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광균의 <은수저>란 시다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37p)

‘저녁밥상에 애기가 없다’는 현실은 ‘한 쌍의 은수저’로 그리고 그것은 ‘은수저 끝에 눈물’로 도드라진다 애기가 없은 슬픔이 느껴진다 문득 이기주의 <글의 품격>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난다 헤밍웨이에게 누군가가 6단어로 구성된 소설을 쓴다면 당신의 필력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이렇게 썼다고 한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김광균 보다 더 압축시킨 아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이 느껴진다 ‘한번도 신지 않은 아이의 신발’을 덩그러니 내놓은 그 풍경, 그 샷이 주는 슬픔의 미는 어떠한가!

역시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생략이론)”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글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자체, 나의 삶이 다른 이에게 보여지는 것은 삶의 전부가 아니라 파편일 수 있다 소위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일 수 없기에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타인을 100% 판독하고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린 우리의 눈으로 ‘타인의 삶의 빙산의 일각’을 보면서 판단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고 노릇이다



2
이윤기가 말한다
‘나는 이미 많은 정보를 내 기억의 창고에다 우겨넣었다 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면서 구정물이 맑아질 때를 기다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자주 나 자신에게 묻는다 더 알아야 하는가? 우겨넣은 짓 이제 그만하고 가만히 되새김질해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닌가?’(68p)

이미 고인이 된 작가가 스스로 질문하는 내용이다 “더 알아야 하는가?” 구약성경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은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도서 12:12)

배움에는 끝이 없고 이 세상엔 수많은 공부의 요소들이 있다 수많은 책들이 존재한다 자연의 풍광도 공부의 요소가 될 수 있겠다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게 팔색조보다 더한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가! 100년이란 시간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얼마일까? limit가 없는 것이리라 이윤기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고 했다 나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으니 더 우겨넣는 수고가 있어야겠다 근데 오늘 이 페이퍼는 정말 읽기를 쉬기 위한 pause time이다 계속 우겨넣음 머리에 쥐가 날 듯 해서다



3
그리스로마 신화학자로 알려진 그가, 딸(번역가이다)의 말을 빌면 이윤기는 늘 ‘소설가’로 불려지고 싶어했다고 한다 도서관에 꽂힌 1000쪽이 넘는 이윤기의 우람한 양장본 소설책이 떠오른다 목차를 보고 책쪽수를 보고 얼른 덮었다는 기억이 있다 우린 이윤기를 소설가보다는 그리스로마학자로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대박을 터트렸으니.
근데 이윤기가 그리스로마 신화의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한다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나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나는 어찌 되었을꼬! 나의 신화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좌절해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쓴다 흑해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 흑해를 건너야 한다’(81p)

인생의 기회는 한 순간에 포착되는 듯 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흑해를 피하였던가? 지금은 그 흑해를 건너고 있는가? 그렇다고 자위해 본다


4
‘어머니는 한 번도 날 무시하지 않았다(151p)’

‘지진아였던 내가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때로는 전세계를 누비기도 한다 내 분야에서는 실수도 별로 없다 어머니가 나를 무시하고 능멸했다면 나는 진작에 자멸했을 것이다 내 아들 딸도 부모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적이 거의 없다 지금 잘 자라 있다 사람은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능멸당한 경험이 없다면 남을 무시하거나 능멸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154p)

나는?
그냥 이 대목이 울컥했다 이윤기가 학창시절에 학교 1년 쉰다고 했을 때도, 1년 쉬다 다시 학교간다고 했을 때도 이윤기의 어머니는 그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줬다고 한다 근데 그건 정말 쉬운게 아닌 듯 하다 능멸당한다는 것은 존재가 쪼그라드는 경험이다 그 경험이 진짜 비극적인 체험이다
나는?
그리고 나는 자녀들에게 무시하지 않는 아버지인가? 자신이 없다 나도 그렇게 잘나지 않았고 잘 나게 커 온 것도 아닌데 이것도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인 것 같다 괜히 애들에게 미안하다


5
“작가의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 10년 뒤에 온다”

이 말은 프랑스 속담이다 작가가 죽은 뒤 10년이 지났는데도 책이 서점에, 서가에 꽂혀 있고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면 그 작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 이란 의미이다 우리의 존재가 싸늘한 시체로 변한 후에도 영향력을 미치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6
Stat rosa pristine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 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 없는 이름뿐.(176p)


역시 흑해를 건너는 수많은 여행에서 온 이윤기의 ‘빙산의 일각’이 보여주는 풍광이 글로 스치고 가는 느낌이 멋쩍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일지라도 나의 삶은 그래도....감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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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8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윤기 혹은 그의 작품이 카알벨루치님으로 하여금 이 페이퍼를 쓰시게 하였을까 잠시 궁금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카알벨루치 2019-10-18 08:45   좋아요 0 | URL
그리스로마신화를 2권읽다가 중도하차한 기억이 있네요 도서관에서 이윤기의 에세이라? 그래서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생각할 꺼리가 많더군요 필사노트를 뒤지다가 기억을 더듬어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적었을 뿐입니다 원래 제가 무계획적인 것을 좋아라 해서요 댓글 감사합니다 님도 즐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oren 2019-10-2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님이 했다는 저 말, ˝더 우겨넣는 수고가 망설여진다˝는 얘기를 접하니 문득 몽테뉴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윤기 님이나 움베르토 에코나 몽테뉴나 그 엄청난 ‘읽기와 쓰기‘를 했던 사람들이 하는 말은 평범한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나 동떨어진 얘기 같은 느낌도 많이 들긴 합니다.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 * *

멈출 줄 모른다

사람은 어떤 일에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정도에서 멈출 줄 모른다. 탐락이건 재산이건 권력이건, 그는 자기가 품어 안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의 탐욕은 절제가 불가능하다. 알고자 하는 욕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자기가 해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스스로를 위해 끌어 내며, 지식의 유용성을 그 재료가 있는 한 확대시킨다. ˝우리는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연구에도 무절제 때문에 고생한다.˝(세네카)

아그리콜라의 모친이 그 아들의 맹렬한 학문 연구 의욕을 억제하였다고 타키투스가 칭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확고한 눈으로 보면, 학문은 다른 재물과 같이 인간이 타고난 고유의 약점과 허영이 많이 섞여 있는 값비싼 것이다.

카알벨루치 2019-10-23 13:29   좋아요 1 | URL
오렌님은 댓글로 너무 현란하게 달아주셔서 대댓글을 잘 달아야겠다는 부담감이 팍팍 느껴집니다 ㅎ앎에 대한 욕구, 지식욕도 탐욕적인 성향이 존재하는군요 참 허영이라는, 허세란 것은 경계가 없는 듯 하네요 가을날 즐거운 하루 보내십시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알베르 카뮈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했고,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포크너를 칭찬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시상 연설에서 마크 트웨인은 문학의 지도에 미시시피 강을 그려놓았다면, 50년 후 윌리엄 포크너는 미시시피 주를 21세기 세계문학의 랜드마크로 창조해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포크너는 아무튼 범접하기 힘든 경지의 작기임에는 틀림없다.

 

 

 

 

2 나의 사견을 밝히자면,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인이란 말의 의미에는 미국이란 나라는 청교도적인 세계관이 기저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헤밍웨이가 태양은 다시 뜬다의 도입부에서 구약성경의 전도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 또한 헤밍웨이가 미국인, 미국작가이기 때문이다. 한국 작가가 만약 기독교적인 철학적 바탕을 깔고 소설을 썼다면, 독자들이 접근하기가 훨씬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유교적인 세계관이 본능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포크너의 은 이런 기독교적인 창조의 가치관이 배여 있다고 볼 수 있다.

 

 

 

 

3 구약성경 창세기 1:27-28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개역개정)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 최초의 인류 아담에게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라고 하셨다. 인간의 자연만물의 관리자, 정복자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 정복하라는 말엔 오해의 여지가 존재한다. 모든 자연 삼라만상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말 그대로 정복자가 인간이란 느낌과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 구절에는 인간의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2가지의 책임이 깃들어 있다.

 

 

첫째, 개발과 계발의 책임이다. 자연 만물을 발전시키고, 문화를 창조하고, upgrade시키라는 말이다. 영어의 cultivate(경작하다, 농사짓다)란 동사에서 culture(문화)가 나왔다. 땅을 경작하는 농경생활의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서 문명이, 문화가 시작된다.

 

둘째, 보존의 책임이다. ‘정복하라는 의미에는 파괴시키고, 짓누르고, 억압하고, 무조건적인 군림의 의미가 다분하다. 하지만 인류가 으로부터 부여받은 정복은 보존의 책임이 존재한다. 이 말은 발전시키고, 개발시킨다는 명목하에 자연의 질서, 생태계의 뿌리까지 파괴해가는 인간의 개발은 조물주의 뜻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자연만물의 정복자라는 의미는 관리자란 의미가 더 가미되어져야 한다.

 

 

 

 

4 포크너는 에서 이런 기독교적인 철학 위에 인간의 책임을 지적한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땅을 창조하셨는지 쓰여 있습니다....인간과 그 자손들에게 땅을 이리저리 조각내 대대손손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명의를 붙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익명하에 공동으로 땅을 보전하고 사용하라 하셨어요.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요구하신 유일한 사용료는 연민과 겸허, 관용과 인내, 그리고 땀 흘려 식량을 얻으려는 노력 뿐이었습니다.”(103p)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주는 모든 혜택, 땅이 주는 모든 유익에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연과 땅, 환경을 파괴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불청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포크너는 여기 작품에서 숲 속의 수호신, 숲의 정령과도 같은 곰, 올드벤을 등장시킨다. 숲 속의 터줏대감처럼 든든히 지키고 있던 올드벤(), 종종 마을의 여러 이웃들의 가축과 재산에 해를 끼치는 곰이었다. 곰 사냥의 목적은 결국 성취된다. 십수년 동안 온 몸에 수십 발의 총알 자욱이 박혀있던 올드벤은 그렇게 죽는다. 포크너는 이 작품의 1, 2, 3, 5장에서 사냥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인간은 자연을 사냥하고, 사냥하고, 사냥한다. 개발하고, 개발시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다. 문득 100년 전의 일본의 인기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行人)에서 피력한 대목이 생각난다.

 

자네가 말하는 불안은 인간 전체의 불안이지. 유독 자네 혼자만 괴로워하는게 아니라고 깨달으면 그만 아닌가? 결국 그렇게 유전해나가는게 우리들 운명이니까.”

 

인간의 불안은 과학의 발전에서 비롯되네. 앞서가기만 하고 멈출 줄 모르는 과학이 일찍이 우리에게 멈추도록 허락한 적이 없네. 도보에서, 인력거로, 인력거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자동차, 그 다음엔 비행선, 그 다음엔 비행기, 아무리 가봐도 쉬게 내버려두지 않아. 어디까지 끌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참으로 두렵다네.”(327p)

 

소세키는 100여전에 이미 인간 본유의 불안을 감지한 것이다. 계속되는 문화의 upgrade로 인해 인간은 덜 불안해야 하는데, 더 불안해 한다, 더 고독해진다.

     

 

 

5 마크 맨슨의 최신작 희망버리기 기술에서 이것을 진보의 역설이라 했다.

 

사람들은 사는 게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더욱 불안해하고 더욱 자포자기한다.’(17p)

 

마크 맨슨은 설문조사 이야기를 한다. ‘1980년대 실시한 설문조사에 지난 6개월 동안 자신의 개인사를 몇 명이랑 상의했느냐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은 3명이었다. 2006년 다시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 가장 많은 대답은 ‘0’이었다’(18p)고 한다.

 

공짜 와이파이와 침대의 안락함에 젖은 오늘날의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엄청나게 엉망진창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21p)

    

다시 포크너의 책으로 넘어오자.

곰에게 soul이 있는가? 곰은 자연의 소울soul로 상징된다. 인간은 자연을 박해하고, 사냥하고, 단맛만 빼 먹고 방치하다가 폐기처분해버린다. 그런 문명의 본질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지적한다.

 

 

 

6 포크너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유형)의 캐릭터를 대조시킨다.

샘 파더스(아이작 매캐슬린) VS 벤 호겐벡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자, 우주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혼혈인 샘 파더스는 곰의 죽음과 함께 자신도 유명을 달리한다. 반대로, 올드벤의 최후를 칼질로 목숨을 끊어간 분 호겐벡에게는 곰은, 자연은 단지 정복의 대상으로만 영점조준된다. 아이작의 할아버지, 그리고 세대의 세대들 또한 그런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분 호겐백은 다람쥐들에게 총질을 하면서 소리친다.

 

여기서 꺼져! 만지지 마! 아무것도 만지지 마! 다 내거야!‘(205p)

 

분의 모습은 파괴적인 정복자, 욕망가의 표상이 된 인간의 초상화이다. 포크너는 이런 분의 모습을 통해 개발은 실컷 하지만, 정작 보존의 책임을 망각하고, 유기하는 인류를 향해 경종을 울린 셈이다. 작품 중에 아이작 매캐슬린은 할아버지의 탐욕에 의해 일군 유산을 상속받길 거절한다. 4장은 21살이 된 아이작과 친척형 매캐슬린 에드먼즈 사이의 대화가 심오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4장에 대해 말이 많다. 사냥이야기의 이란 작품에 꼭 이야기가 필요하냐며 부류와 그 반대의 부류이다. 내가 생각건대 이 대목이 있어 작품이 더 궁극적인 가치에 도달하는 느낌이다.

 

 

 

 

7 앞에서 헤밍웨이 이야길 했는데, 그 작품 태양은 다시 뜬다의 첫 장에 실린 구약성경의 전도서 1:3-6이 박혀 있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여기 보면, 인간의 세대는 유한하지만, 땅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땅은 죽지 않는다. 사양화 되거나 황폐해지긴 하겠지만. 허나 사람은 죽는다. 세대의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땅을 소유하고자 한다. 과연 인간이 땅을 소유할 수 있을까?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이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가 과연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소유물의 실체나 물건이나 유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공간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돈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큰 저택이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가? 그냥 백년 안팎의 시간과 내 몸을 뉘일 수 있는 공간만 소유하고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흘러가는 것Flow...flow...flow   

    

 

8 미투운동이 대두되면서 권력의 갑질에 대해 여기저기서 이야기가 많다. 갑질? 정말 무서운 것이다. 문득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인간은 자연을 향해 권력의 자리에 군림하여 자연이 가만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갑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개발(계발)보존의 쌍두마차가 제대로 달려야만 인간과 자연이란 이 우주공동체는 더 조화로울 수 있지 않을까? 공존공생(共存共生), 동거동락(同居同樂)의 처지에서 인류는 오히려 자연에게 갑질하는 권력의 횡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윌리엄 포크너는 이 작품을 통해 곰에게 갑질하는, 자연에게 갑질하는 인류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9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읽히기가 힘든 이유는 아마도 포크너의 글이 스토리의 줄기만을 가지고 치고 나가는 스타일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의 기억, 회상, 과거, 현재...등등.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역자는 포크너의 영어 작품을 번역할 때 상당한 고충이 있었음을 피력한다. 결국 번역의 기준을 의미전달을 중시한 번역’(213p)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포크너의 글이 주는 매력이 번역과정에 다소 거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포크너의 언어가 대단하는 말이다. 이래서 text는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인데. 영어실력도 실력이지만, 게으름 탓에 작품이라도 읽은 것이 어디냐며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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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지를 관광하면서 일체의 메모나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같으면 인증샷을 얼마나 남기려고 애쓰는가? 우리는 마치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찍고, 찍고, 찍고...하지만, 하루키는 다르다. 하루키는 집으로 돌아와 여행지에서 받은 느낌, 잔상들을 떠올리면서 후기식으로 글을 적는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의 감정, 그 때의 느낌을 오롯이 기억에 의존하여 여행일지, 여행일기를 쓰는 셈이다.

 

내가 이 책, 역사의 쓸모를 다 읽고 데스크에 앉아 내 마음에 가라앉은 것은 무엇일까? 하루키식으로 한번 돌아볼까? 기억의 잔상을 추적해 본다.

 

 

 

 

2

먼저, 최태성이란 저자의 매력을 들고 싶다. 무슨 임용시험, 자격시험, 공무원 시험은 이제 나하고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셈이다. 최태성이란 이름만 들어본 나는, 이 책의 뚜껑을 열면서 아하!’라는 감탄사를 연발케했다. 다소 대중적인 설민석보다 더 감동적인 역사 쌤이 있구나 싶었다. 설민석의 삼국지 1,2를 읽으면서 재미있고 흥미가 있었다. 중간에 삽화도 있고, 부연 설명도 괜찮았다. 이미 10권짜리 이문열의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나로서도 <삼국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소재이다. 나는 결혼 전에 이문열의 삼국지를 아내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는 아직 독서중이다. ㅎㅎ

 

 

   

 

3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말 그대로, 삼국지 입문서로는 굿이다. 이현세의 <만화삼국지>도 너무 재미있게 보았는데, 설민석의 삼국지 1,2는 만화보다 쉽다고 하겠다. 쉽다는 말은 그만큼 압축되고 간단하고 수월하게 읽힌다는 말씀이다. 10권짜리 삼국지를 재독하려고 했을 때, 인상적인 대목이 어디 있던가 싶어 뒤적여 본다.

 

유비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길에 만난 한 허름한 노인이 이런 말을 날린다.

 

말이 많으면 마음이 빈다

 

, 어떻게 이런 심금 울리는 대사를 칠 수 있단 말인가? 또 하나 더 볼까?

 

 

유비가 또 다른 스승을 찾지 않고 집으로 가니 어머니가 왜 이리 일찍 왔느냐고 하자, 유비가 대꾸한 말이다.

 

글이 모자라서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이 외에도 삼국지 군데군데 박혀 있는 주옥같은 명문장과 아포리즘은 가슴에 와 박힌다. 20대에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술잔이 넘치는 것을 보면서 술 잔이 넘친다는 것은 정이 넘친다는 뜻이라며 삼국지의 이야기를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삼국지는 그만큼 수많은 보화들이 가득 찬 고전(古典)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설민석의 삼국지에서는 이런 맛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 

유비가 제갈공명을 찾아가는 대목이다. 제갈공명을 인재로 사용하려고 벼르고 벼르지만, 제갈공명이 만날 기회를 주질 않는다. 공명보다 스무 살이 어른인 유비의 공들이는 모습에 아우 관우와 장비가 불만을 토로한다. 또 다시 입이 튀어 나온 관우와 장비의 반응에도 아랑곳 없이 와룡산으로 향하는 유비였다. 고을에 도착한 유비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고 한다.

 

여기서부터 걸어가자. 성의를 보여야지.”

아니 누가 본다고 벌써 그러시오? 여기서 그 집까지 가려면 거리가 얼만데?”

하늘이 보고 땅이 보질 않느냐? 진정한 성의란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거다.”(설민석의 삼국지 1, 311p)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다른 이가 알아주는 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자기 자신이 알아주는게, 자기 자신에게 보이는 게 가장 최선이 되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의 정곡을 찔렀다. 이 감동은 도대체 어쩔거냐?

 

    

 

4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대중적인 설민석과는 또 다른 최태성의 깊이와 식견이 여기서 드러난다. 교사로 재직중에 웬 학원에서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연봉으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저자는 고민했다고 한다. 당연히 고민해야지. 안 그런가?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그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한 역사의 인물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이었다고 한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40p)

 

저자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진단하고 선택을 내렸다. 그는 그 화려한 제의를 거절했다.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가치에 주사위를 던진 셈이다. 이 이야기가 심쿵했다. ‘최태성이란 저자가 솔직히 그냥 보이지 않았다.

 

 

 

5

둘째의 매력은, E.H.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이야기를 했다. 저자는 강의만 팔아먹는 장사꾼이 아니라, ‘역사적 사고를 하는 주체라는 점. 바로 역사적 사고란 단어가 기억에 남는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인기가 좋아서 연임 이후에 3선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수많은 이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양한다. 거절한다.

 

정계를 떠나고자 하는 내 선택이 주의와 분별의 잣대를 비추어 바람직할 뿐 아니라 애국심의 잣대에 비추어서도 그릇되지 아니한 선택이라 믿는다.”(58p)

 

초대 대통령으로서 좋은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박정희 대통령은? , 대통령을 다 닮아가는 한국인인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기득권과 안전장치를 내려놓은 이들이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이 미국 사람보다 욕심이 더 많은가? 아니다. 인간은 원래 욕심의 동물이고,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역사 속의 소수의 인물들은 우리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나라가 기울어가는 망국의 조짐을 보고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압록강을 건넌다. 이회영 가족이 조선 땅을 떠난 이유는 가족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구차히 생명을 도모하지 않겠다’(219p)는 가족회의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도왔다. 지금 시세로 따지면, 이회영의 재산은 헐값으로 매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600억 원이 넘었다. 만주 땅에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학교를 짓고,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투사들을 지원했다. 또한 형제들이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액수의 자산이 3년 만에 바닥이 나버린다. 가족들 모두가 강냉이죽도 마음껏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회영의 가슴에는 오로지 식민지 해방의 꿈이 있었던 것이다.

    

 

6

역사적 사고

쓸모 없는 것, 쓸모 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라...쓸모 없어 보이는 것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너무나 다른 색깔의 야사집과 같은 <삼국유사>가 과연 정말 쓸모없는, 쓰잘데기 없는 기록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는 기록으로 승부한다. 저자는 쓰잘데기 없는 시시콜콜한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기에 지금도 TV와 드라마, 영화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인간의 삶, 인간의 역사는 버릴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이 기록화된다면, 과연 그것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뻗어간다. 내 자식들은 아비의 기록을 대하는 것에 의미가 없지 않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쓰잘데기 없는 1인의 기록이 역사라고 회자된다면? 역사는 기록이 있기에, 과거와 현재가 소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백성들이 글을 깨우치고, 남편을 먼저 보낸 한 여인의 피맺힌 절규의 글이 19984월 안동에서 발견된다. 무려 400년 전인 1586년에 쓰인 편지였다.

 

당신 늘 나에게 말하기를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중략)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도 끝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115p)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길 바라>라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제목처럼, ‘별 것 아닌 것이,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더라는이야기이다.

 

 

 

7

나의 쓸모, 인생의 쓸모, 역사의 쓸모...

쓸데없어 보이는 내 인생의 쓸모를 역사적 선분 위에서 한번 생각해 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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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9-22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 씨의 책들은 너무 가벼워서 패스
하렵니다.

정사 삼국지가 아니라 소설 연의라는
걸 밝혀 주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소설이 역사를 대체하게 되었네요.

유비를 너무 빠ㄹ... 아니 추켜 세워서
2류 군벌을 한황실 부흥에 나선 춘추
대의를 받드는 영웅으로 격상시킨 게
바로 소설가라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
라고나 할가요.

그런 점에서 설 씨의 책과 일맥상통하
니 그렇게 비판적일 필요가 없겠구나
싶기도 하구요.

카알벨루치 2019-09-22 21:39   좋아요 1 | URL
설민석은 역사를 대중화시킨 한 사람 정도로 알아두면 되겠습니다 픽션인지 팩션인지 팩트인지는 언제나 독자의 몫인데 독자가 그걸 분별한 능력이 있어야한다는 전제가 깔리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것이 딜레마이기도 하고 원전을 대하지 못한 초보독서가에겐 흥미유발을 시킨다는 부분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syo 2019-09-22 2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몇 권을 후루룩 엮어 내는 글은 정말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겠단 말이지요..... 호랑이님이나 사이러스님이나 카알님이나 참 부럽다.

카알벨루치 2019-09-22 21:40   좋아요 0 | URL
쓰다보니 그렇게 되는거지요 다 자기 스탈이 있으니 ^^어여 몸부터 회복시키세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9-09-2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쓸모>를 사 두고서 못 읽었습니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하렵니다. ㅋ
저는 정비석의 <삼국지>를 읽었습니다. 다른 건 10권인데 이건 총 6권짜리라서 선택했죠.
너무 오래전에 읽은 거라 주옥 같은 아포리즘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땐 줄거리에 치중해서 읽었던 건지...

카버의 <대성당>으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을 읽었는데 표제작인 ‘대성당‘만큼 좋았습니다.
하루키, 역사란 무엇인가 등 모두 제가 알고 있는 책 이야기라서 댓글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3 23:15   좋아요 1 | URL
<삼국지>를 재독할려고 했을때 좋은 내용을 타이핑하면서 읽다가 중도에 하차했는데 ....그렇게 읽으니 음미할 꺼리가 더 있는 듯 합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세상엔 좋은 책이 왜 그리 많대요 ㅎㅎ

coolcat329 2019-09-23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봐야 겠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설민석의 책은 초딩 아이를 위해 샀는데 푹 빠져서 너무 재밌게 읽더군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9-09-23 23:16   좋아요 1 | URL
그냥 제겐 <역사의 쓸모>란 책이 너무 좋았네요 빌려 읽고 선물도 하고 했는데 다시 한권 사서 집에 구비해놓을 작정입니다 ^^

coolcat329 2019-09-24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야겠어요:)

이혜자 2019-09-29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잘 읽고 갑니다~
깊이있는 독서들을 하시는 님들의 댓글에 리스펙 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9-29 13:35   좋아요 0 | URL
방문 감사, 댓글도 감사드립니다 ^^

하하호호 2019-10-02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글 읽고서 <역사의 쓸모>를 샀습니다. 제 인생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10-04 00:32   좋아요 0 | URL
후회하시지 않을겁니다 최태성작가한테 제한테 오히려 감사해야하겠네요 ㅎㅎ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소세키의 등장인물은 공통적으로 지식인이다. 1900년 작가 소세키는 일본 문부성 제1회 국비유학생으로 영국을 유학을 가게 된다. 그 유학생활은 소세키를 지적, 정신적으로 팽창시키면서 동시에 신경쇠약이라는 딱지를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된다. 서구문명을 직접 육안으로 대하면서 느낀 유학생활은 소세키의 내면세계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 아닌가 싶다. 나쓰메 소세키는 100년이 훨씬 넘은 과거에 활동했던 작가이다. 그 작가가 어떻게 지금 우리 현대에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소세키가 묘사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 있지 않을까 싶다.

 

 

 

 

2

길 위의 생(이레)(한눈팔기(현암사)의 다른 번역본)을 번역한 김정숙은 제자들에게 ‘20대에게는 산시로를 추천하지만, 나이가 들면 길 위의 생(한눈팔기)을 추천한다고 했다. 확실히 산시로의 맛과, 한눈팔기(길 위의 생)의 맛은 확연히 다르다. 점수를 주자면 오히려 한눈팔기에 더 주고픈 마음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생의 중후한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이 아닐까 싶다. 도서관에 한눈팔기(현암사)가 없어서 길 위의 생(이레)을 빌려 읽었는데. , 이 책은 확실히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굉장한 도움이 된다. 소세키의 산문 유리문 안에서도 소세키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을 더 추천하고 싶다. 내면세계에 대한 집요한 탐험과 성찰이 아마도 그를 일본의 세익스피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군림하게 하지 않았나 싶다. 일본의 지폐에 소세키가 등장한다는 이야길 듣고 굉장히 부러웠다. 우리에게도 이이’, ‘이황이나 세종대왕이 있긴 하지만, 근대와 현대의 문학가가 화폐의 주요인물로 등장한 것을 생각할 때 조금 부러울 따름이다.

  참고로, 한눈팔기(길 위의 생)』는 원제목이 <미치쿠사>이다. 일본 특유의 어휘로 사전적 설명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길가에 난 풀을 말하고, 또 하나는 길 가는 도중에 딴 짓으로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다. 보통 후자쪽이 '도중에서 지정거린다, 도중에서 한눈 팔며 시간낭비를 한다'는 관용구와 함께 널리 쓰이고, 소세키 또한 후자의 감각으로 이 제목을 붙인 것 같다(길 위의 생. 320p). 

    

 

3

소세키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세계, 마음 안으로 깊이 내려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의 유학생활 이전에 그의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경험들을 들 수 있다. 소세키는 아버지의 후처의 5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양친이 고령인데다 형제가 많은 탓에 그의 태생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고물상의 수양아들로 보내졌지만 사는 게 변변찮은 것을 누나가 불쌍히 여겨 다시 생가로 돌아온다.

 

나는 작은 광주리 속에 뉘여 매일 밤 고물가게의 잡동사니와 함께 요츠야 야시장의 노점에서 밤바람을 맞으며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어느 날 밤 누나가 무슨 일인가로 그 앞을 지나가다가 발견하고서 가엾게 여겨서였을까, 품에 싸안고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나는 그날 밤 잠을 안 자고 밤새도록 울어 대기만 해서 누나는 아버지에게 몹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유리문 안에서, 109-110p)

 

 

하지만 소세키는 또 다시 4살 되던 해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진다. 8-9세때까지 그 집에서 자랐는데, 얼마 안 되어 양가의 묘한 분란이 생겨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웃고픈 현실은 소세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부모들은 소세키에게 부모가 아니라 조부모라고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밤에 하녀가 조용히 이 비밀을 알려준다.

 

 

도련님, 도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분은 정말은 도련님 아버지와 어머니세요. 아마 그래서 저렇게 이 집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참 묘하지, 하고 두 분이 말씀하시는 걸 제가 들었기 때문에 살짝 도련님에게 알려 드리는 거예요.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지요?”(유리문 안에서, 111-112p)

    

이 비밀을 듣고선 소세키는 굉장히 기뻤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사실을 가르쳐 준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단지 하녀가 나에게 친철한 데서 오는 기쁨이었다는 것. 그렇게 따져 본다면, 그 늦둥이자, 8남매의 막내인 소세키가 환대받지 못한 가혹한 운명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는지를 알 수 있다. 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 겐조의 말이다.

 

친 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양아버지 쪽으로 보더라도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건이었다. 단 친아버지가 그를 허드레 물건으로 취급한데 반해 양아버지는 당장 무슨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이었을 뿐이었다....사환이든 뭐든 시킬테니까 그리 알아라.’(길 위의 생275p)

 

친부나 양부도 모두가 소세키에겐 상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환대해주는 이가 없었는데, 소세키가 도련님이란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도련님은 일본어로 봇짱이다. 봇짱에서 은 친근함을 주는 애칭이고, ‘봇짱은 도련님이란 뜻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하녀 할머니는 누가 그를 뭐라고 해도 주인공, 도련님의 편을 든다.

 

도련님, 소원인데요. 기요가 죽거든 도련님 네 절에 묻어주세요. 무덤 속에서 도련님 오기를 낙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겠어요.”(도련님, 231p)

 

개인적은 생각인데, 기요 하녀 할머니는 소세키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상징이 아닐까 싶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소세키가 14살 때 생모 치에(54)는 죽는다. 1875년에 양가에서 생가로 돌아온 소세키는 1881년에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어머니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6년 남짓 되겠다. 생가에 돌아와도 부모님을 조부모님이라고 불렀던 소세키에겐 할머니란 단어가 어머니였던 것이다. 막둥이 소세키의 할머니는 나이 많은 엄마였던 것이다  

    

 

4

소세키의 가정사에 얽힌 슬픔은 숙부의 사기 사건이 더해진다. 아버지의 유산 상속문제를 믿고 따랐던 숙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돈이 결국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원래 사람이 그런 것일까? 소세키의 작품 속에는 항상 <돈>문제가 나온다. 아마도 돈은 우리 현실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특별히『길 위의 생』(한눈팔기)에서는 '돈'이야기로 계속 점철된다. 우리 인생도 돈 이야기 안 할 수 없는 인생이지 않는가! 소세키는 숙부에게 유산상속 문제로 인해, 돈 문제로 인해 받은 상처와 아픔을 그는 작품 속에서 등장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마음이다. 그 작품에서 등장한 선생님의 이야기들 속에 숙부는 선생님을 더욱 외롭게 만들어버렸고, 사람에 대한 불신, 세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나는 외로운 사람일세.”(마음, 27p)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시즈와 결혼하였지만, 선생님 당신은 고독하고 외로운 영혼이었다. 마음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 삼촌에게서 상처받은 데미지는 자신의 소울메이트 K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소세키의 이러한 집요한 마음탐구는 삼촌에게 받은 데미지, 상처로 인해 K까지, 자신의 결혼생활까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더 빛나는 성찰과 참회는 이렇게 나타난다.

 

숙부에게 속았을 당시 내 마음은 타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네. 그러면서도 나 자신만은 정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 세상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믿음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던 걸세. 그 믿음이 K의 일로 맥없이 무너져버리면서 나 역시 숙부와 똑같은 부류의 인간임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 타인을 불신했던 나는 이제 자신까지 불신하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네.’(마음, 304p)

 

 

   

 

 

5

자신의 인생, 사람에 대해 불신감을 가득 안겨주었던 숙부의 사기 사건은 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191043세의 소세키는 3월부터 6월까지 아사히 신문에 을 연재한다. 그리고 6월에 위궤양 때문에 나가요 위장병원에 입원한다. 8월에는 슈젠지온천에서 다량의 피를 토하며 위독한 상태에 빠진다. 이를 슈젠지의 대환이라 부른다. 19161121, 49세의 소세키는 위궤양 악화로 쓰러진다. 122일에는 내출혈로 재차 위독한 상태에 빠지고, 129일 오후 645분에 사망한다. 소세키가 이야기한 문은 무엇일까?

은 주인공 소스케와 아내 오요네의 평범하고도 단촐한 일상을 그려준다. 외부사회의 단절은 그 두 사람 부부를 하나되게 만들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확실히 금실 좋은 부부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 한나절도 서먹서먹한 마음으로 지낸 적이 없다. 말 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그들의 생활은 넓이를 잃음과 동시에 깊이를 얻었다. 그들은 6년간 세상과 산만한 교섭을 찾지 않는 대신 그 6년의 세월을 걸쳐 서로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들의 생명은 어느새 서로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었다. 세상에서 보면 두 사람은 여전히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기에는 도의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168-169p)

 

하지만 그 부부는 세상을 등진 부부였다. 부모, 친척, 친구, 일반사회, 학교로부터 버림받은 타락학생이었다. 이 이야기는 20대의 산시로, 30대의 그 후, 그리고 의 이야기로 얼추 이어진다고 보면 되겠다. 소스케와 오요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었던 야스이, 이 삼각관계에서 부부의 도덕적인 책임을 나타난다.

 

산시로에서 등장한 산시로와 미네코는, 그 후에서는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등장한다. 20대의 푸르른 청춘이 이제 30대로 접어든 셈이다. 산시로에서도 돈을 빌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후에서도 다이스케가 친구 히라오카와 미치요 부부에게 돈을 빌려준다. 이 세 사람은 동창이다. 다이스케가 손수 히라오카와 미치오 커플을 이어주는 중개역할까지 했다. 그러기에 남다른 관계이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한량처럼 늘 지낸다.

남의 부인이 찾아오는 것을 그렇게까지 기다릴 까닭이 없다는 생각’(165p)을 하면서도 다이스케는 스스로 자기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176p)이라고 평한다. 다이스케는 모든 이의 만족이 아닌 오직 한 사람, 특별히 자기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그 후의 다이스케의 결정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이 에서는 소스케 부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소세키는 이 도덕적인 잘못의 결과로 부부의 태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태의 문도 문이긴 하다. 3번의 유산을 통해 6년의 결혼생활 동안 자식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산다. 더 나아가 요오네는 점쟁이한테 찾아가 아이가 영원히 들어서지 못한다는 저주 섟인 발언을 듣게 된다. 자기 부부의 잘못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틀어진 야스이가 몽골에서 돌아와도 대면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소스케는 뜬금없이 10일 간의 참선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은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 왔다. 하지만 문지기는 문 너머에 있으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다만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하는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252p).’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253p)

 

소세키가 가정환경으로부터 느꼈던 불안과 트라우마는 평생 그의 가슴에 그림자로 남았다. 개인적은 가정사에서 느꼈던 불안은 외부환경에 상관없이 그의 마음을 늘 짓눌렀을 것이다. 그 어린 시절에 대해 소세키는 길 위의 생에서 이렇게 말한다.

 

“...설혹 사실에 선을 긋는다 하더라도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내가 죽어도 하늘이 부활시켜주니까 난들 어쩔 수 없다구.”(길 위의 생, 304p)

 

감정을 밟아 죽일 수는 없어. 그때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지금도 어느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란 이 대목은 물론, 셋째 형에게 빼앗긴 첫째 형의 유품인 시계에 대한 부분이다. 소세키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의 파편이기도 하다 

 

    

 

6

소세키가 소유한 내면의 끊임없는 불안이 그는 <>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소세키는 자신의 작품의 제목에 대해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신문사에서 제목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세키의 <>은 인생의 문, 고통스런 인생의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지 않는 아내와 튼튼한 아기 외에 면직이 될 듯 될 듯 하면서 안 되는 형이 있고, 천식으로 죽을 듯 죽을 듯 하면서도 아직 살아 있는 누이가 있었다. 새 지위를 얻을 듯 얻을 듯 하면서 아직 얻지 못한 장인도 있었다. 또한 이들과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로 있기도 했다.’(길 위의 생, 248p)

 

길 위의 생을 보면 진짜 겐조와 얽힌 관계들이 그를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이 소세키를 이해하는 데 제일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소세키는 유리문 안에서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죽음이 삶보다 고귀하다고 나는 믿는다.

불유쾌함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소세키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 악화로 인해 죽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과 고통 가운데서 야기된 모든 것들이 그에게 이런 말을 남기게 하지 않았나 싶다.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인생의 문, 죽음의 문은 누가 대신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혼자 열고 들어가야 할 문인 셈이다. 소세키가 말한 문은 죽음의 문이란 생각을 나 혼자서 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눈팔기'란 제목은 잘 지은 듯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7

소세키는 확실히 잘 읽힌다. 확 읽힌다. 하지만 너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듯 하다. 소세키의 내면을 훑는 데는 아마도 무게감 있는 감정의 저울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소세키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은 삶의 무거움에 대한 공감도 한몫하겠지만, 치열한 삶의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한 인간의 내면세계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한 인간의 깊숙한 불안을 조망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8

위화는 모든 이야기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소세키가 지닌 이야기의 영혼 때문에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읽는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한 개인, 한 사람이 바로 세계라는 말...소세키에게 그 말이 적용되겠다 싶다

  -소세키의 작품 중에 오른쪽은 읽은 책들이고, 왼쪽은 읽으려고 빌린 책들이다. 현암사의 소세키전집은 진짜 탐나는데, 카알 벨루치 요즘 많이 참고 있습니다. ㅎㅎ내 마음대로 소세키 읽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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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9-08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제 저는 알라딘에서 소세키 관련해서 깝치지 말아야겠네요.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카알벨루치 2019-09-08 19:44   좋아요 0 | URL
그 자리가 그 자리이지 어디긴요 ㅋㅋ소세키 매력적이네요 인제서야 읽어내고 있습니다 소요 오늘도 즐겁게 하루 마무리 하세요 지금 설인가요?

syo 2019-09-08 19:46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저는 영대병원이요. 엄마 내일 수술이라서 오늘은 여기서 보초섭니다. 카알님도 주말 마무리 잘 하세요^-^

카알벨루치 2019-09-08 19:50   좋아요 0 | URL
아휴 수고가 많네요 어머니 수술 잘 하시길 어여 쾌차하시길 기도합니다 ~거기서도 책 볼듯 하네요 ㅎㅎ

syo 2019-09-08 19:51   좋아요 0 | URL
정답 ㅋㅋㅋㅋ

stella.K 2019-09-09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 읽기 부럽습니다. 전 맘에만 있고 정작 읽지는 못하고...ㅠ
몇년 전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 조금 읽다 말았습니다.
좋은 작품이긴한데 잘 안 읽혀지더라구요.
게다가 지금은 그런 짓 안하지만 당시 이벤트 도서를 엄청 많이하고
살아서 자꾸 읽는 게 미뤄지더라구요.
소설 보단 에세이나 인문학을 주로 읽기도 했고.
그런데 카일님은 <...고양이...>는 아직 안 읽으셨나 봅니다. 그건 안 다루셨네요.

카알벨루치 2019-09-09 20:01   좋아요 1 | URL
<나는 고양이...>는 전에 이북으로 읽다가 말았는데 이게 대개 두껍네요 빌렸으니 읽어야겠죠 읽으면 리뷰 올릴께요~리뷰가 밀려서 큰일입니다 그나저나 건강 늘 유의하소서

페크(pek0501) 2019-09-15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멋지군요. 한 작가를 탐독하기!
저는 <도련님>을 꽤 재밌게 읽었었습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신선했어요.
카알 님의 탐독이 계속되시길...
소세키의 다른 책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 올해 안으로 탐독해 보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9-15 12:42   좋아요 1 | URL
소세키의 전집을 읽으려고 시작한건 아닌데 <산시로>의 첫 감동이 너무 커서 읽고 있긴합니다 ㅎㅎ
 

 

1

테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 대한 책이다. 거기에 보면 커피 반 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수용소에서 매일 커피를 한 잔씩 포로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커피는 향긋한 향이 나는 아메리카노나 내가 매일 드리퍼로 내려 마시는 커피의 커피향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자랑꺼리인 맥심믹스 커피도 아니다(맥심믹스 커피를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고 한다). 그 수용소에서 내주는 커피는 악취가 나는 물에 불과했다. 수용소의 포로들은 목욕도, 심지어 세수할 물조차도 변변찮았다. 포로들 중에는 그 커피 한잔을 냉큼 다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커피 반잔은 마시고, 반잔은 고양이세수라도 하고 손도 씻고 그러했다고 한다. 수용소에서 세수는 무슨? 수용소에 있는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왜 그렇게 커피 반잔을 낭비한단 말인가? 수용소 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들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커피 반잔을 자신의 용모에 투자(?)한 사람들이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다들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새삼스럽게 커피 반잔의 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통전문가인 저자 김창옥은 커피 한잔을 다 비운 사람들의 가슴에게 있었던 것은 절망이라고 했다. ‘커피 반잔을 남겨두고 자신을 관리(?)했던 사람은 희망을 가슴에 담아두었다고 볼 수 있겠다. 굳이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갖다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절망은 희망을 좀먹는 좀비와도 같은 것이다.

 

 

 

 

2

존 번연이 쓴 대작 천로역정을 읽었다. 크리스천들에겐 성경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선전한다. 읽어 보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한다. 존 번연은 라이센스가 없는 설교자였다. 정식적인 신학수업 과정을 밟지 않았기에 당대의 교권에서 추방을 당한 셈이다. 그 결과는 그는 감옥에서 12년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2년이 그에게 없었다면 과연 그의 작품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순례자인 크리스천’(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이 동행자였던 유순한과 함께 처음 봉착한 위기는 바로 낙담Despond’이라는 이름의 구렁텅이를 만나는 대목이었다. 같이 동행하겠다던 유순한은 이렇게 말한다.

 

길을 떠나자마자 이처럼 험악한 사태에 맞닥뜨린다면 남은 여정이나 목적지에서 겪게 될 일은 더 말해 무엇하겠소? 살아서 이 늪을 빠져나가거든 그 멋지다는 나라에는 댁 혼자 가시꾸려. 난 이쯤에서 관두겠소.”(천로역정, 36-37p)

 

유순한은 그 길로 낙담의 늪을 빠져나와 돌아가 버린다. ‘옹고집은 처음부터 동행하기를 거부했는데, ‘유순한옹고집의 길을 따라 가버린 것이다.

 

낙담이다. 낙심이다. 절망이다. 좌절이다.

우리 인생에 부딪히는 가장 큰 난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가 버틸 의지를 내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바로 낙담이고, 낙심이고, 절망이고, 좌절이 아닐까 싶다. 존 번연이 감옥생활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확신과 믿음에 따라 복음을 설교하다가 갇힌 절망적인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글을 썼다. 위화의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란 책 제목처럼 그의 감옥은 글쓰기의 감옥이 된 셈이다.

    

 

 

3

잭 캔필드는 자신의 저서 내 영혼의 닭고기 스프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은 두려움 저편에 존재한다.”

 

동의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두려움, 절망, 좌절, 낙담, 낙심, 트라우마, 실패감, 열패감 등. 그 모든 것들을 넘지 못한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다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존 번연의 주인공처럼, 낙담의 늪 너머에 멋진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다.

    

  

 

4

솔직히 나는 김창옥의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많이 접했고, 중복된 내용도 많다. 그래서 더 빨리 속도감 있게 책을 읽게 된 지도 모른다. 김창옥은 사연 뒤에 숨지 마세요’(38p) 라는 이야길 한다. 우리의 우여곡절의 사연들 뒤에 우리는 사연이 그림자가 되어 우리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언제쯤 맨홀 뚜껑을 열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내가 늘 애용하고 좋아하는 문구란 걸 여러분들은 아실 것이다)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 댄다. 그 때 우리는 커피 반잔의 힘을 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5

문득 이전에 읽은 헤밍웨이의의 말에서 본 문장이 생각이 난다.

 

˝작가는 우물과 비슷해요. 우물이 마르도록 물을 다 퍼내고 다시 차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습니다.˝(헤밍웨이의의 말, 7p)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종종 글과 글의 소재를 숙성시킨다는 대의명분(?)아래 글쓰기를 미룬다. 글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는가! 하지만 헤밍웨이는 규칙적인 양을 퍼내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예는 존 치버의 생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서튼 플레이스 근교의 아파트로 이사하다. 이후 오년 동안 매일 아침 정장을 차려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가 점심시간까지 글을 썼다.’(1946/34)(기괴한 라디오, 479p)

 

   

 

   

6

우리가 잘 아는 스티븐 킹은 그의 저서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자신이 ‘6년 동안 이 책상에서 썼는데, 당시 나는 술이나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정처 없이 바다 위를 떠도는 배의 선장과도 같았다’(123p)라고 기술한다. 하지만, 그는 그리고 글쓰기도 중단하지 않았다’(122p). 스티븐 킹은 세익스피어, 포크너와 예이츠와 쇼와 유도라 웰티 같은 작가들은 천재이며 거룩한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재능을 갖기는커녕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다. 아니, 대부분의 천재들은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천재들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들은 결국 우연이 빚어낸 괴물에 불과하다고(적어도 어느 정도는) 느낀다.’(172p)

결국 스티븐 킹 자신도 우연이 빚어낸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계속 글을 썼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의 저서에서 <인생론>을 읽어 보면 왜 그가 글쓰기는 절망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308p)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1999724, 산책을 하다가 봉변을 당한다.

 

허파가 함몰됐군.”

가슴에 튜브를 꽂아야 합니다. 스티븐. 약간 좀 아플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319p)

 

그는 5주 후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날 나는 꼬박 1시간 40분 동안 글을 썼다. 스미스의 승합차에 받힌 이후부터 그때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앉아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으며 너무 지쳐서 휠체어에 똑바로 앉아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골반의 통증은 숫제 재앙에 가까웠다. 그리고 처음 500개쯤의 단어를 쓰는 동안 유별나게 힘이 들었다. 마치 난생 처음으로 글을 써보는 것 같았다. 예전에 갖고 있던 글쓰기 요령도 내 머리 속에서 몽땅 사라진 듯했다. 나는 마치 시냇물 속에 비뚤비뚤 놓여 있는 미끄러운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힘없는 노인처럼 낱말 하나하나를 어렵사리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날은 영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기를 가지고, 그리고 이렇게라도 계속하다 보면 곧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버텨낼 뿐이었다.’(330p)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을 이끌고 글을 써가기 시작한 스티븐 킹을 보면서 역시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커피 반잔의 힘을 안 인물이었다.

 

    

 

7

글쓰기의 목적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데이트 상대를 구하거나 잠자리 파트너를 만나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글쓰기는 마술과 같다. 창조적인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생명수와 같다. 이 물은 공짜다. 그러니 마음껏 마셔도 좋다. 부디 실컷 마시고 허전한 속을 채우시기를.’(332p)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는 말은 그의 삶에서 녹아내린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쓰기는 헤밍웨이처럼 매일 물을 퍼내고, 존 치버처럼 매일 지하실로 내려가는 일처럼, 스티븐 킹도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뮤즈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가 여러분의 집필실에 너울너울 날아들어 여러분의 타자기나 컴퓨터에 창작을 도와주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주는 일은 절대로 없다. 뮤즈는 땅에서 지낸다. 그는 지하실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러분이 뮤즈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간 김에 그의 거처를 잘 마련해 줘야 한다. 다시 말해서 찡찡거리는 힘겨운 노동은 모두 여러분의 몫이라는 것이다.’(175p)

 

글쓰기의 고전古典이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의 저서는 읽지 못하신 분이라면 추천한다. 왜 그 책이 고전인지 느낄 수 있다. 작가들이 다들 그렇지만, 유쾌한 재미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책의 <이력서>란 chapter에선 자기 이야기를 줄기차게 하고 있는데, ‘이 사람 괴짜 아니야? 마약과 알코올 중독자이기도 하고...’ 뭐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8

이 글을 읽고 있는 알라디너라면, 다들 글쓰기가 커피 반잔의 힘’, 커피 반잔의 힘은 글쓰기에서 나온다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 분들일 것이다.

 

 

 

 

9

글쓰기는 절망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스티븐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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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8-25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을 볼 때면 으레 커피 한 잔을 가져와서 마시며 보게 되고,
글을 쓸 때면 으레 커피 한 잔을 가져와서 마시며 쓰게 되고...
커피 한 잔의 힘으로 합니다, 저는...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카알벨루치 2019-08-25 19:00   좋아요 1 | URL
페크님은 커피반잔의 힘을 아시기에 반잔을 더한 한잔의 힘으로 글을 쓰신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ㅎㅎㅎ 잘 지내시죠? 인제 가을입니다 감기조심하소서 조약한 글에 댓글 감사 드립니다 ^^

cyrus 2019-08-26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글을 쓸 때 하리보 젤리를 먹어요. 껌을 씹으면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입에 무언가를 씹으면 글 쓰는 일에 몰입이 잘 돼요. ^^

카알벨루치 2019-08-26 08:39   좋아요 0 | URL
우리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를 드신다는 말씀 ㅎㅎ집중력과 몰입을 위해 소도구를 애용하는 사이러스님은 엄연히 꾼이시군요 독서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