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선(The way he looks, 2014)'_다니엘 리베이로 作 


  여름이 끝나가는 오후, 창문으로 햇볕이 밀려온다. 방 안 가득 벨 앤 세바스찬의 건반 소리가 울린다. 명랑한 연주에 맞춰 몸을 일으킨다. 온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팔을 젓고 고개를 까닥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나른한 공기에 몸을 맡긴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두드리다가도 문득 일어나 마주 선다. 서로 어깨를 맞잡고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상체를 흔든다.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호흡을 맞춘다. 눈부시게 노란 햇빛이 사이의 공간을 메운다. 싱그러운 웃음이 따스한 기류를 타고 전달된다. 한 발, 한 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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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서서히 피어난다. 꽃잎이 벌어져 만개하는 속도만큼,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시간만큼 느리고 조용하게 색을 입는다. 이제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무심코 넘어간 수많은 사건들은 켜켜이 쌓여 마음의 뼈대를 이룬다. 가령 이런 시가 있다. “너와 나와는 / 그 무심한 스침이 빚어놓은 / 순간의 꽃이기 때문이다 (복효근, ‘순간의 꽃’ 中)” 눈이 마주치는 찰나, 짧은 대화에서 전해온 목소리의 공명, 우연히 스친 옷깃에서 전해지는 옅은 비누 향. 무심히 스쳐가는 사소한 만남, 예사로운 순간들은 몰래 숨어들어 피부 아래 스민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 마음을 피워낸다.

  언제부터 너를 좋아하게 되었지? 되짚어보면 명징하게 떠오르는 장면도, 뚜렷한 계기가 되었던 순간도 없다. 그저 어느 밤, 문득 깨달았을 뿐이다. 창문턱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쫓다가, 친구에게 전화로 무엇인가 하소연을 늘어놓다, 그러다 발견한다. 선연한 빛으로 구석진 데 피어 있는 그 마음을. 그 순간 꽃은 머금고 있던 씨앗을 한껏 터뜨린다. 혈관을 타고 퍼져나간 씨앗은 가슴 언저리를 지나 손끝까지 자리를 잡고 움을 틔운다. 마음은 서서히 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급격하게 몸 전체를 장악한다. 가령 이런 구절.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한강, 「파란 돌」 中)


  레오가 피어난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그것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음을 경작하고 씨앗을 심은 것은 역시 무심하고 무수한 스침이었다. 앞뒤로 앉게 된 우연과 지우개를 빌린 기회로 물꼬를 튼 관계는 시간에 빗금을 그으며 만남을 쌓았다. 시각장애인과 전학생, 달리 발붙일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절로 가까워졌다. 별이 서로에게 빛을 향해 별자리를 만들 듯, 나무가 서로에게 뿌리를 뻗어 숲을 형성하듯 둘의 결핍과 공허는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 그 위에 핀 순간의 꽃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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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이 보이지 않는 레오는 맹목적인 연민과 배려를 원하지 않았다. 가시거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염증을 느끼고 화를 내기도 한다. 다만 원하는 것은 보호도, 자기를 완전히 지탱할 기둥도 아닌 적당한 방임과 자유의지였다. 자기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자기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오랜 단짝 지오바나가 아닌 어수룩하고 낯선 가브리엘에게 마음의 터를 내어놓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진정 레오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앉아 있는 것이 싫어 의자를 뒤로 젖혀 위태롭게 버티는 것을 좋아하는, 때로 턱에 걸려 넘어지는 위험마저도 겪어보고 싶은, 외국으로 멀리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당찬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은 넌지시 다가와 레오의 문을 두드린다. 보지 못하는 레오를 영화관에 데려가 직접 내용을 설명해주고, 레오의 권유에 못 이겨 점자를 배운다. 음악을 틀고 춤추는 법을 알려준다. 마침내는 두 사람,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월식을 보러간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가브리엘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레오는 가브리엘을 본다. 밤은 차갑고 마음은 깊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자기에게도 피어 있던 군락을. 막을 수 없는 개화(開花)의 연속을.

  그러나 매화의 향기가 결코 지독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 마음도 고약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더 풋풋해진다. 늦은 밤 무턱대고 입술을 갖다 대고는 한동안 말을 붙이지 못하는 쑥스러움, 벗어 놓은 옷가지의 냄새를 맡으며 수음하는 내밀한 흥분,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옷을 벗을 때 고개를 돌리는 존중. 너무도 깨끗한 빛으로, 순수한 열망으로 두 꽃무리는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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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왜 몰랐던가 /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 사랑이라는 것을 (이정하, ‘꽃잎의 사랑’ 中)

  사랑은 서서히 피어난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꽃이 걸어온 길에 한 아름 쌓여 있다. 더는 휘청거릴 것이 없는 때, 뒤로 걸으며 시든 잎을 주워본다. 각인처럼 남아 있는 그의 시선을 손결로 쓸어본다. 이 밤도 무심히 스쳐 보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1827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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