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발전은 추악함을 만들어내는 원흉이다.
written by oscar wilde
오늘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이기(利器) 중 최고인 지하철을 탔다.
무더운 날씨에도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지. 속도 빠르지. 게다가 시간 철저히 지키지
정말 지하철만한 게 없지 싶었다.
짜증이 함박눈처럼 폭폭 쌓여가는 더위에,
지하철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은 나에게 외려 유쾌한 기분마저 안겨 주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 내 앞에 앉자마자 기분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난 최근의 패션trend 같은 것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지켜야할 최소한의 에티켓엔 관심이 무지 많다.
무릎 위 15센티는 올라갔을법한 짧은 short pants를 입은 채,
다리를 벌리고 앉아
형형색색 빛나는 얄궂은 쪼리에 맨발을 꼼지락거리며,
땀에 흠뻑 젖음직한 running shirts를 입고 연신 부채질 하고 있는,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쪼리는 슬리퍼라네. 슬리퍼는 실내에서 신는 것이야.
야외에서 굳이 신어야 한다면 해변이나 강가에서 신을 것이지.
도심 한복판에서 쪼리라니?
그리고
런닝은 말 그대로 운동할 때, 특히 달릴 때 땀을 흡수하기 위해 입는 속옷이라네.
그건 겉옷이 아니야. outer가 아니란 말일세.
자네의 땀방울이 송송 맺혀있는 겨드랑이 좀 가려줄 수 없겠나?
거뭇한 겨드랑이를 다 드러낸 채 부채질을 할 정도로 덥다면
차라리 왁스를 덕지덕지 쳐 바른 그 긴 머리나 짤라보지 그래?
한결 더 시원할 텐데...
예부터 멋은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데 있었다.
옷의 시초는 보온이 아니라 치장에 있었으며,
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데 있었다.
지금도 열대우림의 원시부족을 지켜보라.
그들은 전혀 옷을 입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신이나 장신구로 자신의 몸을 가린다.
멋은 그렇게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했다.
진정한 멋은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데 있다.
(다음의 사진은 거리의 멋진 일반인들을 찍은 것입니다)
파나마 모자에 블루셔츠, 그리고 셔츠에 색상을 맞춘 포켓스퀘어
그리고 깔끔한 베이지색 린넨 자켓.
이렇게 겹쳐입어도 시원해 보이면서 멋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버건디 색상의 스웨이드 슈즈. 자세히 보면 포켓 스퀘어와 안경을 구두 색상에 맞추신
그리고 브이 존에 떡하니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린 색상의 넥타이
보색대비닷! 미술시간에 배운 ㅋㅋㅋ
헐! 그저 배울게 너무나 많은...쿨한 네이비 자켓에 면바지
거기에 브라운 색상의 멋들어진 몽크 스트랩 슈즈. 지존이십니다.
전형적인 american traditional
앗! 대저 노익장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전혀 신경을 안 쓴 듯한 자연스러움이 녹아드는 진정한 일상의 멋을 보여주신 할아버지
더워서 양말이 신기 싫으면 쪼리를 신지말고 저렇게 슬립 온을 신으란 말이닷!
페도라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할아버지
기어도 안 달린 구식 자전거를 타고도 이런 포스라면... 쩝!
classic복식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탑재가 전혀 안되어 있는,
몇 몇 스타일리스트라는 작자들이 tv에 등장하면서부터 요상한 것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피케셔츠에 넥타이를 매질 않나. 포멀 슈트에 로퍼나 스니커즈를 신기지 않나. 재킷에 후드 티를 겹쳐있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풍습이냐고?
복식에 대한 아무런 진지한 연구도 없이, 연예인이나 모델들에게 지들 쪼대로 아무렇게나 쳐 입혀 놓구선, 개성 왈왈하는 꼴이라니. 더 웃긴 건 저번에 m-net보니까 지들 꼬라지는 더 지랄같으면서 지나가는 멀쩡한 사람 붙잡고, 이렇게 입으면 안된다는 둥, 촌스럽다는 둥 지껄여 대더라.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무례하더군.
개인적으로 재즈 연주가들 중에서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는 라산 할아버지
시각 장애인이었으면서도 어떻게 저런 스타일을 소화해 내었는지
두눈 멀쩡히 뜨고도 저런 멋을 못 부리는 나는 대체 어떤 인간인겨! ㅠㅠ
마지막 결론: 더워도 옷 좀 입고 다니자.
동네 아저씨들이 란닝꾸에 딸딸이 신고 다니면 꼭 욕하는 것들이
니네들은 왜 그러고 다니냐? 걸칠 건 좀 걸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