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멀어진 관계로 7시 30분에 아이를 놀이방에 맡긴다. 졸립다고 계속 침대로 기어들어가는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여, 간신히 집을 나서면...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할머니 "아니, 이 새벽 댓바람에 아기 끌고 나와? 쯧쯧쯧, 엄마가 돈 번다고 애가 뭔 고생이냐, 쯧쯧쯧, 불쌍한 것. 아침은 먹었어?"
나 "놀이방에서 아침 먹어요"
할머니 "에구, 그러니까 저리 비썩 말랐지. 집하고 같나. 밥까지 못 얻어먹고 아이고, 애처로와서 어찌 직장 다녀."

무너지는 억장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엘리베이터를 내려 종종걸음을 치는데

동네 아줌마(전업주부) "어머, 벌써 출근해요? 요샌 더 빨리 나가시는 거 같네요."
나 (앗, 맨날 마로 놀이방 흉보는 아줌마네. 화장실이 어떻고, 에어콘이 어떻고, 성질 사나운 애가 있네 어쩌네 하며, 아픈 데만 쏙쏙 찌르는 사람인데, 오늘 아침은 정말 왜 이러냐 궁시렁궁시렁) "아, 예, 회사가 목동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아줌마 "어머, 여기서 거길 어떻게 다녀요. 회사 관두시는 게 낫겠다. (슬쩍 눈치를 보며) 애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나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얼버무리고 그냥 감. 속으론 그래, 니 남편은 뭐 하는데? 삿대질하며 아줌마 멱살 잡는 상상을 함)

놀이방 도착. 문을 여니

원장선생님 (방실방실 웃으시며 맞이하나)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나 (속으로만 원장선생님도 남편 출근시키고 큰애 학교보내야 하고 작은애는 다른 놀이방 보내셔야할텐데 정말 미안해요 주절거리면서) "예, 안녕하세요"
원장선생님 (여전히 방실방실 웃으시며) "회사 멀어지셔서 힘드시죠? 그런데 오늘도 많이 늦으실까요?"
나 (고개도 못 들고)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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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7-2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신 마음, 누가 알까요. 뭐 저도 아무도 제 마음 모르는 것 같아서 화도 자주 나지만요. 그래도 힘내세요. 결국 조선인님 혼자만을 위해서 고생하시는 건 아니라는 것만은 모두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보기 싫은 사람을 연달아 만나면 정말 기분 나쁠 것 같아요. 특히 저렇게 개인적인 문제를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물어보는 인간 정말 싫어요. 정말 님의 상상에 동감을 표합니다......

starrysky 2004-07-2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저도 너무 속상합니다. 회사는 왜 이사를 가서 조선인님과 마로를 더 고생시키는지.. 그리고 주변의 도움 전혀 안 되는 사람들은 왜 그리 남의 일이라고 혀를 함부로 놀려대는지.. 안 그래도 속상하던 마음이 그런 무심한 한 마디에 우장창 무너져 결국 눈물을 내쏟게 만들지요.
제가 아는 한 언니도 아이가 셋인데(막내는 이제 막 2돌 됐지요) 원래 가까운 회사 다니다가 한참 먼 곳으로 옮겼거든요. 자기 출퇴근하면서 고생하는 것도 고생이지만 그 옮긴 회사가 워낙 바쁘니까 애들 봐줄 시간도 거의 없고, 신랑도 매일 야근이고 그러니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래도 애가 많으니까 언니도 벌어야 하는 상황이고..
조선인님이나 그 언니나, 힘든 상황 뻔히 보이는데도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가 없어 더 안타깝고 속상하네요.

조선인 2004-07-2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첸초의 시종님, 별총총하늘님(저도 바람구두님따라 이렇게 부를래요. 정말 이뻐요), 고맙습니다. 솔직히 오늘 하루 종일 많이 우울했는데, 털어놓고 나니, 좀 낫네요. 할머니나 아줌마나 딴에는 걱정해주는 거지만, 제발 애 듣는 앞에서 불쌍하다는 소리를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애도 다 알아듣거든요. ㅠ.ㅠ

비발~* 2004-07-2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 크면요, 아이가 되레 이해해준답니다. 힘내세요.

Smila 2004-07-2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업주부라서 아는데, 전업주부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걱정해준다기보다는) 한편으로는 질투가 나서 그러기도 한답니다. (다른 전업주부들까지 다 같은 부류로 모는 것 같아서 죄송^^;;;) 다른 사람들 참견하는 말에 다 신경쓰고 살면 피곤해서 못 사니까 그냥 무시하시는게 맘 편할꺼예요.

메시지 2004-07-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맡겨야하는 조선인님의 마음이 가장 힘드실텐데 주변사람들은 그 걸 왜 모를까요. 제가 아는 분은(남성) 아이를 놀이방에 두고 올때 마음이 무척 아프답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훨씬 더 느껴지고요.

panda78 2004-07-2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으면서 은근히 부담주시는 원장선생님 ... 조선인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휴우..
집에서 밥 먹어도 마른 애들 많아요, 할머니!
당신보고 다니란 소리 안해, 아줌마! 아... 정말 화도 나고 가슴도 아픕니다..
예전에 회사 이사하신다고 글 올리셨을 때, 막연하게 힘드시겠단 생각은 했지만
출퇴근 힘드시겠다.. 였는데.. 정말 일이 한 두가지 늘어나는 게 아니네요.
조선인님께 힘이 되어 드릴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sunnyside 2004-07-2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로도 좀만 더 크면 알 거에요. 일하는 엄마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를.. 그리고 조금 더 크면 조선인님처럼 멋지고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겠지요.. 속상하시겠지만, 부디 화이팅!입니다.

조선인 2004-07-2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모두 진짜로 감사합니다.
덕택에 오늘도 힘내봅니다. 으샤~

반딧불,, 2004-07-24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걱정입니다.
다 마찬가지지요.

전 조금 늦게 출근하는데...아이들을 정시에 안보낼 적이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데리고 있고 싶어서요.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참..

방학되면 걱정입니다..정말이지...

반딧불,, 2004-07-24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시구요.

꿋꿋하셔야...아이도 꿋꿋하다고 합니다.
정말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