그게 최악인 줄 알았는데, 지난 봄에 비하면 그때는 천국이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살아야지.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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