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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책을 읽을 당시 나를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책들이 있다. 특히 힘들고 슬플 때 읽었던 책들은 과거의 나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럴 때마다 책 한 권에 의지하여 힘든 시기를 그럭저럭 버틴 내가 대견해지곤 한다. 그런 책들은 설령 재미가 없고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더라도 영원히 소중한 책으로 남는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은 쌍둥이 딸들이 자고 있을 때 혹시라도 깰까 봐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아마 이 책도 영원히 기억하게 되겠지. 왜냐면 자식을 낳은 후 읽은 첫번째 책이니까.
내 아기들이 100일 되기 전까진 혼자 있을 때 아기 둘 다 자고 있어도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5분 대기조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아기들만 바라보았다.
건강하고 젊은 엄마들은 사람 안 쓰고 혼자 쌍둥이를 키우기도 하지만, 난 도저히 엄두가 안 나 오전, 오후 한 명씩같이 아기를 돌봐주시는 선생님이 오신다. (보통 '이모님' 이란 호칭을 쓰지만, 난 '이모님' 이란 호칭이 싫다. 일단 내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이모라는 말 쓰는 게 이상하고, 고모가 아니라 이모로 칭하는 것이 힘들고 고된 일은 모계 쪽에서 맡아야 한다는 의미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노산에 완전히 맛이 가버린 내 저질 몸뚱이 때문에 한 달 150만 원 가까이를 인건비로 지출하고 있는데, 여전히 혼자 두 아기를 감당하는 건 자신이 없다. 다른 분들의 힘을 빌렸는데도 무릎 후방 십자인대가 늘어나고 관절에 물이 차서 진통제로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어떻게 종일 혼자 애들을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3시간 정도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아기들을 보는데 그 시간에 아기 둘 다 잠들어 있으면 어떻게든 아기들이 계속 자게 만들어야 한다. 얼마나 조심스러울지..상상이 가시려나?
앞뒤로 아기들을 업고 너무 힘들어 혼자 꺼이꺼이 몇 번을 울다 보니 절대 생기지 않을 것 같던 요령이 조금 생겼고 그제서야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생겨, 오래전 중고로 사둔 [대성당] 을 집어 들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은 내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이 갑자기 불행이 닥칠 수 있고, 또 그 불행을 극복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담담히 말한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무력하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이혼 위기에 처했지만 여전히 아침에 눈뜨자마자 술을 마시고 오랜만에 온 부인에게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남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생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울부짖기는커녕 이젠 필요 없어진 아들의 생일 케이크를 만든 빵집에 앉아 제빵사의 이야기를 듣는 부부,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나서 집 나간 부인이 뻔뻔하게 전화해도 화 한번 내지 못하는 남자, 알코올 중독으로 몇 번이나 입소했지만 고칠 의지는 별로 없는 알코올 중독자, 아내와 긴 시간 편지를 주고 받은 맹인이 탐탁지 않지만 결국 아내가 원하는 대로 숙박을 허락하는 남편 등을 보면 크고 작은 불행은 결국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시간을 보내며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 내가 어떤 불행을 극복했다는 착각을 할 때도 있지만 글쎄, 극복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똑같은 불행이 닥쳐도 두렵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은 불행에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고 여전히 두렵다. 혹시 나만 그런가?
내가 애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표제작인 [대성당] 보다 [열] 을 더 재밌게 읽었다. 어느 날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다른 남자와 떠나버린 아내, 버려진 남자는 어떻게든 혼자 자식들을 키워보려고 급한 마음에 어린 베이비시터를 고용하지만 불량하기 그지없는 남자 친구들까지 집에 끌어들여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새로 고용한 유능한 베이비시터는 며칠 만에 다른 지역으로 떠나버린다. 남자는 열이 나서 몸 져 눕고 이젠 떠나야만 하는 베이비시터는 극진히 그를 간호한다. 그녀 덕분에 조금 나아진 남자는 베이비시터와 그녀의 남편에게 그간 벌어진 일을 털어놓는데, 다 털어놓고 나니 앞으로 벌어질 일 중 하나도 해결된 일이 없는데도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자기의 불행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점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체호프의 [애수] 가 떠올랐고, 무력한 등장인물들 때문에 [더블린 사람들]도 조금 생각났다.
어떤 불행은 글이나 말로 내뱉어야만 한다. 그래서 나도 한동안 엄마가 돌아가신 과정을 미친 듯 일기로 기록했다. 그러다 보면 비록 해결도 극복도 안되지만 시간은 잘 간다. 그뿐이다. 시간이 지나가는 거, 시간이 최대한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무언가에 열중하는 거. 그래서 난 어제도 오늘도 아기를 업고 파스를 붙이고 책을 읽고, 이렇게 독후감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