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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올초 건강검진에서 췌장에 혹이 보인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미 여러 지인을 췌장암으로 보낸 경험이 있기에, 각종 검사가 진행된 한 달의 시간 동안 난 생을 정리했다. 각종 서류를 미리 준비해 클리어 파일 홀더에 차곡차곡 정리해 옆지기에게 알려줬고, 아이들에게도 미리 유언을 해두었다. 난 꽤나 사무적으로 유능하게 일처리를 진행했다.
그런데 최종 검사결과 앞으로도 추적 관찰은 필요하지만 암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기쁘다는 듯이 소식을 전하는데, 난 순간 냉정을 잃고 무너졌다. 3개월, 길어야 1년을 넘지 않을 줄 알았던 단기 프로젝트가, 끝이 없는 하자보수의 나락에 빠진 거 같았다. 막막해서 눈물만 났다.
어찌어찌 병원문을 나선 뒤 지난 가을까지 맥이 빠진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난 이미 생을 마무리했는데, 내 앞에는 여전히 생이 남아있었다. 난 내 앞에 새로 뚝떨어진 시간을 어떻게 계획하고 지탱해 나가야 할 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가족들과 지인들의 따뜻한 격려에 힘입어 지난 가을 이후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중이다. 일단은 손에 잡히는 책을 이것저것 읽어치우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답은 못 찾아도 신경은 분산되는 효과가 있는 듯 하다. 그러다 읽은 책이 '삶의 한가운데'이다.
분명히 어렸을 적 읽은 책인데, 손톱 만큼도 기억나지 않는 책이었다. 읽다가 집어던졌던 걸까. 아니면 글자만 읽은 걸까. 하여간 처음 읽는 책처럼 읽는데, 재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건 니나의 고백 때문이었다.
나는 누워서 기다렸어. 죽음을, 아니, 죽음의 상태를, 배후를 기다리고 있었어. (중략) 나는 아직 살아있었어. 그리고 나는 삶 속으로 다시 내던져졌던 거야. 나는 몹시 부끄러웠어. 위대한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 (중략) 죽음이 나를 데려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죽음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어. 삶쪽으로 돌아서게 된 거야. 그런데 산다는 것은 그 무렵의 나에게는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을 의미했어. 그 밖에는 없었어.
끝까지 읽은 지금도 여전히 니나는 삶의 재개를 어떻게 2번이나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자살까지 시도했었으면서, 누군가의 자살을 도와주기도 했으면서, 니나 당신은 어떻게 난 몰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거지? 하아, 일단은 닥치는대로 더 열심히 읽는 수 밖에 없는 걸까, 아니면 니나를 다시 읽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루이제 린저의 전기를 읽어볼까.
49쪽 니나의 고백
126쪽 니나의 편지
136쪽 니나의 소설
211쪽 니나의 토론
303쪽 니나의 시도
345쪽 니나의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