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동생과 나는 가끔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 기독교 0.01%라고 농담조로 말하곤 하는데, 그게 농담만은 아니다. 우리 친할아버지가 1901년생이시니깐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인 셈인데 그 이름도 모르는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자기 자서전 비슷한 게 옛날 할아버지 집에 있었다. 다 한자라 난 읽을 수 없었지만 아빠가 읽어보니 증조할아버지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양자로 보낼만한 집을 물색하던 중 (그렇다.... 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가난했던 것이었다... ㅜㅜㅜㅜ 불행히도 2020년까지 ING 중) 적당한 집안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그 집안에 동학에 가담한 사람이 있어 양자로 보내려던 걸 없던 일로 하고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 인생의 주요 사건들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글쎄 거기에 증조할아버지가 전라도 나주 어귀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단 내용이 써져 있단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자서전 때문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이 조선 말기라는 걸 알게 된 건데,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굉장히 급진적이었던 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침례교 목사님이었으니, 이쯤 되면 한 집안이 기독교를 믿은 역사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0.01%가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안은 조선 말기부터 집안의 모든 제사를 없애버린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친가 식구들은 다른 집안들에 비해 남녀가 평등한 편이었다. (사실 명절 여성 노동의 원흉은 제사 아니던가) 지금도 친가 식구들은 만나면 그냥 나가서 외식하고 집에 와선 차 한잔 마시고 저녁 먹기 전에 다 집으로 돌아오는 분위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집안이 완전히 기독교에 갇혀버린 집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며 느낀 건 흔히 말하는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사고가 이제 금방 교회를 다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점이다. 난 유럽과 미국을 보면서도 가끔 이런 걸 느끼는데 기독교를 믿은 역사가 미국과 비교도 안되게 긴 유럽이 오히려 종교에 있어선 더 개방적인 면이 많다. 오히려 미국 교회들이 훨씬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편이고. 그거랑 우리집도 비슷하지않나 싶다.


  오랜 시간 예수님을 믿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형식과 성경에서 말하는 규율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규율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라고 할 때마다 뭔 상관이냐 상관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한 적이 더 많다. 뭐 내가 남의 신앙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급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규율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내 맘속에 계시다고 믿고 또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목사들이 주장하는 각종 형식, 규율은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 주님의 뜻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얼마나 싫어했는데!)


  나도 그냥 일요일에 가서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다가 3년 전 어느 날  제발 빠른 시일 내 죽게 해달라고 엉엉 울면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이후로 꽤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남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난 분명히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었다고 믿고 있다. 신이 존재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종교라는 건 결국 누군가의 의견이고 신앙은 결국 그 의견을 취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과 주님이 있어 다행이고 구원이었다.


  이렇다 보니, 나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몇 번이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가톨릭 교단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신부 '오쓰'를 보며 나의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다.


  나 같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소설 '깊은 강'의 등장인물 각자의 이야기가 먹먹하고 가슴에 남기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쟁 중 인육을 먹은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자와 동화 작가다. 


  평소 엄청난 게으름뱅이에 식물조차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나는 왜 인간은 엄청난 정성과 수고 그리고 병원비까지 기꺼이 지불하면서까지 동물을 키울까?라는 의문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강'의 동화 작가 이야기를 읽으며 단박에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가 뭔지 알게 되었다. 특히 검은 개가 슬픔에 빠져 있는 어린 시절 동화 작가에게 "어쩔 수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세상에 각종 병과 전쟁을 만든 당신이 밉고 난 절대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XTC 의 Dear. God 이라는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어렸을 때라면, 그래 정말 예수님 미워! 당신 때문에 싸움이 나잖아!!! 라고 말하며 나 역시도 노래와 함께 절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세상을 보며 주님도 많이 가슴 아파하시지 않을까란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한번 신을 믿은 사람이 불신자가 되는 것은 불신자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노래의 화자도 당신을 안 믿는다면서 끝내 호소할 곳이 없어진 후엔 사람이 아닌 신에게 편지를 썼으니까 말이다. 

  종교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고 심지어 요즘에는 바이러스까지 퍼진다. 그런데 이게 그 종교가 믿는 신 때문일까? 어쩌면 신이 시킨대로 살지 않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잘못은 아닐까...

 

  신자로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 깊은 강' 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3-0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한 번도 신을 믿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깊은 강>은 아주 큰 감명을 준 작품이었어요. 엔도 슈사쿠의 많은 작품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케이 2020-03-04 10:00   좋아요 1 | URL
네. 특정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감동적인 소설은 아닌 거 같아요. 물론 신자에게는 더 특별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도 잠자냥님 추천으로 읽게 된 건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28살이 되던 해, 나는 결혼할 뻔 했다. 당시 나에게 결혼을 제안한 남자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대학 선배였는데 그 오빠를 안 이래,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끝내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건 이후, 그 남자와 나는 원래 사이, 그러니까 남들보다 조금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나고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 오빠는 나에게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고 말했다. 꽤 이름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서른 넘은 여자가 잘나가는 남자를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면서 나보고 28살 때 자기를 잡지 않은 것을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말도 거짓이 아니긴 했다. 나이 서른 살이 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결국 적응에 실패한 첫 회사를 때려 친 후, 계약직을 전전하다 보니 나에게 남자를 소개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현저히 줄었고, 예전에 데이트하던 남자들에 비해 낮은 사회적 위치의 남자들만이 주변에 남았다.

  나는 비교적 엄마 말도 잘 듣고, 선생님 말도 잘 듣고, 몸이 약해서 남들처럼 신나게 노는 것도 체질에 안 맞아, 학생 때는 학교-집만 왔다 갔다, 회사 다닐 때도 회사-집만 왔다 갔다 하는 속 한번 안 썩인 딸이었다. 그런데 28살에 조건 좋은 남자를 걷어차고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남자친구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30년 간 효녀의 시간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별안간 천하의 불효 자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30년간 부모님의 양육 RPG 게임에서 학업 스테이지, 수능 스테이지, 취업 스테이지 에서 그나마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던 딸이 연애&결혼 스테이지에서 맥을 못 추니 우리 부모님은 그만 적응을 못하고 맥을 못 췄다.   

그런 상황에서 내 자존감은 점점 낮아져갔고, 그토록 비웃던 결혼정보회사까지 반강제로 등록하여 매주 강제 소개팅을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발 아무나 걸려서 결혼이란 걸 했으면 하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당시 난 그냥 남들이 결혼하는 때 결혼을 해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내 20대말, 30대초 잔혹사를 구구절절 풀어놓는 이유는 까딱하면 나도 이선 프롬의 주인공 이선처럼 살 뻔했다는 아찔함 때문이다. 난 상대방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진 않아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싶진 않다. 사회적 조건에 의지하여 결혼을 선택을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꼭 사랑해야 결혼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얼마나 큰 오만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밀려 한 결혼이 생각 외로 엄청 행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이선이 지나와 결혼을 결심할 때만 해도 지나는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싹싹하고 명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나는 자기만 아는 너무도 이기적인 여자였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가난함에 이선은 그야말로 근근이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젊고 아름다운 매티가 나타난다. 소설은 매티와 이선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아름다운 겨울 풍경과 결부시켜 서술한다. 나는 이선이 도둑질을 해서라도 매티와 서부로 떠나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같이 떠나는 데 실패하고 이선은 매티 역시 지나와 별다르지 않은 여자임을 온몸으로 보고 느끼며 형벌같은 삶을 살게 된다.

이 소설의 비범함은 소설의 결말에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초속 5Cm’ 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확 짜증이 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남자는 대학도 졸업하고 이미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20대 초반에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이야기가 좋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넘고 보니 다 큰 남자 어른이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식 표현으로) “끝까지 가보지 못한자신의 첫사랑을 계속 대단한 것으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징징거리는 거 이젠 신물난다.

이선 프롬도 이선과 매티가 자살을 기도하여 둘다 죽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사는 결말로 끝났다면 오히려 그렇고 그런 소설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선이 불행하게 살게 된 데에는 28살 당시 이선에게 처한 상황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인데, 글쎄 다른 선택을 했으면 또 그 나름의 고통이 있었겠지. 이선과 비슷한 나이에 이선과 다른 선택을 했던 나도 이후 말 모를 고통이 있었듯.

짧지만 춥고 시린 겨울 풍경에 참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2-25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겨울>이라고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책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겨울‘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결말... ㅠㅠ 넘나 마음 시린... 휴. 케이 님 말씀대로 이 작품은 결말 때문에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한 작품 경지에 오른 것 같아요.

그나저나 28살에 결혼할 뻔했다는 그 대학 선배 안 하길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니 말이야 빙구야. 흐 노답.........-_- (제 생각에 인간은 서른이 넘어야 좀 자기만의 매력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케이 2020-02-25 10:50   좋아요 1 | URL
이선은 한창 젊었던 28살부터 죽는 날까지 그렇게 형벌같이 살아야만 하는 거잖아요. 정말 가혹한 결말이었어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끝에 그런 결말이라니! 좀 많이 놀랐답니다.

그리고 그 선배는 제가 죽도록 후회하길 간절하게 바란 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대학 때 45키로 미만 여성만 찾아 헤맬 때부터 좀 낌새가 보이긴 했어요 ㅋㅋㅋ(근데 나중에 보니 정말 45키로 미만인 여자랑 결혼하긴 하더라고요 ㅋㅋㅋ)
대학 졸업하고 좀 좋은 직장으로 취업한 남자들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 착각하는데 정말 노답이란 말이 딱.

저는 서른살 넘어 제 매력이 나타났는진 잘 모르겠는데, 20대보단 확실히 정신차린 거 같아요.ㅋㅋㅋ 저의 20대...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ㅋㅋ
 


Falstaff님에게 댓글을 달고 내 기억을 못 믿겠어서 민음사 '죄와벌' 1권의 3부를 다시 읽었다. 


1. 라주미힌은 술에 완전히 취했으며, 두냐(아브도치야의 애칭) 와 악수를 한 것이 아니었다. 


라주미힌은 이례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를 집에다 데려다 주던 반시간 전만 해도 스스로도 의식했듯 쓸데없이 수다만 떨어 댔지만, 또 이날 저녁에 술을 죽도록 많이 마셨지만, 그럼에도 기운이 펄펄 넘치고 기분도 거의 상쾌한 편이었다. (중략) 그는 두 여인과 함께 서서 그들 둘의 손을 꼭 잡고 그들을 설득하고 이런저런 이유를 놀라울 만큼 노골적으로 풀어 놓았으며 더욱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그랬겠지만, 말을 할 때마다 거의 매번 그들 둘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정말 꽉 쥐어짜듯이 움켜쥐었고 그러면서 전혀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집어삼킬 듯 빤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손이 너무 아파서 이따금씩 그의 큼직하고 울퉁불퉁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채기는커녕 오히려 손을 더 움켜쥐며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2. 술에 취해 완전히 맛이 간 라주미힌은 두냐의 손에 키스하고 싶다고 땡깡을 부린다. 


  "그렇다고요? 그렇다는 말씀이시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다니 당신은 정말...... 정말......" 그는 환희에 차서 소리쳤다. "선과 순수와 이성과...... 완벽의 본원입니다! 손을 좀 주십시오. 제발요...... 어머님 손도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두분의 손에 키스하고 싶습니다. 지금 무릎을 꿇고서!"

  그러고선 보도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는데, 다행히도 마침 아무도 없었다.



3. 불행히도 다음날 모든 것이 기억나 괴로운 나머지 벽돌을 부수는 라주미힌


  이튿날 7시가 지났을 무렵 잠에서 깬 라주미힌은 뭔가 켕기고 심각한 기분이었다. (중략) 그는 어제의 일을 아주 작은 세부사항까지 전부 기억했으며 자기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지금까지는 전혀 몰랐던, 예전과는 전혀 다른 어떤 느낌을 받았음을 깨달아 갔다. (중략) 가장 끔찍한 기억은 그가 어제 '천하고 추하게' 굴었다는 점인데, 비단 술에 취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두냐의 처지를 이용하여 그 처자가 버젓이 앞에 있건만 바보처럼 성마른 질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와 약혼자 간의 관계나 여러 정황은 물론 숫제 그 사람 자체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약혼자를 욕한 것이 문제였다. (중략) 이쯤 되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힘껏 휘둘러 부엌의 페치카를 내리쳤으며, 자기 손에도 상처를 내고 벽돌도 한 장 부숴 버렸다.



4. 라주미힌이 약혼자가 준 것으로 생각했던 물건은 목걸이가 아니고 시계다.

(목에 걸려 있었던 것만 기억나서 목걸이로 착각) 


그녀는 가느다란 베니스 체인에 끼워져 목에 걸린 멋진 에나멜 금시계를 보며 이렇게 외쳤는데, 그녀의 차림새에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약혼자의 선물이군.' 라주미힌은 생각했다.


  "너는 전혀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있어! 조시모프가 간다고 너까지 그냥 가냐. 가지 마...... 한데 몇시지? 12시인가? 너, 시계 한번 근사하다, 두냐! 왜 또 다들 입을 다물고 있어? 계속 나만, 나만 얘기하고......!"

  "이건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선물이야." 두냐가 대답했다.

(중략)

  '그러니까 약혼자가 준 선물이 아니었구나.' 라주미힌은 이런 생각이 들었고, 왠지 기뻤다.



5. 석영중 교수의 '죄와 벌' 강연

주말동안, 강연 들으면서 아주 잘 잤다. 석영중 교수님 목소리 듣다보면 안 졸리다가도 깊은 잠으로 빠질 수 있다. 

어찌나 열심히 잤는지 이번 주말 내내 들었는데 아직도 1부를 온전히 못들었다는.

https://tv.naver.com/v/658439

https://tv.naver.com/v/658469


6. 석영중 교수님이 연재하신 '맵핑 도스토옙스키' 중 제일 재밌었던 회차 기사

https://news.joins.com/article/229731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포일러 포함>


  작년 불행한 사건이 연거푸 일어나 스스로 분위기 전환을 하고 싶어, 유쾌한 책을 찾다가 읽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 혁명 후 메트로폴 호텔에  연금된 로스토프 백작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에 백작이었던)이 촉망받는 피아니스트인 수양 딸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다 선하기 때문에 심각한 소설을 읽을 때마다 응당 찾아오기 마련인 내적 고통을 단 한 번도 느끼지 않고 끝까지 즐겁게 읽었다. 근데 너무 즐겁고 유쾌하게만 읽어서 그런지 책 자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누군가 읽는다면 물론 추천은 하고 싶지만 말이다. 


  난 미국 사람들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동경에 항상 의구심을 품어왔다. 특히 그들이 영국 왕실에 대해 보이는 관심과 사랑을 이해할 수 없는데, 아니 미국을 식민 통치했던 나라 왕자 공주를 그렇게 환장하고 좋아하고 싶나? 싶은 거다. (심지어 영국 왕자들은 죄다 대머리에  동화 속 왕자님처럼 잘생기지도 않았잖아.) 이게 얼마나 이상한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왕실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보면 될 것이다. 


  내가 뜬금없이 왜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이 책이 특이하게도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에이모 토울스가 썼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과거 러시아에 대한 미화와 막연한 향수가 두드러진다. 미국이 한때 러시아와 박 터지게 경쟁했지만, 역사에 있어서 만큼은 러시아에 큰 열등감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다. 물론 미국 사람이 쓴 소설답게 결국 주인공이 고국 러시아를 배반하고 미국으로 탈출하긴 하지만.


  오래전 신문에서 어떤 프랑스 건축가가 중국에 거주하며 쓴 글을 옮긴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프랑스 건축가는 중국이 도시 개발을 위해 청나라 때 지어진 (서양인이 보기에 멋진) 건물을 하루에도 몇 채씩 파괴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가끔 우리나라에도 오래되고 낡은 건물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서양 백인들 많으니까.. 아마 같은 맥락이겠지.


  그런데 난 솔직히 서양인들이 동양에 있는 멋지고 오래된 것들을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게 참 웃기다. 정작 자기네들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남의 나라에 가서 온갖 약탈과 파괴와 학살과 강간을 일삼았으면서, 중국이 자국에 있는 청나라 건물을 불도저로 밀고, 우리가 조선시대 목조 건물을 다 때려 부수는 걸 왜 그렇게 안타까워하느냔 말이다. 하여튼 1세계 서양 것들은 하나같이 다 재수가 없다. ㅋㅋㅋ 이렇게  또 역시 사람은 서양 책만 읽으면 안 된다고 마음에 새겨본다.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난 조국의 과거에 대해 미련도 동경도 없고 매력도 전혀 느끼지 못함을 확인했다. 내가 여자라서 그럴 수도 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무렵 우리나라는 여자를 동물과 사람 중간쯤으로 취급하던 시기였으므로 더더욱 싫다. 살아본 적은 없지만 그립지 않다. 절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는데 이 책 정말 좋았다. 아무래도 서양 소설에 익숙하다 보니, 중국 고담에서 유래한 소설들이 실린 이 책에  적응하느라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읽다 보니 모든 작품이 다 재밌었다. (특히 난 한자 바보라 한자 하나하나 찾아보는 게 좀 힘들었다. ㅜㅜ) 내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친 독서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반성도 하고 앞으론 동양권 책도 많이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다짐대로 안될 확률이 높지만.


  제일 좋았던 작품은 '제자'. 공자 이야기라면 다 지겨울 줄 알았는데 웬걸. 재미도 있고 여운도 길었다. 긴 시간 공자의 옆에서 수양을 한 수제자이지만 끝내 어린이다운 순수를 간직했던 인물 '자로'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이릉'에 등장하는 '소무'도 좋았다. 고국인 한나라로 돌아갈 기약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항복하지 않고 오지에서 들쥐를 잡아먹으며 유배생활을 이어가는 '소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사람이 죽도록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힘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는 내가 기다리는 것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뤄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중 어떤 것이 사람을 버티게 해줄 것인가. 나같은 경우는 언젠가는 이뤄진다고 생각하며 기다리는 편인데. '소무'는 아마도 이뤄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기다렸으리라... 추측해본다. 

  작년에 힘들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임신을 했는데, 결국 유산했던 일이 생각나는 바람에 '소무' 이야기 읽다 혼자 전철에서 울었다. 울면서 위로도 받았기 때문에, 나에겐 참 시의적절했던 책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작가가 식민지 조선의 용산에 거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그 어느 편에서도 서지 않는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과 당시 생활상의 묘사가 인상깊다.

  이 책이 너무 좋아 나카지마 아쓰시 책을 더 찾아읽으려고 보니 작가가 30대에 요절하는 바람에 '산월기'에 실린 소설이 그의 소설의 거의 전부인 듯 하다. 아쉽다. 더 살았으면 더 좋은 소설을 많이 썼을텐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2-11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1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