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반차를 내고 기운차게 출발~했으나 한주의 피곤에 지친 옆지기가 운전 도중 졸리다고 했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고속도로에서 내려 대성리역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옆지기가 잠시 오수를 즐기는 동안, 아이들은 가평군 지도를 보며 다음번엔 쁘띠프랑스에 놀러가자고 계획을 세웠다.
첫번째 여행지는 남이섬. 애들 때문에 따뜻한 선실 대신 강바람 맞으며 오들오들.
남이섬에 도착해보니 문 이름은 입춘대길인데, 막상 우리를 맞이해주는 건 얼음산.
겨울이라 공연은 없지만 음악이 흐르고 있어 나름 분위기 있다.
겨울치고는 따뜻한 날씨지만 강변 산책이다 보니 잠시 몸을 녹이려고 들어간 정자에 책이 비치되어 있었다. 여기말고도 곳곳에 책이 있는 작은 정자가 있어 좋았다.
섬을 반바퀴 돌고 나니 이제는 정말 추웠다. 몸도 녹일겸, 구경도 할 겸 섬의 시내(?)로 방향 변경. 위칭청의 원초적인 진흙공예가 흙과 생명의 풍요를 보여주는 곳.
위칭청 전시관에서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나 보다. 어느새 캄캄해져 더 이쁜 길
남이섬에서 나와 숙소에 짐 푼 뒤 바로 저녁 먹으러 풍물시장. 옆지기의 주장에 전병이랑 장떡, 녹두빈대떡, 부들전, 감자전, 동그랑땡, 두부전 등 전 코스요리(!)를 즐겼다.
굿스테이라 믿고 왔는데 이번 여행의 최대 NG였던 숙소. 청소상태도 엉망이고, 화장대 위에는 떡하니 콘돔이 비치되어 있고, 복도는 어두컴컴한 조명... 요금이 싸고, 방 넓은 거랑 컴퓨터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둘째날 첫코스. 아침을 숙소에서 컵라면과 누릉지로 떼우고 서둘러 왔는데, 안타깝게도 배는 10시가 넘어야 뜬단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물문화관에 가려고 했는데, 역시 10시 개장. 아쉬운 마음에 전망대에서 사진만 몇 장.
당나라 공주에게 스토커가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상사뱀으로 변해 공주에서 떨어지지 않았단다. 이 상사뱀을 떼놓을 비법을 찾아 헤매다 어찌어찌 청평사에 이르러 회전문에 들어서니 그 뱀이 드디어 성불을 하더라는 전설이 있단다. 청평사가 고려시대 절인데 당나라 공주? 좀 이상해서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시기가 안 맞는다. 하지만 설화는 역사가 아니니 그냥 넘어가라는 옆지기의 주문. ㅎㅎㅎ
자그마한 폭포지만 꽁꽁 언 얼음벽 뒤에 물이 흐르고 그 밑에 제법 깊어보이는 폭포소가 있어 운치 있었다.
구송폭포 옆에 당나라 공주가 살았다는 공주굴이 있다. 진짜 공주는 콩 한 알만 매트 밑에 있어도 밤새 잠을 못 잔다는데, 역시 당나라 공주는 진짜 공주는 아니었나 보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 안타깝게도 명문은 눈에 덮여 볼 수는 없었다.
오봉산을 올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
태감국사 탄연의 서예 명문을 볼 수 있는 비석이라는데, 세월의 마모로 인해 탁본으로 재현한 거란다. 쥐뿔도 모르는 내가 봐도 정갈한 글씨가 탄성을 자아낸다.
청평사 경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뷰 포인트. 정말 이 나라의 근사한 경치는 부처님이 다 선점하신 듯. ㅎㅎ
원래 내가 먹고 싶었던 건 빠가사리 매운탕이었는데, 매운탕을 못 먹는 옆지기를 고려해 메뉴 변경. 빙어튀김 맛남. 산채비빔밥보다 딸려나오는 시래기된장국 더 맛있음. 메밀전병은 비추
아까 못 봐 다시 왔건만 옆지기의 재촉으로 1층밖에 못 봄. ㅠㅠ
문배마을 가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옛날썰매 무료체험축제. 아이들은 물론 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썰매를 타봤는데, 알고보니 난 썰매신동이었다. 나이 마흔넷에 재능을 발견하다니 오호 통재라.
구곡폭포 오르는 길은 꿈, 끼, 꾀, 깡, 꾼, 끈, 꼴, 깔, 끝이라는 구곡혼을 찾는 길. 그 중에서 우리 가족이 꼽은 으뜸은 깡. 꿈을 이루는 꾼이 되기 위해 끼와 꾀도 필요하지만 이도 저도 없으면 깡이 최고!
웃긴 건 여기서 몇 년간 못 보고 지낸 후배 부부 가족을 만났다는 것. 세상이 참 좁다 싶기도 하고, 예정에 없던 문배마을 코스로 온 게 인연 같기도 해 정말 반가웠다.
청평산장의 메밀전병이 마뜩찮았던 옆지기가 메밀촌떡 간판에 빨려들어갔다. 메밀전병과 감자떡을 결합했다는데, 2박3일 동안 내가 먹었던 것중 난 이 메밀촌떡이 정말 최고라고 생각한다.
빙벽 등반으로 유명하다더니 빼꼭히 매달려 있는 사람들이 마냥 존경스러웠다. 폭포에서 2박3일간 유일한 가족사진을 찍고 문배마을가는 코스로 되짚어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여 있고 꽤 가팔라서 아이젠 있는 사람만 가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안타깝지만 포기. ㅠㅠ
문배마을을 못 간 덕분에 시간이 남아 내 소원대로 이디오피아 벳에 왔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 커피는 안 좋아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로스팅 까페라니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리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진하게 배어나오는 원두향에 감탄하고 이국적 인테리어에 또 한 번 감탄. 다만 역시 내 입에는 이디오피아 하라도, 이르가체페(예가체프)도 메마른(?) 맛이다. 어쨌든 여행 기념품으로 이디오피아 왕실문양이 있는 커피잔과 잔받침 셋트를 구매했다.
춘천에 닭갈비 먹으러 가자는 딸아이 성화로 유발된 여행인데, 한 끼도 안 먹고 갈 수 없어 명동닭갈비골목을 찾았다. 이 동네 맛은 다 표준화되었다는 말을 믿었는데, 직원의 스킬은 다른가 보다. 떡사리, 우동사리 다 태우시고 막국수는 설탕국이고. ㅠㅠ 그래도 애들은 잘만 먹는다.
모처럼의 가족여행이니 좀 더 놀자는 옆지기 의견에 공지천 야경을 구경하러 갔다. 이리저리 헤매다 우연히 상상마당까지 가게 됐는데, 늦은 시간까지 음악과 책을 주제로 한 상상BOX 기획전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건 열심히 책을 골랐는데 POS가 마감되어 구매가 안 된다고. 코 앞에 책이 있는데 살 수 없다는 게 정말이지 억울했다.
셋째날 체크아웃을 하고 옆지기의 성화에 아침으로 두부찌게와 사대 콩탕 먹으러 또 북산집에 옴. 옆지기도, 애들도 춘천의 최고 맛집은 북산집이란다. 점심 때 먹으려고 메밀전병도 5인분이나 샀다.
애니메이션 박물관 가는 길이 알고 보니 박사마을 코스였다. 1999년에 박사가 60명이 넘어 선양탑을 세웠다는데, 지금은 2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셋 다 박사되면 좋겠다는 야무진 꿈.
땅은 내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되었네
내 모든것 혼을 부어 자주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날이 그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신숭겸 묘역 왔다가 우연히 들림. 비록 유물은 다 도굴되어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지만, 명당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아 꽤 높은 분이었을 듯.
왕건의 신하 묘가 이 정도라면 개성에 있는 왕건릉은 얼마나 어마어마할까 생각해본다. 능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으로 보면 우리 생각에는 제일 오른쪽이 진묘일 거 같다. 그동안은 세종대왕 영릉 묘참봉이 꿈이었는데, 시조릉의 묘지기가 되어도 좋겠다.
아이들만 애니박물관+로봇갤러리+4D영화관 입장시키고 나랑 옆지기는 구름빵 까페에서 쉬었다. 사실 나도 기대했던 코스였는데, 몸이 급격히 안 좋아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애들은 로봇갤러리에서 로봇축구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은 다 보낸 듯 했다.
에필로그
여행 도중 라디오에서 숙제처럼 여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런 여행이 있다면 저런 여행도 있는 법. 엑셀로 계획했던 모든 곳에 가진 못했지만 계획보다 더 많은 곳에 갔던 여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