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지 스펙트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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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전자책이 아닌 실물 책으로 읽었다. 재밌었지만 읽기 유쾌한 책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 감화원에 버려진 10대 소년들은 시답잖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갖은 폭력을 견디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노역을 제공한다. 그들은 어디서든 경멸의 대상이고 머무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배려를 받은 적도 없지만, 묵묵히 모욕을 견디며 그들끼리의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때로 탈출을 시도하는 소년도 있지만 대부분은 흠씬 두들겨 맞고 잡혀오고 만다.
 어느 날 당도한 어떤 마을에서 아이들은 산처럼 쌓인 가축의 사체 처리를 하게 되고, 마을에 몹쓸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비정한 마을 주민들은 전염병이 만연한 마을에 소년들만 남기고 퇴거하고 심지어 자기네 임시 거주지에 소년들이 쳐들어 올까 봐 총을 든 보초까지 새워 아이들을 텅 빈 마을에 완전히 고립시킨다.
 난 고립 이후 감화원 소년들이 파리대왕처럼 동물에 가까운 상태가 될까 봐 긴장했는데 (그런 내용을 글로 읽는 걸 꺼려 하기에) 웬걸 텅 빈 마을은 오히려 그전보다 살기 좋아진다. "나"는 조선인 리와 진정한 우정을 나누며 사냥도 하고 조선인 부락에 숨어있던 탈영 군인도 만나고 또 마을에 남겨진 소녀와 난생처음 사랑의 감정도 느낀다. 하지만 호시절도 잠시, 동생이 키우던 개에게 물려 전염병이 옮은 소녀는 비참하게 죽고, 소녀를 간호해 준 탈영병은 돌아온 마을 사람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마을에 돌아온 주민들은 뻔뻔하게도 소년들에게 그동안 벌어진 모든 일에 함구하라고 협박하지만 "나"는 끝까지 반항하다 혼자 숲속으로 도망친다.
 그다음에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죽지 않았을까. 그 소년이 살아남을 방도가 달리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않았기를, 살아남았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이 책으로 인해 다소 거창하지만 인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어떤 면으로는 엄청 우울하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보여준 조선인 부락의 주민들과 탈영 군인은 거대한 일본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거나 죽고 만다. 살아남은 주류는 어떤 사람들인가. 소년들이 죽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하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안면몰수하는 이기적인 인간들 아닌가. 죽창에 내장이 튀어나와 죽어야 할 사람은 전염병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녀를 간호한 탈영 군인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소년의 목을 조른 의사 같은 놈인데. 그런 인간들은 버젓이 살아남는다.
 일본만 그럴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 '조조 래빗'에서도 몰래 유대인을 숨겨준 독일인을 광장에 목매달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인류가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광장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이 살고, 무지성으로 나치에 동조한 사람들이 죽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 점이 참 우울하기도 하고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인류는 용기 없는 다수에 의해 굴러가지만 또 언제나 용감하고 선량한 사람이 아주 적게라도 있다는 것. 모든 사람이 다 나쁘기만 하다면 이 세상은 원시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절대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 등등... 이 책으로 인해 오랜만에 내 앞에 닥친 육아, 직장 생활 외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어 좋았다.
 나도 어려운 순간에 힘든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끔이라도 약한 사람 편에 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같이 소심한 사람이 그러기는 정말 어렵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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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7-02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오랜만에 케이 님 리뷰다!
이 책 진짜..... 인간은 악하고 이기적이지만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위로를 주는;;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종이책 앞으로 또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ㅎㅎㅎㅎ

케이 2024-07-02 14:26   좋아요 1 | URL
누추한 곳에 별것 아닌 리뷰를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에도 썼지만, 마을 사람들의 행태에 치를 떨게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다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하게 되는 책이었어요.
작고 가벼워서 들고 다니면서 읽기 좋았어요. 역시 책은 종이책이 제일이여요.
독서만큼 고차원적이고 경제적인(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도 있으니) 활동도 없는 것 같아요.
책은 정말 완전무결한 무언가입니다. 돈도 안 들어 배터리도 필요 없어 얻는 것 많고 심지어 변하지도 않습니다.
게으른 저는 요즘 많이 못 읽고 있어요. 쓰는 건 더더욱 못하고요. 매일같이 꾸준한 잠자냥님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궂은 날씨 안전 퇴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