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설을 많이 읽기로 다짐하고 의무감에 읽었다.  


  막연히 '더블린 사람들' 같은 책이겠지 했는데, 첫 이야기부터 갑자기 얼굴에서 코가 없어졌대. 엇. 이런 소설이었어? 란 생각에 1차 당황, 어렵게 마련한 겨울 외투를 빼앗긴 원통함에 죽은 주인공이 유령이 되어 이승을 떠도는 '외투' 에선 2차 당황. '외투'까지 읽고 다시 니콜라이 고골의 사진을 보니 앞선 두 소설 분위기...  어쩐지 니콜라이 고골 얼굴과 느낌이 비슷해 납득이 간다.


  읽은지 꽤 돼서 나머지 소설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결국 니콜라이 고골이 말하고 싶었던 건, 가난의 참담한 모습이나, 민중을 가난하게 만든 사회에 대한 비판보다는 가난을 겪는 이들의 남루함과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단에서 고립되어 외로운 삶이었으리라.


  정말로 가난하면, 남한테 가난한 모습을 들키지 않는 것만이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고, 그러다 보면 결국 아무도 만나지 않게 된다. 내가 대학 때 잠깐 그랬다.

  나이 든 자는 몇십억으로도 못 사는 젊음이 있는데 그까짓 돈 상관없지 않냐 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 아예 없어봐라. 젊은 몸뚱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단 생각이 들고, 성격은 날로 나빠진다. 가난하다면서 사교적인 사람들? 내가 장담하는데 그 사람들 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다.(제  뇌내 망상이며 개똥철학입니다.ㅋㅋㅋ)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소설들을 읽다보면 비루한 인물들의 삶이 때론 우스꽝스럽지만 끝내 애잔하다. 다 읽어보니,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그토록 '외투'를 좋아했는지 조금 알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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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2-1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코‘ 읽고서는 처음에 황당했던 기억이 나요. 그런 환상적인(?) 이야기일 줄은 꿈에도 몰라서 ㅎㅎ 그래도 ‘외투‘는 참 좋아합니다. 읽고 나서 한참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휴.

케이 2019-12-11 16:40   좋아요 0 | URL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였어요. 둘다. 아카기 였나요? 하여튼 그 소설 ‘외투‘의 주인공이 외투를 지나치게 애지중지할 때부터 뭔가 잘못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궁... 그렇게 허무하게 뺏길 줄이야. 넘 불쌍했어요.
 


  올해 상반기에 드디어 '악령' 을 다 읽었는데, 이 소설 나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물론 다른 도선생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재밌긴 엄청 재밌지만, 음... 심오해도 너무 심오하고,복잡하고, 등장인물들은 왜이렇게 많은지!


  도선생님이 단편소설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셨지만, '악령' 속 2부 맨 끝 이야기인 '스따브로긴의 고백' 은 앞 뒤 아무것도 안 읽고 이 소단원만 읽어도 그 자체로 완벽한 단편소설이라 감탄해버렸다. 

  물론 스따브로긴이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젊고 잘생긴 남자 귀족이고, 찌혼은 수도승이라는 정도의 사전 지식은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자기 파괴적 기행을 일삼는 스따브로긴에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그 짧은 고백 이야기 하나로 단번에 인물에 조금은 이해가 가고 나중엔 그가 좀 딱하기까지 했다.


  실물 책은 열린책들 버전으로 사놓고, 아무리 읽어도 번역이 맘에 들지 않아 다시 동서문화사 전자책으로 읽었는데, PDF 로 된 e-book이라 읽는데 눈이 빠지는 줄 알았다.(난 일반 전자책도 폰트 110% 로 하고 본단 말이야)


  열린책들에서는 세권으로 나눠 출판한 책을 동서문화사에서는 패기있게 단 한권으로 출판한 것이 감명깊어, 이 책을 서점에 갈 때마다 검색해 보았지만, 그 어느 서점에서도 실물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솔직히 전체 소설의 절반 정도만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언젠가 내공이 쌓이면 다시 읽어보려고는 하지만, '스따브로긴의 고백' 은 시시때때로 자주 읽어볼 것 같다.


  + 페이퍼 다쓰고 갑자기 또 떠오른 게 있어서 황급히 돌아와서 추가해서 쓴다. 시종일관 어두침침한 '악령' 속 한줄기 빛과 같은 인물은 '까라마지노프' 다. 명성과 부를 가진 유력한 소설가인 '까라마지노프'는 나같이 무식한 사람이 읽어도 빼박 '투르게네프' 인데, 이 '까라마지노프'를 묘사하는 모든 부분이 진심 배꼽빠진다. ㅋㅋ

  실제 투르게네프가 어땠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을 쓸 무렵, 어지간히도 꼴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P.S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안잡혀, 그럴 때마다 올해 읽은 책에 대해 시시콜콜한 거라도 적기로 다짐했는데 아마도 몇 번 쓰다 말 것 같다. 다른 알라디너처럼 엄격진지근엄하게 완성된 독후감을 쓰리라 몇 년전 다짐했지만 무리데쓰. 내 능력만큼만이라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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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2-09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거 읽으셨군요. 전 열린책들 버전으로 사놓고 아직 못 읽었어요. 내년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다른 알라디너처럼 엄격진지근엄하게 완성된 독후감 아니더라도, 자주 써주세요! ㅎㅎ 책 이야기 재밌습니다.

케이 2019-12-10 09:27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제가 쓴 거 다시 읽어보니, 인류유산급 책에 너무 비루한 글이네요 ㅋㅋㅋ
책읽고 아무것도 안쓰면 나중에 거의 안 읽은거나 다름없이 아무 기억이 없더라고요. ㅜㅜ 조금씩이라도 부족하지만 쓰려고 합니다. 단 몇줄이라도.

‘악령‘에 누군가가 죽는 장면이 있는데요. 정말 그 장면, 묘사 압도적이었어요.
잠자냥님의 수준높은 후기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작년 봄 우리 집 베란다에는 모란꽃이 곱게 피어 있었다. 꽃이 피기만 기대하며 모란 화분을 애지중지하던 우리 엄마는 꽃이 필 무렵 수술을 하게 되었고, 결국 모란꽃이 활짝 피고 질 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남들이 보면 대단하다고 할 만큼 난 많이 울지도 않았고, 쇠약해진 엄마를 매일 같이 마주해도, 씩씩하게 회사도 잘 다녔다. 내가 남들보다 강해서 해야 할 일을 다 해낸 건 아닌 거 같고, 이상하게 난 우리 엄마가 완치될 것만 같았다. 비록 두 번째 수술이지만, 첫 번째 수술에서 미처 못했던 치료를 하는 거라고, 다시 재발한 거 아니라고 나를 계속 다독였다. 그렇게 잘 버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거실에서 멍하니 흰 모란꽃을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 좀 봐달라고 모란꽃이 드디어 피었는데, 우리 엄마는 저렇게 귀엽고 예쁜 모란꽃 한 번을 못 보고 병원에 내내 누워 계신단 생각에 어찌나 슬프고 원통하든지.


  올해 재발 소식을 들었을 땐 슬프기보단 너무 놀라웠다. 우리 엄마 작년에 항암 했는데? 며칠 전 추석 때만 해도 나랑 동인천까지 같이 걸어가서 휴지통도 사고, 카페도 다녀왔는데? ? 그렇게 건강하고 즐거워 보이던 엄마가 왜 또 수술을 해야 돼? 화도 안 나고 그냥 계속 어처구니없고 황당했다.


  왜? 왜 우리 엄마야? 란 생각만 며칠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는 또 국립암센터 입원실에 누워 있고, 몸에는 흉수관을 포함하여 피주머니만 열댓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내일은 피주머니 하나라도 제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게 바로 작년 봄 인데.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보며 느끼는 세상사의 진리는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에선 상도 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결국 아플 사람은 아프고,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한 사람은 천년만년 건강하게 잘 산다. 착하게 살면 상 받고, 나쁘게 살면 벌받아야 하는데 말이다.


  요즘 우리 가족은 마치 문밖에 누군가가 큰 기관총을 들고 문 열라고 문을 쾅쾅쾅쾅 두드리는데 허술한 문에 덜컹거리는 자물쇠 하나 걸어놓고 벌벌 떨고 있는 거 같다. 언제 어느 때라도 문밖의 사람이 총으로 문을 부수고 방으로 들어와 두두두두 미친 듯 총을 갈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 하늘은 파랗고, 나는 출근을 했고, 병원의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다. 너무 잔인하다.

 

P.S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3865

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말로만 듣던 청와대 국민 청원을 올렸습니다.

글을 보시는 분들은 한번씩만 동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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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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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1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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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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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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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1학년이면 꼭 이수해야 했던, 문장작법 과목의 시간강사가 소설의 다인칭기법을 설명하며 밀란 쿤데라를 거론하길래, '농담' 을 찾아 읽었다.

  나중에야 그 작품이 밀란 쿤데라의 데뷔작임을 알 게 되었다. 이런 거 보면 결국 글쓰기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거란 생각하게 된다.


  '농담'이 워낙 재밌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을 찾아보다가 '히치하이킹 게임' 이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읽은지 아주 오래 전이지만, 아직까지도 그 내용이 너무 생생하고 아직까지도 기분이 너무 더럽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히치하이킹 게임' 은 정말 탁월한 단편이다. 불편하지만 외면하고 싶은 사랑의 속성을 너무나도 절묘하게, 말 그대로 까발리는 작품. 정말 짧았던 단편으로 기억하는데, 여운이 아직까지도 있는 걸 보면 분명 잘쓴 단편이다. 


  이 작품의 남자 주인공은 밀란 쿤데라 소설 속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고차원 잡놈의 엑기스 같은 놈이다. 대학 시절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여자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여자 역시 아주 수동적으로 남자가 원하는 여자의 모습만을 보여주며 애인을 만났고, 결국 남자나 여자나 거기서 거기인 거였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과연 나는 안그런가? 결국 나도 그렇다.


  누군가를 정말 조건없이 사랑한다는 거 사실은 허상이란 생각이 든다. 난 정말 믿고 싶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작년에 본 '머드' 에서 주인공 소년이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절박하게 믿고 싶어하는 걸 보면서 꼭 나같았다.


  하지만 나도 정말 아무 조건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순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내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점이 보이면 죽도록 실망한다.


  밀란 쿤데라 작품을 '농담', '영원' 을 읽고 여기 말한 '히치하이킹 게임' 까지 읽은 후, 전혀 읽지 않고 있다. 사실 읽을 용기가 없다. 아무리 허구라고 해도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의 비열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 차라리 사람 때리고 약한 사람 괴롭히는 악동 같은 놈들 행각을 읽는 게 낫다. 밀란 쿤데라 소설 속 남자주인공 같은 놈들 얘기는 정말 읽고 있기 괴롭다.


  요즘 몇가지 책을 읽다가 다시 도스토옙스키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도스토옙스키 책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거와 연관시키면 일면 이해가 간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속 사람들은 분명 병적이고 비정상적이지만, 보통은 남자가 여자를 아니면 여자가 남자를 죽도록 사랑하고 웬만해선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니까... (다들 사랑이 너무 안변해서 문제이신 분들만 등장하니 ㅋㅋㅋ) 읽으면서 내심 안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농담' 을 다시 읽으려고 사놨는데, 첫 장을 펼치지도 않았고, 저 '히치하이킹 게임' 도 지금 읽어도 엄청난 명작일까? 궁금하여 다시 읽고 싶지만, 다행스럽게도(?) 절판이네. 다시 읽지 않는 게 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긴 하다. 또 다시 읽었는데 내 기억 속처럼 대단한 명작이 아니어서 실망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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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고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줄 궁극의 건물이 가능하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건물을 
세우려면 단 한 명의 미약한 생명, 이를테면 아까 말한 조그만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치던 불쌍한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 치자. 무고한 아이의 보상받을 수 없는 눈물을 토대로 그 건물을 세워야 한다면, 너는 그런 조건하에서 건축가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있겠니? 자 어디 솔직히 대답해 봐! 네가 건설한 건물 속에 사는 사람들이 어린 희생자의 보상 없는 피 위에 세워진 
행복을 받아들이는데 동의하고 결국 받아들여서 영원히 행복해진다 하더라도, 너라면 과연 그따위 이념을 용납할 수 있겠니?”


평소 진짜 뜬금없는 데서 눈물을 콸콸 흘리곤 한다. 
어쩔 땐 그게 단어 하나일 때도 있고, 짧은 수식어 하나일 때도 있다. 
몇 년전에 체호프가 쓴 소설에서 엄마에게 아직 잠들지 않았음을 알리는 아이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잎사귀가 볼을 스쳤다는 내용의 문장을 읽고 눈물이 핑 돌았던 적이 있다. (회사라 정확히 쓸 수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앙선데이에서 석영중 교수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글을 연재하는데, 거기에 발췌된 글을 읽고 뜬금없이 월요일 아침부터 아침부터 눈물을 훔쳤다.

모두의 행복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모두의 행복이 진짜로 모두의 행복인 경우는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모두의 행복은 자기들만의 행복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누구도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으며, 그들의 행복추구권을 빼았을 순 없는건데, 사람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약자들을 짓밟곤 한다. 나는 항상 짓밟히는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쎄... 아마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무시한 적 있었겠지. 
그런데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언제 였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못한다는 게 때론 부끄럽고 창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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