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주룡

고무신이 대중들의 사랑을 받은 시기에는 대도시마다 고무신공장이 많았다. 평양의 고무공장 공장주들은 임금인하를 공동결의했다. 193085개 공장, 1,000여명의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을 감행했다. 나라가 일제치하에 식민지생활을 하던 때였지만, 노동자들은 생존권 투쟁을 위해 혁띠를 졸라맨 것이다. 기업주와 노동자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던 것이다. 이런 갈등 상황 가운데 한 사람의 여성이 등장했다. 바로 여성노동자 강주룡이었다. 강주룡은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연설을 했다. 8시간 만에 끌어내려진 강주룡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모든 보이콧이나 파업이나 노동운동처럼 깔끔한 마무리가 되진 못했다. 주도자들 상당수가 해고되고 결국 임금 삭감안은 철회되었다.

 

강주룡은 어려서 간도로 이주해 20살에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독립군 부대에도 얼마간 있었다. 남편이 병사하자 친정으로 돌아와 고무공장 노동자로 일했다. 적색노조 활동에도 참여했던 그녀, 단식 후유증으로 극심한 소화불량과 신경쇠약으로 고통받다가 19328월 빈민굴에서 3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파업을 하고 난 지 2년 채 안된 시기에 그녀는 죽었다. 안타까운 생애이다.

 

 

 

 

2 나석주

192612월 조선식산은행에 들어와 창구를 향해 폭탄을 던진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인근 동척 건물로 들어갔다. 남은 폭탄을 기관장실에 던졌지만, 역시 불발. 동척에서 나온 그를 경찰이 쫓았다. 경찰과 총격을 벌이던 그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이천만 민중아! 나는 이천만 민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한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분투했다. 이천만 민중아! 분투하여라!”

 

! ! !”

그리고서 자결했다.

 

그로 인해 동척 직원과 일본 경찰 등 3명이 죽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봐 이름이 뭔가? 이름?”

.........”

 

나석주, 황해도 재령 사람. 3.1운동에 참여하고 난 뒤 상하이에 망명해 김구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있었다. 중국 군관학교를 나와 중국군 장교로도 근무하다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하이로 돌아왔다.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나석주의 의거를 알렸다.

대낮에 벌어진 이 대담한 의거에 총독부는 크게 충격을 받았고, 민중들은 격동되었다.

이제 그만 독립에의 꿈을 접을 때가 안 됐니?”(200-204p)

 

10...20...30...세월의 무게가 짓누르면 사람들은 희망을 내려놓고 절망을 벗삼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절망 위에 자리를 깔고 앉아 거기서 안일한 편안과 쾌락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이 젊은이는 그 자릴 박차고 희망을 던졌다.

 

나석주의 용기있는 행동에 민중들은 격동되고 고무되었다.

    

 

    

  

3 윤희순

1860년생으로 16세에 결혼을 한다. 시아버지는 의병장 유인석의 재종형 유홍석으로 을미의병 당시 역시 의병으로 나섰다. 윤희순은 의병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부녀들에게 가르쳤다. 직접 부인들은 조직하고 남장을 하여 의병대열에 뛰어들기도 했다. 나라가 망하자 시아버지가 떠난 만주로 일가를 데리고 떠난다. 망명 후 시아버지, 시숙부(유인석), 남편, 시동생 등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가장이 된 그녀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일가 사람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인 유돈상은 조선독립단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 군사훈련을 시켰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과 연계해 활동하다 19356월 체포되고 한달 뒤 세상을 떴다. 그리고 10여일 뒤 윤희순은 항일 일생에 대한 기록(일성록)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매사 시대를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자손들에게 훈계하는 글 중에서

 

 

 

 

4 남자현

남자현은 1872년 생이다. 안동에서 출생, 19살에 결혼했다. 1896년 남편이 의병투쟁에서 전사했다. 그러자 직접 의병이 되어 전쟁터에 뛰어들었다. 19193.1운동을 경험하고는 김동삼 등 남편의 동지들이 있는 남만주로 망명했다. 서로군정서의 여자 대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직접 총독 암살단을 조직해 국내에 들어가기도 했다. 193110월 김동삼이 체포됐을 땐 친척이라 속여 면회하면서 연락책 역할을 했으며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국내 이송 전에 구출을 꾀했었다. 1932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에 올 땐 손가락을 잘라 쓴 혈서를 조사단에 보냈다. 이듬해인 1933,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장에서 일본전권대사를 격살할 계획을 세운다.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몸에 두르고 작탄을 몸에 지녀 중국인 노파로 변장한다. 그러나, 불심검문에 걸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3개월이 지나 그의 이야기는 신문에 크게 보도된다.

 

망부의 복수를 하고자 무등 전권 암살 미수....남자현이란 노파는 20년 전에 독립운동자인 자기 남편이 일본인의 손에 죽은 것에 한을 품고 여자의 몸으로 전후 20년 동안을 두고 조선과 만주를 걸쳐 드나들며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남자현은 11일간 단식으로 항거하다 보석으로 석방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5. 224-228p에서 발췌인용, 부분 편집).

 

 

 

5 윤봉길

우리가 잘 아는 윤봉길과 김구의 대화에서 마지막 그들의 인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윤군(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김구)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5. 287p)’

 

 

이 짤막한 대화의 내용에서 흘러내리는 비장함과 비애의 여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윤봉길

 

6 이봉창 

백범일지에는 이봉창과 김구의 대화도 나온다.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김구) 얼굴에 자연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씨(이봉창)가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5. 286p)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저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7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은 국제정세와 정치판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의 자발적인 힘이 아닌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과 인생을 던진 불나방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

 

 

 

 

8

한 송이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알려지든, 알려지지 않든 간에 나라를 위해 수많은 소쩍새의 혼들이 그렇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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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5: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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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팀 켈러는 그의 저서에서흔히 탕자라고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프러디걸)’제멋대로 군다는 뜻이 아니라 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메리엄웹스터대학생용사전)에 따르면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님도 남김없이 다 쓴다는 의미이다‘ (20p)라고 이야기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탕자인, 둘째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고귀하고 소중한 것을, 가락지와 짐승을 잡아 돌아온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풀 준비를 하신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가치들을 둘째를 위해 쏟아부으실까? 아낌없이 부어주신다. 말 그대로 <그 탕자의 그 탕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모양새와 풍경을 첫째 아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logic한 삶, legal한 삶, 바르며 올바르고, 합리적이고, 종교적이고, 율법적이며 한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았던 그의 바른 생활은 엇나간 둘째, 동생의 방탕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탕자를 어찌 용납할 수 있으며, 탕부를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3

누가복음 15장에 대한 팀 켈러의 통찰은 이 비유가 단지 둘째 아들, 탕자에게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 아니라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꼰대’, ‘영적 꼰대인 첫째 아들에게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탕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첫째 아들을 위한 메시지임을 기억하자! 모든 비유는 깨닫게 하기 위함에 있다.‘제멋대로 집 나가 방탕한 삶을 산,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둘째 아들, 탕자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선 용납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 중에 아버지의 재산을 다 말아먹은 망나니같은 아들에 대해 입대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그 보편의 편에 바로 첫째 아들이 있다.

 

    

 -현 시대와 젊은이들에 대한 이해,

세대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책이다.

깔끔하구나! 젊은이들은 꼰대를 싫어한다. 극혐대상이 바로 꼰대이다.

 

4

팀 켈러는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59p)란 이야길 첫째 아들, 장남에게 한다. 당시 장남(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유산과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아무런 결점과 흠도 없는, 탕자와는 너무나도 상반된 충성된 첫째 아들이었다. 그 아들은 노예처럼 아버지의 집에 충성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을 품는 아버지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첫째 아들이었다.

 

 

 

5

나는 여기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팀 켈러는 겸손한 사람들이 실세이고 교만한 사람들은 퇴물이다라고 말씀하신다는 눅 18:14의 구절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여호와께서는.....겸손한 자들을 돌보시며 교만한 자들을 멀리하신다’(138:6)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보시는 시각과 관점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관계>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관계이다. 기독교는 교리도 아니고, 신학도, 사상도, 이론도 아니다. 기독교는 관계이고, 그 관계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예수님을 보고 듣고 느꼈고 주목했던 증인들witness, 제자들은 제자훈련받은 관계의 힘을 가지고 세계선교의 무대로 나아갔던 것이다. 물론 세계선교의 초석은 사도바울이 놓았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는 기독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심지어 법 없이도 잘 살아가는 순수한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인 인간이다. 신앙인의 입장에선 적대적인 인물이고 원수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그 관계의 힘으로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며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저술했다. 그리고 순교했다.

 

 

 

6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첫째 아들에게는 왜 이런 관계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자신이 입던 럭셔리한 옷을 입히고 잔치를 배설한다. 그리고 첫째 아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마음은 그림자와 먹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거부감과 불편함과 불평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 이 상황과 이 시츄에이션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7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토록 충성하면서 아버지의 가문을 융성시키기 위해 뼈 빠지게 노예처럼 일한 그가 왜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는가? 그것이 핵심포인트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관계가 결여된 신앙은 갑갑한 종교생활의 육중한 갑옷을 입고 있는 결과를 초래한다. 문득 떠오른 성경 구절이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4)

 

 

 

8

내 생각이다. 둘째 아들 탕자는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아버지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돌아온 것이 중요하다. 비록 그가 빈털터리 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보편의 시각에선 용납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게 아버지인 것이고, 그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위화의 인생에서 하루 아침에 집안의 가산을 도박으로 날려버린 아들 푸구이를 용납하던 푸구이의 아버지, 푸구이의 아버지는 푸구이의 빚을 어떻게어떻게 다 갚아준다. 그것도 은화로 주면 될 것을 동전으로 다 바꿔서 어깨에 보따리를 짊어지고 빚을 갚아오라고 한다. 아들의 어깨는 피로 물들고 상처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돈은 쓰는 것은 금방이지만, 버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적 재료이기도 했다.

 

    

 

9

결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삶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서 제대로, 무탈하게 잘 지낸 첫째 아들에겐 아버지 안에 있으면서도’, ‘아버지 안에서 누리지 못한삶이었던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팀 켈러의 탁월한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10

그 탕자의 그 탕부 아버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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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카알벨루치 > 커크 헤리엇의 '교양, 다시 읽기'는 멋진 놈이다!

아뜩한 느낌! 그래도 기록이 남아 있어 더듬을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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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6-25 12: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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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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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 시는 1951년 봄 피난지이던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의 방에 붙어 있던 것을 조카 이영진 씨가 암송하여 전한 것이다.

 

   

 

 

2

이산가족처럼 한국과 일본에 각각 떨어져 생활했던 이중섭과 그의 아내 남덕, 그리고 두 아들이었다. 이남덕은 이중섭의 제작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통운 회사 사무장으로 일하던 오산고등보통학교 후배 마 씨를 통해 일본 서적을 한국에 보내는 일을 했다. 일본 서적을 외상으로 구입해 한국에 보내고 이를 팔아서 생긴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마 씨가 약속을 어기고 횡령을 하는 바람에 27만 엔의 빚을 지게 되었다. 후에 8만 엔은 받았지만 나머지는 끝내 받지 못했다. 당시 27만 엔이면 2,3인 가족의 일년 생활비에 해당되는 큰 액수였다. 이남덕은 이 돈을 갚기 위해 바느질, 뜨개질 등을 닥치는 대로 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20p).

 

 

    

 

3

이중섭의 민속적이면서도 민족적인 화풍은 독보적이었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림 하면 이중섭을 떠올리곤 했다. 아이들의 동화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주다가 이중섭의 전기를 읽어주는데,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냅다 챙겨 읽었다.

 

 

 

 

4

이중섭은 1916916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지주, 어머니는 평안의 민족 자본가 집안이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자랐다. 비록 5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어릴 적부터 후에 화가가 된 김병기와 함께 화구, 미술 서적들을 구경하고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 유적 안에서 잠도 자고 운동과 그림그리기에 몰두했다.

1931, 평북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미술부가 되어 미술부 교사였던 유화가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 그림에 한글로만 서명하기로 실천했고 소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1934, 일본 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고자 하는 의도로 친구들과 함께 교사에 불을 질렀다. 졸업 기념 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사진첩 제작이 취소되었다.

1938, 22살이었던 이중섭은 3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에서 입학했었고,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화가들이 설립한 미술전람회에 응모하여 상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이즘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이남덕)을 알게 되어 사귀게 되었다.

1945, 4월 마사코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5월에 결혼한다. 마사코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지만, 시대의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이중섭은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는 딱지가 자주 따라붙었다.

1947, 큰 아들 태현이 태어나고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란 작품은 소련 평론가 나탐의 극찬을 받았다.

1948,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다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당하기도 했다. 천재는 그냥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소그림의 깊이와 힘은 오랫동안 담금질된 그의 관찰의 힘과 사색의 그릇에서 나온 것이리라.

1950,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형 이중석이 행방불명되었다.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된다. 12월 초 중국군의 개입으로 가족을 데리고, 조카 영진이까지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하여 범일동 창고에서 생활하며 부두에서 하역하는 일에 잠시 종사한다.

1951, 연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건너간다. 수일을 걸어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피난민과 첫눈>은 이 때의 체험을 그린 것이다.

1952, 곤란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떠났으며,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가 시작되었다. 이 책에는 이중섭의 수많은 그림들이 게재되어 있다. 너무나 가난하여 종이값이 없어 담배은박지 등과 같이 재료를 가리고 않고 그림을 그렸던 천재 이중섭이었다.

1953, 앞에서 이야기한 사기사건으로 인해 큰 손해를 본다. 또한 일본에 말항했다가 체포된 이중섭의 친구가 부인에게 보증금과 여비를 빌리고는 돌려주지 않아 또한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 7월 말 오래 애쓴 끝에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다가 일주일만에 돌아온다.

1954,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개최하려고 계획, 6<달과 까마귀>2점을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5, 1월에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 유화 41, 연필화 1, 은종이 그림을 비롯한 소묘 10점을 전시했다.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종이 그림이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했으며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터리가 되어 자학과 기진맥진에 빠졌다.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로 내려와 여관방에서 전전하면서 5월에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은종이 그림 세 점은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증하기도 해다. 그러나 작품은 거의 팔라지 않았으며, 그의 가난은 해결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망과 분노에 영양부족까지 겹쳤다. 극도로 쇠약해져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 대구의 병원에 입원,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 수도육군병원 정신과에 입원했다. 후에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겨서 늦가을에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살기 시작했다. 이때 황달이 극심해졌다.

 

  

 

 

5

1956,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봄에 청량리 뇌병원에 입원후 정신이상이 아니라고 진단받고 퇴원했으나 곧 극심한 간염으로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 입원한 지 한달 후인 9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이 사실을 안 친구들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 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의 부인 남덕에게 전해져 그집 뜰에 모셔졌다. 부인 이남덕과 태현과 태성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이 책에선 부인과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어 놓았는데, 이중섭이 아내를 향한 애틋하고도 깊은 사랑이 전해져온다. 그런 부부가 그렇게 생이별하며 한평생을 살다가 죽었다.

        

 

 

6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중섭은 예술가로서의 길, 생활인(가장)으로서의 길, 그리고 또 하나 한국인으로서 길에 대해 깊이 갈등한 듯하다. ‘유화. 수채화. 크로키. 데생. 에스키스 등 약 200, 은종이 그림 약 300점이 이 남한 땅에도 남아 현대 미술가, 아니 전체 예술가 중에서도 가장 민중에게 사랑받는 이중섭의 세계를 이루고 있(233p)’이었지만, 현실에선 기약할 수 없는 유리걸식과도 같은 생활, 자기 그림의 완성에 대한 불타는 예술혼, 초조, 불안이 항상 그를 괴롭혔다. 결국 그래서 택한 것이 귀화선으로 일본에 가 있는 처자들 곁에 가는 것이었다.

 

 

 

 

7

내 그림 좀 그려올게. 내가 보고 겪은 대로 이 피눈물 나는 우리 고장의 소재를 가지고 말이야! 동경 가서 그려올게. 큰 캔버스에다 마음껏 물감을 바리고 문질러서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올게. ()! 내가 남덕(마사코)이 보고 싶어서 가려는 줄 오해마! 내 방 하나 따로 구해 놓으라고 편지했어! 임자 알았음마?”(233p)

 

 

 

 

8

이중섭에겐 아내와 자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을까! 그의 그림을 보더라도 아이들에게 그려주는 그림에 드러난 가족의 풍경에서 애잔하게 느낄 수 있다. 일본으로 가고자 했던 마지막 일루의 희망이 좌절되자, 그의 심신의 증상이 이렇게 나타났다.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저렇듯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동경에 그림 그리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남덕이와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235p)

 

    

 

9

! 아니야. 일본의 산은 너무 숲이 빽빽해서 답답하고 나무들은 너무 하늘 높이 솟아서 인정미가 안 가! 우리 산들이 좋아! 더러 벌거벗은 데 꾸부정한 나무들이 목욕탕에서 만나는 사람들처럼 친근감이 들어.”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무심한 말에 당장은 일종의 예술가의 정취로 여겼으나 씹을수록 그다운 국토애가 가슴에 온다. 실상 그의 그림처럼 보편적인 예술에다 한국적인 풍토성을 짙게 갖춘 작품을 나는 모른다(240p).

 

 

 

 

10

괴테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다. 비범하지만 너무나 고통스럽게 살다가 떠난 화가 이중섭의 인생을 보고서 마음이 서늘해지고 애잔해진다. 문득 과거에 보았던 영화, 화가 장승업의 생애를 그린 <취화선>과 화가 잭슨 폴락의 <폴락>이 생각이 난다. 생의 비극이 그들의 예술을 더 깊게 만들었구나...!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예술적인 것이다"-괴테

 

-최민식이 주연한, 장승업의 생애를 다룬 영화 <취화선>

 

 

-잭슨 폴락이란 화가에 대해 알게 된 영화 <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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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6-21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중섭의 일생을 다룬 영화가 나와서 이중섭 역을 최민식이 하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

카알벨루치 2019-06-21 19:46   좋아요 1 | URL
최민식은 명불허전이라 ...사이러스님과 겨울호랑이님이 벌써 읽으신 책인 것을 이 책 읽고 리뷰를 보면서 알았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6-21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알벨루치님 글을 읽다보니 영화 「폴락」이 보고 싶어지네요^^:)

카알벨루치 2019-06-21 19:47   좋아요 1 | URL
하도 오래된 영화라~애드 해리스도 명불허전 아닙니까 ㅎㅎ두분의 독서 경지를 어찌 쫓아가겠습니까 ㅋ

겨울호랑이 2019-06-21 21:30   좋아요 1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우연히 먼저 읽었을 뿐입니다.. 카알벨루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서니데이 2019-06-24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중섭에 관한 내용을 읽으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생전에는 어려움 많은 삶을 살았다는 점도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카알벨루치님, 좋은하루 되세요.^^

카알벨루치 2019-06-24 23:07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서니데이님^^가족은 함께 할때 행복한데 떨어져있으면 너무 슬픈 듯합니다 정작 함께 있을때 그 소중함을 모르는게 큰 모순이기도 하다는...그런 생각입니다...
 

 

  

1

한달여 전이었던가?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사연은 이런 내용이다.

 

직장에서 한 남편이 사내 경품추첨에서 당첨이 되었다. 4인 가족 외식뷔페식사권에 당첨이 되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기뻐하면서 외식 상품권을 누구에게 선물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에, 아내는 애기도 봐주시는데, 엄마한테 드리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흔쾌히 장모님 드리면 되겠다고 동의했다고 한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남편은 사내 방송으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제 식사상품권 당첨되신 분 중에 끝번호가 XXX인 번호는 바코드가 잘못되어서 기존의 상품권을 가지고 오셔서 교환해 가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이 방송을 들은 남편은 혹시나 자신이 가져간 상품권에 오류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 어제 당첨된 상품권 말야. 그 바코드 끝자리가 XXX인지 확인해 줄 수 있나?”

, 그거 벌써 엄마 드렸는데. 왜 무슨 문제있어?”

 

 

 

2

남편은 알았다면서, 장모님에게 황급히 전화를 건다.

장모님, 어제 아내에게서 외식상품권 받으셨지요? 그거 상품권에 보면 바코드를 확인할게 있는데요. XXX인지...”

, 김서방이구만, 너무 고맙네 고마워. 내가 살다가 그런 상품권을 처음 받아봐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너무 고마우이. 근데 내가 그거 나 혼자 쓰기엔 너무 아까워서 내가 동네 서예원에 가서 서예를 배우는데, 서예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내가 그 선생님께 드렸지. 근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장모님, 상품권 바코드넘버가 어떻게 되는가 해서요. 실례하지만, 그 서예 선생님 전화번호를 좀 알 수 있겠습니까?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 그래? 잠깐만...010-XXX-XXXX....”

 

 

 

3

남편은 황급히 전화번호를 받아적은 뒤에 다시 장모님에게 서예를 가르치시는 분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 저는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서예 제자중에 ooo분의 사위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희 장모님께서 상품권 하나 선물하시지 않았나요?”

아 그 상품권 너무 감사합니다.”

근데 거기 상품권에 보면 바코드 넘버가 있는데, 확인을 해볼 게 있어서요. 지금 확인하실 수 있습니까?”

상품권, 그거 내가 너무 감사하게 받았는데, 어쩐다. 나도 그 상품권을 막상 쓰려고 하니 맘이 그랬는데, 문득 40년 전에 은사 선생님이 생각이 나서 그분께 선물을 드리면 좋겠다 싶어 그분께 선물해 드렸네...”

남편은 회사에서 폰을 붙들고 전화를 돌리다가 순간 멍해졌다.

, 그러면 죄송한데, 40년 전의 은사 선생님의 전화번호라도 알 수 있겠습니다. 확인만 하면 되는데요.”

 

 

 

4

남편은 또 다시 장모님의 서예 선생님의 은사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네 저는 어제 상품권 선물하신 40년 전의 제자분이 계시지죠? 그 제자분이 가르치는 동네에서 서예를 배우는 분 중에 저희 장모님이 계신데, 그 장모님의 사위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어제 받으신 상품권의 바코드 넘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그 상품권 지금 확인해주실 수 있습니까?”

, 그 상품권, 나한테 지금 없어. 그 상품권 우리 조카딸에게 줬지. 나는 나이가 들어서 어디 밖에 나가는 게 너무 힘들어. 외출하는 게 버거운 사람에겐 외식상품권은 아무 필요가 없지. 그래서 우리 조카딸에게 줘버렸지. 흐흐흐

.......그러면 그 조카따님 분 연락처라도 좀 알 수 있을까요? 급히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5

여보세요.”

, 여보세요. 근데 누구세요?”

. 네 저는 상품권...동네 서예선생님...장모님...사위....40년 전 은사 선생님...상품권 어쩌구 저쩌구...그래서, 그 은사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조카따님에게 선물을 드렸다고 해서 연락을 드립니다. 중요하게 확인할 게 있는데, 상품권 받으셨으면 지금 가지고 계신가요? 확인할 게 있어서 말입니다.”

상품권요? 그런거 받은거 없는데. ...어제 고모가 나한테 뭔가 주던데, 거기 있었나? 고모가 봉투에 넣어서 주던지 하지. 영수증이랑 고지서랑 같이 뭔가를 주던데 거기에 들어있었나 보네요.”

, 네 다행입니다. 혹시나 그 상품권 바코드 넘버 지금 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중요하게 확인을 해야 할 게 있는데 말입니다.”

, 그거요. 영수증이랑 고지서랑 다같이 찢어서 버렸어요. 고모가 상품권이라고 하고 줬으면 내가 챙겼지. 늘 그런 식이라니깐. !”

?....”

 

 

 

6

이 이야기의 사연이 소개되고 난 후, 사회하는 두 사람은 한동안 웃었다. 그러더니 정선희이었던가? DJ가 이런 멘트를 날렸다.

 

마치 우리 인생 같네요...”

 

돌고 도는 인생, 상품권처럼 돌고 도는 인생 같은...상품권 받을 땐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지만, 그게 결국 돌고 돌아 결국은 사용도 못하고 찢어서 버려지는 헛헛함은 무엇!?!

 

 

 

 

7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이 허무함을 노인의 고깃배에 겨우 붙어 있는 청새치의 앙상한 뼈만 남은 몰골로 표현해준다. 노인은 몇 일 동안의 거대한 청새치와의 사투를 벌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일요일 저녁에 시작된 팔씨름이 다음날 월요일 아침까지 승부가 나지 않다가 다들 고깃잡으러 갈, 일하러 갈 시간이 되자 자신이 팔씨름대회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는 그 호쾌한 추억 말이다. 노인은 그렇게 자신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청새치와의 전투(?)를 견디고 견딘다. 아마도 내가 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지금은 라디오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선희는 남편의 죽음과 이별, 그리고 많은 인생의 슬픔을 겪은 연예인이다. 그가 뱉은 마치 우리 인생 같네요...”라는 멘트가 참 가슴에 내려 앉는다.

 

    

 

 

    

 

 

 

 

 

 

 

 

8

이런 헛헛함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에 읽은 하정우의 에세이에서 잠시 읽게 된다.

 

하정우의 걷는 사람, 하정우에 보면, 하정우가 국토대장정을 떠나게 된다. 서울에서 해남까지 단순 걷기 프로젝트였다.

 

사람들은 인생살이에서 어떤 기대와 꿈을 품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형편이 나아지겠지, 세월이 지나면서 다 괜찮아지겠지, 지금 이 순간을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존재가 되어 있겠지.......어릴 때는 이런 희망과 꿈이 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높지만, 나이들수록 그 폭은 조금씩 줄어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고 뉘우치며 포기하는 단계까지 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다시 오지 않을 그 소중한 시간에 나는 왜 사람들과 더 웃고 떠들며 농담하며 신나게 즐기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내 삶도 국토대장정처럼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하는 것 뿐일 테다.

 

많은 사람들이 길 끝에 이르면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농담처럼 시작된 국토대장정은 걷기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길 끝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내 몸의 땀냄새,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꿉꿉한 체취, 왁자한 소리들, 먼지와 피로, 상처와 통증......오히려 조금은 피곤하고 지루하고 아픈 것들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25-26p)

 

   

 

 

9

결국은 헛헛함이 남는 인생이겠지만, 그래도 더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기독교 유신론자인 나의 생각들은 다른 이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하정우가 뱉은 이 대목이 가슴에 남는다.

 

길 위에서 만난 별 것 아닌 (오늘의) 한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하정우의 에세이에서 가장 남는 대목은 힘들다, 걸어야겠다라는 말이다. 하정우는 모든 것을 걷는 것으로 구현한다. 5천보, 만보....영화 터널을 찍기 전에는 터널 속에서의 초췌한 몰골을 연출하기 위해 살을 빼야 해서 제주도로 4-5일 정도 여행갔는데, 계속 걷기만 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6kg를 뺐다고 한다. 걷기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하정우, 멋지다!

 

   

 

 

10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길 위의 인간, 길 위를 여행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전에 읽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 리뷰를 남겼기에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자 한다.

길 위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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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6-18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페이퍼도 너무 좋은데요.

카알벨루치 2019-06-19 07:41   좋아요 0 | URL
hnine님~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하정우 책이 주인데 만들다보니 헤밍웨이 책이 먼저가 되버렸네요 암튼 감사합니다 ^^

제이디 2019-06-23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정말 잘쓰십니다!

카알벨루치 2019-06-23 17:14   좋아요 0 | URL
제가 이런 칭찬을 받다니~감개무량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뒷북소녀 2019-07-07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이야기! ㅋㅋㅋ

카알벨루치 2019-07-07 21:33   좋아요 0 | URL
아시는가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