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하나.
뜬금없이 보자고 청했는데도 나 사는 곳까지 와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는 참 훌륭한 청자였고, 난 늘 그렇듯 수다장이였다.
우리의 얘기는 하나의 화제에 머물지 못 하고 끊임없이 떠돌아 다녔다.
아마도 첫 만남이기 때문이리랴.
사실 난 무척 약은 짓을 했다.
서재지기들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모임을 만들 부지런함을 가지지 못했고,
다른 이의 모임에 끼어들 용기도 가지지 못했으며,
누군가를 만나러 한 달음에 달려갈 적극성도 없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그녀야말로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청하면 그녀는 만남에 응하리라는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던 나는
덥석 그녀와의 약속을 잡는 데 성공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원했다면 난 애들을 잡아끌고 서울이 아니라 군산이라도 갔을텐데
그녀는 나에 대해 얼마나 눈치챘을까.
그녀 둘.
두 학번 밑 후배지만 한 번도 그녀를 동생이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녀는 나보다 어른스럽고, 나보다 침착하며, 나보다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한때 선배 노릇을 해야 하는 게 부끄러웠고,
지금은 선배 노릇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냥 미안할 따름이다.
그녀가 싱싱하게 먹으라고 아예 뿌리채 상추를 뽑아줄 땐
그만 왈칵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었지만 그저 마주 손을 잡았을 뿐이다.
이제는 순창의 풍경과 자연스레 합일된 그녀는 여농의 든든한 일꾼이자,
도시가 싫다며 굳이 셋째와 함께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이자,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TV를 좋아하는 남편의 아내이자,
1학년은 전교에 꼴랑 7명인 학교를 다니는 아들의 엄마이자,
17개월인데도 젖 뗄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는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난 그녀의 삶에서 이방인은 아닐 지라도
바람같이 스쳐 지나가는 손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하다.
언젠가는 그녀의 권유대로 그녀 곁에 뿌리내릴 수 있길 바라지만,
그 날이 언제가 될 지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옆지기와 좀 더 진지하게 의논해봐야 할 까닭이다.
그녀 셋.
내 눈에 그녀는 한없는 철부지였다.
잠 많고 놀기 좋아하고 공부하기 싫어하는...
이 꼬맹이가 남자 하나 믿고 덥석 순창에 내려가겠다고 할 때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불안해 했던 게 사실이다.
7살, 6살 연년생 아들을 둔 그녀는 여전히 투덜이지만
직장도 다니고 살림도 잘 하고 음식솜씨도 끝내준다.
그녀가 바가지를 긁을 때마다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다들 한 수 접어주는 건
그녀가 이렇게 억척같이 해내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우리에 대한 반성일게다.
술상 차리게 했다고 계속 팅팅거려 술자리가 편하진 않았지만
모처럼 놀러온 선배가 술병 났다고 읍내나가 약 사들고 온 그녀가 새삼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