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변 세계문학의 숲 1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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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오래 걸린 첫 번째 이유. 중간까지 책이 지독하게 재미없었다. 재미가 없다 보니 다음 장이 궁금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계속 시간이 지체되었다. 두 번째 이유. 책이 너무 무거웠다. 전자책이 없는 책이라 하는 수없이 실물 책을 읽었는데 만만찮은 두께의 책을 매일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다 어깨 병이 도져서 한동안 들고 다니지 못했다.

실물 책을 읽는 게 전자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잘 읽히고 성취감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 집 책장에 더 이상 공간이 없고 내 어깨가 책을 매일 가지고 다닐만하지 않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어 앞으로도 괜히 실물 책 욕심내지 말자고 다짐하였다.


애들 동화책을 읽어주다 보면 그나마 우리와 정서가 비슷하다 느끼는 책을 보면 일본 작가인 경우가 많았다. 벨기에, 프랑스 이런 나라 동화책을 읽다 보면 그림은 예쁜데 네??? 갑자기요??? 왜요???? 이런 심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스 영화 보다가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비슷한 감정) 그런데 이번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책을 읽으면서 일본도 우리나라 정서와는 정말 거리가 멀다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애기들한테 한국 작가 동화책을 더 가까이하고 많이 읽어주고 싶다. 한국 동화책 작가님들 정말 사랑하고 응원한다. (갑자기요? ㅋㅋㅋ)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 양반이 산 시대가 말도 안 되는 시대 아닌가. 특히 이 시절 우리나라로 치면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는 시대인데, 이 양반 책에는 그런 시대 상에 대한 개인의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워낙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건 소세키 선생도 비슷했네. 그 선생에 그 제자인가? 소름 ㅋㅋㅋ

뭐 작가가 꼭 시대상을 반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식민지였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너만의 피해의식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난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수능 언어영역 때문에 억지로 읽은 게 전부지만 우리나라의 이 시절 작가들의 소설은 주요섭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야기를 써도 분노 비통 같은 게 느껴지지 않나? 난 매일같이 내 조국 대한민국을 지독히도 증오하며 살고 있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나 뼛속까지 한국인 맞는 듯.

근데 내가 고작 한 권 읽고 감히 평가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하자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 시절 우리나라 작가들보다 잘 썼단 생각도 별로 안 든다. 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작가들 소설을 읽으면 너무 우울해져서 일부러 안 읽는 편인데, 차라리 우리나라 소설 읽으면서 우울한 게 낫겠단 생각도 좀 했다.


표제작인 <지옥변> 에선 젊고 예쁜 여자가 쉰 넘은 주인집 늙은이 사랑을 안 받아줬다는 이유만으로 가마 안에서 불타 죽는다. 그런데 그 여자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고통스럽게 불타 죽는데도 주인한테 한마디 못하고 그리던 지옥도 완성하고 자기 혼자 목매달고 죽는다.

이거 진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나라 소설 같으면 불타고 있는 자기 딸보고 기함하며 아버지가 바닥에 있는 흙이든 모레든 미친 듯이 뿌리다가 결국 죽어버린 자기 딸을 안고 주저앉아서 통곡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 상식에서는 이게 정상이고 또 대한민국의 정서다.

난 이 소설을 읽으며 법치주의의 소중함, 그리고 신분제의 불합리함 같은 걸 생생하게 느꼈다. 저 나쁜 주인은 사람 하나 불태워 죽이고도 잘 먹고 잘 살았음을 암시하는데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세상인가.

우리나라 많은 국민들 작년 12월 사건 이후 그 어떤 법치도 내란 세력에게 작동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며 얼마나 무력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시위에 뛰쳐나왔는가? 일본인들은 위와 같은 상황에 대해 그 어떤 화도 안 나는 것인지, 일본인 하나 데려다가 물어보고 싶다. 일본어는 못하지만.

진짜 개뜬금포 같은 소리지만, 그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나온 <홍길동전> 은 얼마나 위대한 소설인지. 비록 그지같을 때도 많지만, 대한민국 만세!! (지옥변 읽다 홍길동전까지 이어지는 미친 전개 ㅋㅋㅋ)

내가 저 시절에 살았다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한테 "당신 소설 읽고 기분이 너무 나빠!!! "라고 엽서 썼을지도 모름.


중간까지 재미없었지만, 마지막쯤에 나오는 <톱니바퀴>를 읽다가는 울컥해서 좀 울었다.

예전에 한동안 삶의 의지가 전혀 없었던 적이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것처럼 그냥 존재 자체가 지워지고 싶다는 생각. 당신은 해봤나?

<톱니바퀴>는 내가 정말 죽고 싶었던 시절의 마음이 고스란히 쓰여있어 마음이 아팠다. 난 운 좋게 이렇게 극복하고 살고 있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 양반이 끝내 죽어버렸다는 게 슬펐다. 좀 더 살았으면 그래도 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이후로 틈만 나면 빨리 결혼해서 애 낳으라고 들들 볶는 엄마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나를 간파했던 것 같다. 내가 꼭 키워내야만 하는 자식 정도의 큰 계기와 책임이 아니면 주어진 명까지 못 살 정도로 우울한 인간이라는 것을. 신기하게도 난 애를 낳고 어깨도 망가지고 살도 찌고 기미도 많이 생겼는데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엄마 원대로 귀여운 애들 보는 재미로 살맛 난다는 게 뭔지 알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전혀 못 보고 돌아가시다니. 참 사람 인생 뜻대로 되는 거 없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제일 좋았던 <톱니바퀴> 외에도 <밀감> <파>도 괜찮았다. 이 사람이 과연 잘 쓰는 작가는 맞는 것 같지만, 나와 정서가 맞지 않아 다음에 찾아 읽을 것 같진 않다.

그래도 위대한 <홍길동전> 생각도 하고 우리 엄마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해준 책이니 읽길 잘했단 생각은 한다. 독서는 역시 너무 이로운 행위이다. 올해도 틈틈이 읽고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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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4-08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길동 만세! ㅋㅋㅋㅋㅋㅋ
그나마 헌법재판소가 제대로 작동해서 다행이었지만 오늘 한덕수가 이상한 인물들을 문형배/이미선 후임으로 지명했더라고요?! 다시 스트렛스.........-_-
그나저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저 책, 시공사 저 시리즈인데도 두껍다고요?! 의외네요.
저는 류노스케 작품 중엔 <귤>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밀감>인 것 같아요.

케이 2025-04-08 14:35   좋아요 0 | URL
홍길동 만세!!!! 그 시절에 체제 전복적인 소설을 쓴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ㅋㅋㅋ
<귤>이 <밀감> 맞아요. 저도 대학시절 <귤> 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는데 여기에는 <밀감>으로 실려 있습니다.
시공사 책인데 종이 질이 좋아서 그런건지 아니면 제 어깨가 심하게 약한건지 저에겐 무거웠습니다. 흑흑흑. ㅜㅜㅜㅜ
이 책을 한창 읽을 때는 그 세력들이 아무 처분도 받지 않고 있던 때라 더 무력했는데 그래도 천만 다행입니다. 대선까지 그들이 죄값을 치룰 때까지 힘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