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아픔을 맛보지 못해서 그래. 조앤 롤링을 봐. 극한 고통의 나뭇가지 끝에 열매가 열리잖아. 네가 느끼는 갑갑함은 아직은 사치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야말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지혜는 확신에 차 그렇게 말하곤 했다. 현실적 고통 없는 지루함. 그래서 인형 작업에도 이렇게 진척이 없는 걸까? 나른한 한 나절,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시든 난꽃의 대궁을 잘라봐도, 더께 낀 창틀을 닦아 봐도, 한껏 미뤄둔 작업대에 앉아 봐도 갑갑함은 언제나 친구처럼 가까이 있었다. 어쩌다 손재주는 있어, 종이 인형을 만들기는 하지만 죽도록 다 하는 열정이 아니었으므로 완전한 프로가 되기도 힘들었다. 허영일 뿐이었다. 뭔가를 부여잡고 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픈 허욕의 뿌리이자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었다.
(…)
아무리 자식이라도 너무 엎어지진 마. 무릇, 관계는 담백하고 부담이 없어야 오래간다. 부모 자식 간인들 다르겠니.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있잖아. 고슴도치가 제 날카로운 털은 생각하지 않고 사랑스럽다고 서로 가까이 가 봐. 생채기만 나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갈 수 있어. 독사 스무 마리 쯤 길들이는 마음으로 견뎌내야 해. 즐기는 날보다 치욕을 견디는 날이 많은 이유가 뭐겠니. 갈망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가. 누군가 말했잖아. 타인이야말로 진정한 감옥이라고. 가족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니? 사무침이 없으면 원망도 없잖아. 누가 뭐래도 그 말은 진리야. 지혜에게 횡설수설 떠들어댔지만 그것들은 모두 여자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왼손엔 달강꽃」 229-230, 241,242 p)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다른 말로, 모든 지속되는 관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인연이란 것이 남아 있다면 단연 알라딘일 것이다. 중학 시절, 멋 모르고 책과 사랑에 빠져 모자란 글로 생각을 써내려가고 남들이 SNS를 하듯 서재를 휘젓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댓글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던 이 공간. 수 년을 함께 하며 수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고 과분하게도 선물까지 받아왔다. 글을 배우겠노라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게 한 기반이자 이유 중 하나가 이곳이었을 정도니,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대학에 올라 다른 인간 관계가 중첩되고,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다보니 자연히 발길이 뜸해졌다. 그즈음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대학 방송국 활동을 하며 글과는 무관한 생활에 시간을 주로 들였다. 띄엄띄엄 쓰던 일기마저도 완전히 쓰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서재 활동도 함께 그만두었다.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리적인 것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와 이별을 맞게 되듯, 그런 이별이 속절없이 있듯이 나는 이곳과 멀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이상 조용하고 감상적이던 문학 청년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글을 지우고 난 나, 나의 삶은 아름다울 리 없었다. 어떠한 흔들림도, 마음속 울림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제를 위한 글, 독서만으로 할당량을 채우듯 읽고 썼을 뿐이었다. 한 번 놓으니 다시 끈을 잡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나태해졌고, 무덤덤해졌으며, 감정에 무관심해졌다. 비극의 파편 같은 순간이 찾아와도, 다리가 휘청거리는 무게가 덮쳐와도 나는 펜을 들지 않았다. 노력없이, 고통없이 그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덮어버렸다. 그렇게 남들처럼, 요즘 세대의 시류에 편승한 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는 버스 안의 승객이 된 채, 그렇게 흘러갔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작정 교육 봉사를 신청하고, 동아리 활동과 공모전에 열중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나 열정, 마음 없이 흘러가듯 그렇게. 스스로도 이런 활동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주 그런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당장의 피로가 더 무거웠으므로, 앞으로 삶의 방향보다 내일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더 급하고 어려워보였으므로 나는 무시했다. 자각과 성찰을 거부했다. 그런 나를 이 책은 꾸짖었다. 아무 감정 없이, 성찰도 없이, 급급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라고. 너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는 하루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래, 어쩌면 이 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인연을 잊고 살던 나에게, 글의 의미와 하루의 가치를 무시하며 흘려보낸 나에게 질책처럼, 계언처럼, 그리고 계시처럼 울려 왔다. 감사히 책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다. 한강을 너무도 좋아하는 내게 혹 맞지 않을까 염려하시던 마음이 남아 더 애틋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에 앉아서,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읽어내려간 소설은 재미있었다. 한 편 한 편의 기록을 모아 리뷰를 쓸까 하다, 이 마음은 리뷰로 남기면 안 될 것 같아 페이퍼를 쓰게 됐다.
이 소설들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작가의 시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인간이라는 범주, 넓게는 종족을 결코 예단하지 않는 작가의 염세적이라 할 만한 시선을. 우리가 사람들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곧 보통 혹은 평범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이데아적 형상, 표상이 인간 전체를 대표한다. 그것은 아주 건강하고 이상적인 형체다.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오류라는 사실은 역설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이 사회적으로 만연한 통념을 작가는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파고든다. 옷이 젖어가듯 조용히 인간 무리에 스미어든다. 그 안에서 객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 하나하나를 일일히 만져본다.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등을 쓸어보고,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렇게 작가는 발견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지점을. '보통'이라 칭해지는 이들이 넘겨짚고 지나치기 쉬운 그 지점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묵묵히 숨기고 살아가던, 입밖으로 꺼내기 민망하고 또 추레하여 속으로 참고 참았던 결점을. 통점처럼 진피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자꾸만 우리의 볼을 붉히던 부끄러운 그 통각을. 그것이 어떻게 발화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집요하고도 무덤하게 뒤쫓는다. 이 건조한 시선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마치 인간 모두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상과 생각을 모두 파악당한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된다. 소설들에서 사회의 어긋난 지점, 일반적이지 않은 부분 혹은 추악한 지점은 주로 객체이고 누군가 그것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인다. 관찰자는 단어 그대로 관조적인 시각만을 가진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단지 조금의 짜증과 본능만을 가진 채. 자연히 우리도 이 사회의 틈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렇게 인도되는 것이다. 주변의 사건을 바라보듯, 벌어진 틈새로 자행되는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이다. 내가 저 주인공은 아니었는지, 객체로서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어떤 위치이든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여전히 우리는 내키지 않는 섹스를 하고, 실행될 수 없는 가정만을 하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 냉정하고 또 염세적인 시선으로 작가는 사회를 통찰한다.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축복일 것이다. 달빛 같은 축복의 빛살 아래서 따스하게 한 겨울 보낸다.
저번 주말은 가족이 총출동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할아버지 팔순을 기념한 가족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많아 번잡스럽고 정신 없었지만 이렇게 다같이 모여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것, 다투지 않고 마음을 모아 시간을 보낸다는 것, 참으로 행복하고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이 더 커 보였지만 할아버지도 재밌어하셨고. 나의 현재와 과거를 곱씹어보면 인간 관계만은 참으로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만 내 곁에 있어왔고, 또 그들이 곁에 남아주었기 때문이다. 이곳 알라딘도 언제까지고 내 서재 한 켠 차지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힘들 때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대나무숲.
그렇게, 인연이라는 것은 쌓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