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카페 산책이라는 책을 살펴보다가 문득 지지리도 복 없는 저의 카프리 여행이 생각났습니다 -_-;;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 유럽에는 여러번 갔었습니다만, 카프리에는 정말 한이 맺혔지요.
처음 카프리섬에 갔을 때는 친구와 함께였습니다. 나폴리에서 항구를 구경하고 소렌토로 가서 음정 안맞는 이태리 가곡도 불러주다가 신나게 배를 타고 카프리로 향했지요. 때는 9월 중순,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날씨에 햇빛이 반짝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카프리에 도착하니 오후 2-3시쯤, 하얀 집들이 언덕에 점점히 박혀있는 그림같은 섬이었지요. 나폴리의 지저분한 항구에 꽤나 실망했던 저희는 우와~ 지중해다 지중해야~ 하면서 손을 맞잡고 방방 뛰었습니다.
카프리섬은 섬 자체도 아름답지만 관광객들이 이 섬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푸른 동굴'이지요. 섬에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게 되어있는 푸른동굴은 빛의 오묘한 조화로 바닷물이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페리를 타고 섬에 내리면 바로 사공들이 조각배를 띄우고 관광객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곤 하지요.

물론 저희가 카프리섬을 찾은 가장 큰 목적도 바로 이 '푸른동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섬에서 우아 또 우아하게 일단 식사를 하기로 했어요. 배에서 멀미할까봐 점심을 아주 간단하게 때웠거든요. 밥을 먼저 먹자고 주장했던 친구는 '금강산도 식후경이잖아..' 하면서 열심히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레스토랑들을 살폈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린 끝에 예쁜 레스토랑을 골라서 파스타를 시켰습니다. 파라솔 밑의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파스타는 저희가 바란대로 너무나 우아하였습니다. 친구랑 서로 사진을 찍어주면서 카프리섬의 아름다움을 만끽했지요. 푸른동굴은 어떨까..너무 예쁠꺼야..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치고 배를 두드리며 슬슬 푸른동굴을 봐줄까..하면서 항구쪽에 떠 있는 조각배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아까 도착했을 때는 열 척이 넘던 배가 몇 척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밧줄을 동여매고 있는 사공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푸른동굴 가고 싶은데 얼마에요?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사공 아저씨의 입에서
'오늘 배 운행은 끝났어. 내일 다시 와' 라는 말이 떨어졌습니다. 쿵 -_-;;;
청천벽력같은 말이었죠. 제법 빡빡한 일정으로 여행하고 있던 저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단 그 날 바로 로마로 가서 기차를 타야했거든요. 기차의 침대칸도 예매해놓았고, 짐도 다 로마역에 놓아두고 왔구요, 절대로 이 섬에서 하루를 잘 여건은 아니었어요.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구..? 여기까지 와서 푸른동굴도 못 보고..내 일생에 여길 언제 다시올지 모르는데..그깟 파스타 먹느라고 정말 보고싶은 걸 못보다니.. 저만큼이나 낙심한 것이 분명했던 친구도 밥을 먼저 먹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죄(?)로 저한테 미안해서 죽으려고 했습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꼭 같이 다시 오자..응? 약속해. 우리 내년이나 내후년에 꼭 다시 오자구'
그 상황에서 친구의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어요. 말이야 쉽지. 비행기를 열 몇시간 타고, 또 기차를 몇 시간 타고, 페리까지 타야하는 이 먼 곳을 그렇게 쉽게 다시 올 수 있겠냐구요. 다시 유럽에 오더라도 못 가본 곳을 가지 한 번 왔던 곳을 또 오겠냐구요. 결국 퉁퉁 부은 얼굴로 기념품을 몇 개 사고 다시 본토로 돌아오는 페리를 탔습니다. 로마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서도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저희 첫번째 카프리 여행은 끝났습니다.
그렇게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몇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엄마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생겼어요. 패키지 여행은 엄마도, 저도 싫어하는 터라 제가 가봤던 곳 중에 제일 좋았던 곳을 골라 직접 일정을 짜고, 호텔을 예약하고, 기차표도 끊었어요. 물론 일정상의 무리가 있었지만 카프리를 억지로 끼워넣었지요. 한을 풀기위해서. -_-;;
두번째로 카프리로 향하던 날은 봄이었습니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좀 센 날이었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엄마는 내심 근처의 폼페이를 보고싶어했지만 저는 '엄마. 폼페이 가봤자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나중에 사진보면 돼. 카프리가 얼마나 예쁜데..' 하면서 무조건 카프리행을 밀어붙였죠.
그날 카프리로 가는 페리는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바람이 세서 배가 미친듯이 흔들렸죠. 멀미 잘 안하는 저도 마구마구 올라오더군요. 엄마랑 저는 갑판과 객실을 왔다갔다하면서 필사적으로 견뎠습니다. 1시간 남짓 배를 타고 고생한 끝에 드디어 카프리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카프리섬은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집들도, 레스토랑들도. 다만 첫번째 왔을 때보다 관광객은 훨씬 적었어요. 이번엔 밥이고 뭐고 곧바로 푸른동굴로 가는 배가 있는 쪽으로 갔죠. 그러나..왠일인지 배가 한척도 보이지 않았어요!!! 어? 푸른동굴 막혔나??? 하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죠. 그랬더니...그랬더니...
'오늘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배 안떠납니다'
저는 그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어요 -_-;; 저의 절망감을 알리 없는 엄마는 저를 보고 '거봐~ 폼페이 가자니까..멀미만 하고 이게 뭐야..!' 했죠. 이럴수가..이럴수가...! 두번째도 실패하다니..여길 일정에 넣으려고 얼마나 머리를 굴렸는데..정말 허탈하더군요. 결국 푸른동굴은 코앞까지 두번이나 왔다가 못보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시 페리를 타고 돌아와서 로마로 향했습니다. 엄마도 괜히 저땜에 하루종일 제대로 관광도 못하고 멀미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더라구요. 그래서 성당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기차시간 전까지 바티칸 성당에 다시 한번 들러드렸지요.
지지리도 운이 없는 저의 카프리 여행. 과연 다음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과연 일생동안 거길 다시 갈 기회가 있을까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다가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