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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의 가문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역사는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새로이 해석되어지기 마련이다.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기존의 역사적 지식이 아닌 무수한 사료의 파편 속에서 새로이 구성되고, 해석된 창조된 역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시바 료타로의 패왕의 가문은 이러한 역사소설의 특유의 재미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패왕의 가문은 오닌의 난 이후 계속 된 봉건 다이묘들간의 암투와 빈번한 국지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근 270여 년간 일본의 평화시대를 안착시킨 에도 막부의 창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죽어서는 신으로 추앙되었고, 270여 년간 일본의 사상과 문화, 윤리를 사실상 지배한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한마디로 미카와 촌뜨기로 보고 있다. 미카와라는 지역은 네덜란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문물을 급속히 흡수하고 있던 노부나가의 오와리와는 달리 중세 봉건적 농민사회의 성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촌놈들이 살던 동네라고 할 수 있겠다. 어려서부터 약한 국력 탓에 오와리의 오다, 슨푸의 이마가와 등 세력이 강한 다이묘들의 인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에야스가 내일을 기약할 수 조차 없었던 극도의 난세 속에서 결국 천하인에 오를 수 있었던 단 한가지의 장점이 바로 똘똘 뭉쳐진 촌놈 근성이라는 것이다.

 

도쿠가와의 아는 바로 미카와의 촌놈 근성이란 것이었고, 그의 삶은 아가 아닌 비아와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시바 료타로는 미카와를 이렇게 기술한다. 강렬한 갯내음과 싱싱한 풀내음이 열기 속에서 코를 찌른다. 길섶에 늘어서서 이에야스를 향해 고개 숙인 영민들의 장대한 기골하며 검은 살갗, 이를 드러내 웃는 모습도 스루가 사람들처럼 그리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얼굴이건 이에야스를 올려다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소리를 지를 듯 넘치는 감동과 슬픔을 억누르는 그들을 보고 이에야스는 이 땅에 오로지 이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가혹한 난세 속에서 정세에 따라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던 다른 전국시대의 영주민들과는 달리, 미카와는 끈끈한 주종관계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심과 음습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일본 전국시대는 수많은 다이묘들이 이해득실과 정세에 따라 합종, 연횡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하극상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도 꿋꿋이 중세 봉건적 질서를 지키며, 토속적이며, 소박한 정토종 신앙에 따라 생활했던 사람이 이에야스였고, 그 기반의 중심에 미카와의 민초들이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이다. 사실상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종식시키고, 새로이 근세를 열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측근의 암살로 인해 황망히 주저앉고 말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유산을 뒤이어 받은 이가 우리에게 임진왜란(임진전쟁)으로 잘 알려진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굳건한 신분사회를 유지되었다면, 그리고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지 않았더라면 절대 다이묘가 될 수 없었던 비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노부나가는 중세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 인물이다. 능력이 있다면 신분여하를 막론하지 않고 중용함으로써 신분질서를 붕괴해 버렸고, 히에이잔, 이시야마 본원사를 비롯한 사원세력의 토벌로 중세 신앙적 질서와도 이별하였다. 기존의 다이묘들이 농업경제에 기반하였다면, 노부나가는 자유로운 유통질서의 확립과 관세철폐를 비롯한 적극적 상업경제에 바탕을 두었다.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호족 중심의 농민병이 아닌 전쟁과 치안만을 담당할 수 있었던 상비군을 둠으로써, 병농분리와 함께 계절과 수확에 상관없이 항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해 두었다. 노부나가만이 이 비범한 계획의 입안자였고, 실행자였다. 노부나가의 사후, 정권을 장악한 히데요시에게는 굳건한 기초가 없었고, 노부나가의 시스템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행할 역량 또한 부족했다. 그에게는 중세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창립하고 수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다이묘들을 설득시키고 위협하는데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을 이해시키고자 시바 료타로는 패왕의 가문의 마지막 전투를 세키가하라가 아닌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로 한정하였다. 아마도 노부나가의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한 자들이지만, 그래도 비범했던 두 사람의 전투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중세의 연공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임진왜란(임진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히데요시와 중세 봉건적 질서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에야스와의 전투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체성을 매우 잘 드러내어 준다. 

 

이에야스의 정체성은 중세 봉건적 질서의 완성, 지속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승리자였다. 천하인이 된 이후로 그는 가신단에게는 녹봉의 원천이 되는 영지를 제한하였고, 굴복한 다이묘들에게는 광대한 영지를 주는 대신, 정치적 입지를 제한하였다. 히데요시가 그 연공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해 가신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제공하고자 임진전쟁을 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에야스는 그 연공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그 미묘한 균형을 잘 이루어 놓았다. 그것이 이에야스의 천하였고, 그 천하의 중심에는 미카와 근성이 있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상업경제가 아닌 질박한 농업경제와 철저한 신분, 연공적 질서를 완성함으로써 260여년간 일본의 평화를 이루어 내었다. 이에야스의 천하는 미카와의 확대였고, 그 과정에서 미카와적인 것과 어울리는 것은 철저히 모방하고, 습득했다. 오랜 시간 노부나가와의 혈맹관계 속에서도 노부나가의 전술이나 모략, 상업경제는 철저히 배제 하였고, 오히려 그에게 가장 큰 패배를 안겼던 다케다 신겐의 전술과 모략을 배워나갔다. 그에게 노부나가는 非我였고, 신겐은 我였다. 어떤 의미에선 이에야스는 신겐에게서 그의 미래를 보았다 라 하겠다.

 

역사만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라는 언명을 진리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에야스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비로소 그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노부나가의 천재성도, 히데요시의 호방함도 갖추지 못했지만 시바 료타로가 그를 패왕으로 일컫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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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구들방을 데우다 - 서양식 벽난로와 전통 구들의 만남
이화종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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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봐야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중에서

 

언제나 살아오면서 난 리얼(real)을 부러워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체험이 아닌 책이나 비주얼 매체를 통해 얻은 버츄얼(virtual)한 것이다. 즉 난 입만 살은 놈이란 뜻이다. 무언가 많이 알고 있는 양 해도 실제로 해보라면 서툴기 짝이 없고, 제대로 해낼 수도 없었다.

리얼과 버추얼의 차이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난 몸으로 새겨진 지식만이 참 지식이다라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런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최근에 시골에 집을 짓고 가끔씩 생활하면서 귀농, 귀촌에 대한 낭만적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 막연히 공기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안빈낙도적인 삶을 상상해 오던 난, 때때로 모기와 벌레들에 시달리고, 뙤약볕아래서 풀을 베느라 몸살을 앓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땀에 눈에 염증이 생기는 등 온갖 리얼리스틱한 일을 겪으면서, 루카치가 말한 낭만적 시대는 리얼이 아니라고 확고히 느꼈다.

 

"벽난로, 구들방을 데우다" 그런 낭만적 시대를 찬양하는 책이 아닌 풀과 벌레와 흙을 실로 만지며 살아야 하는 불편함에 대해 진솔히 얘기한다는 점에서 리얼한 책이다. 귀농이든 귀촌이든 혹은 이따금 들려서 귀농인인 척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리얼한 삶을 얘기한다. 구들방에 산다는 것은 그저 몸을 뉘는 공간의 변화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해준다.

구들방과 벽난로의 장점을 취할려면, 그것에 우선하는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하고 이를 즐길줄 아는 태도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구들방을 만드는 기술보다는 오히려 책의 절반을 소박한 삶에 대한 철학을 얘기하는데 더 할애했다.

 

난 건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앞부분의 도면을 한참을 들여다보고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독자인 내가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첨단 주택에 살면서도 토목기초공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감을 전혀 잡을 수가 없었다. 책에 첨부된 동영상을 여러번 봤지만, 어디까지나 버추얼이어서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책을 읽고서 저자를 만나서 도제처럼 구들방 놓는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작은 쥐나 새도 스스로 살 곳을 스스로 지으며 살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 뽐내며 사는 우리들은 자기 살 집 도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니 새삼 나의 헛지식이 우습게 보였다.

 

다만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나같은 문외한이 보기에 보다 체계적으로 구들장 공사의 세부적인 디테일이 설명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사진 자료가 부족해 구들장 공사의 전체 공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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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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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사람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Written by Nietzsche 선악의 저편 중에서


술에 잔뜩 취한 어느 날 밤, 솔랑카 교수는 사랑하는 가족의 앞에 선다.

한 손에는 식칼을 든 채,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살의(殺意)로 똘똘 뭉쳐진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곧이어 벌어질 잔혹한 살인과 폭력 앞에서 그저 무방비로 잠들어 있는 그들, 그 넘치는 살의로부터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선 무작정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 분노한 사나이가 되었다.....


지독스레 시시한 거짓말이다.

 

살만 루슈디가 약발이라곤 전혀 듣지 않았던 호메이니의 암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해 진 뒤 최근에 내놓은 이번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한 거짓말만을 내뱉을 뿐이다. 죽음의 문 턱 앞까지 가 본 작가들을 찾아보자면 사실 꽤 많이 있는데, 사형집행 직전에 가까스로 사면된 도스토예프스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했었던 레마르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참호 속에서 톨스토이를 읽었던 비트겐슈타인,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들었던 빅터 프랭클, 2차 세계대전 중 군용기 조종사로 종군했었던 생텍쥐페리 등등 수없이 많다.


그들이 제 일선에서 죽음과 맞닥뜨린 대표적인 사람들이라면, 살만 루슈디는 소설 속 솔랑카 교수처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안락한 복층식 임대 아파트에서 TV를 통해  죽음을 감상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차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살만 루슈디의 ‘분노’ 를 낳았다. 전자가 표면부터 밑바닥까지 영혼을 울리는 진실 그 자체라면,  후자는 진실을 가장한 허풍이요, 엄살에 불과하다.


솔랑카 교수가 ‘사랑했다고 가장했었던’ 가족의 곁을 황급히 떠난 건 사실 살의 때문이 아니요, 그저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조한 인형 ‘리틀 브레인’이 매스 미디어의 강력한 세례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의 손 안을 벗어나자 그는 리틀 브레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감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의 분노의 정체는 자신의 창조물인 리틀 브레인이 창조주인 자신을 벗어나, 오히려 그 자신이 창조물에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며 또한 그 상황을 역전시킬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력감이 바로 권태이며, 권태가 바로 분노로 표출된 것뿐이었다.


그런 시시하기 짝이 없는 분노였기에 그 해소 또한 시시하기 그지없다. 밀라 마일로의 조언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형 ‘퍼핏 킹’을 제작하면서부터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살의에까지 이르렀던 끔찍했던 분노는 어느새 사그라지기 시작하며, 친구의 애인이었던 아름다운 미녀 ‘닐라’를 소유하면서 그 분노는 어이없이 해소되어 버린다.

 

500페이지가 넘는 시시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살만 루슈디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그 500페이지가 넘는 분노의 정체는 말이다.

 

살만 루슈디의 분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상의 ‘권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눈동자)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몹시 바쁘다)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자의식 과잉! 이것만큼 이 소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평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일은 그 거짓말들이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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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7-04-03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파괴하려고 했었죠. ^^ 사필귀정이랄까...

2007-04-09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 2007-04-10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오타수정에 감사드립니다.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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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까칠한 가족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스스로 자조해본다.

너무나도 평범해야 할 것이 어느덧 아주 특별한 것이 되어버린 암울한 현실과 함께 말이다. 작가는 서문에서 조반니노 가족은 특별한 것이 없는 수백만 "평범한"가족 들 중 하나이며, 평범하고 진실된 사람들,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과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노라고 밝히고 있다.

평범(平凡)!  뛰어나거나 색다른 것이 없는...

솔직히 고백하건데, 난 "까칠한 가족"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평범하다고 가정하고서(난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래서 나와 조반니노가 크게 다르지 않고, 나의 가족과 조반니노의 가족이 색다를게 전혀 없는, 말 그대로 평범이라는 범주하에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삶이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만을 담고 있었다면,  이 책이 이처럼 재미있을 수 있었을까?

"일상다반사"라는 말이 있다. 항상 있어서 이상하거나 신통할 것이 없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 

일상이란 권태로우며, 따분한 것이지. 결코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다고 가정되어지는 내가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읽으며, 재미를 느낀다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내가 평범하지 않거나 조반니노의 가족이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1954년에 출판된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담고 있는 재미없는 이 책이 반세기를 지나면서, 그때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아주 재미난 책으로 탈바꿈 했던지, 가능성은 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책은 까칠한 가족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실상은 아주 사랑스러워 파괴하고 싶은 욕망까지 느낄정도의 아주 닭살돋는 잔인한 가족이다. 그들의 삶에서 느끼는 이런  내 욕망의 근저에는 질투와 질시, 부러움이 자리잡고 있다.

조반니노 가족의 삶에는 대화가 있다.

일상어가 아닌 진실한 대화. 사람과 사람사이에 마땅히 주고 받아야할 관계의 진실성 말이다.

밥먹었냐는 둥, 오늘 뭐했냐 둥의 일상어가 아닌 가족의 구성원으로써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에 관한 솔직한 대화가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평범함이 아닌 특별함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리라. 바라건대, 그들의 가족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는 상실감이 나 하나 뿐만이 아니기를 진실로 바란다. 그렇지 않다면 나와 우리 가족은 상당히 심각할 정도로 비틀려 있는 것이 분명할 테니까 말이다.

바쁜 일상속에서 얼굴 마주칠 기회조차 흔하지 않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이 다르며,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각자의 관심사가 틀리며, 그렇기에 서로 느끼는 감정도 다르다. 그것이 내 가족의 모습이다.  

밀란 쿤데라의 단편소설에서 여자사냥을 영원한 욕망의 황금사과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았다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까칠한 가족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이 상실감은 영원한 그리움의 황금사과라고 부르는게 더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전혀 의도치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던, 하지만 어느새 사라져 버린 가족간의 진실한 대화를 그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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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7-01-1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사이신님 심경의 변화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자리입니다.
 
러브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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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은 사람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죠.

난 지금 블루스(The Blues)를 말하는 겁니다.

혼자 앉아서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그런 슬픔 말이에요.

블루스는 그런 슬픔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블루스입니다.


Written by Son House(델타블루스의 전설적 가수)


토니 모리슨의 Love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난 절로 탄성을 질렀다.


“아! 이건 정말 완전 깜둥이들이 부르는 블루스 그 자체네. 진짜 블루스는 바로 이런 거야.”


블루스라는 건 그저 음악의 한 형식이 아니다. “블루 노트(Blue Note)”와 12마디 코드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블루스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블루스는 삶이 고통으로 가득하여, 흐느끼듯 노래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삶을 가까스로 인내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음악이 바로 블루스다.


즉 단 한마디로 말하자면,


삶에 아무런 걱정거리 없는 사람에게는 블루스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토니 모리슨의 “Love"는 전형적인 블루스 형식이 그대로 녹아있는 소설이다. 우선 AAB라는 블루스의 전형적인 3부 형식을 빌려 서사를 진행시켜 나간다는 점과, 주제 또한 매우 블루스적이라는 점(대부분의 블루스는 사랑하는 남녀를 그리고 있으며, 가끔은 수세기간의 걸쳐 붕괴된 흑인 가족 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열정을 그 가사에 담고 있다.)에서 더욱 그러하다.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중심인물은 크리스틴과 히드, 그리고 주니어인데, 이 세 인물은 같은 주제 선율을 가지고 있다. 우선 흑인 여성이라는 점과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공통적인 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크리스틴과 히드는 어린 시절 절친한 친구사이로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으나  “윌리엄 코지”라는 그녀들이 일찌기 갖지 못했던 부성(父性)을 만나게 되면서, 서로를 격렬히 증오하게 되는 사이로 변모하게 된다. 하지만 두사람 모두 간절히 갈구했던 부성의 대상이었던 윌리엄 코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아버지를 철저히 증오하는 인물이다.


윌리엄 코지는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난 우리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네. 성탄절에 돌아가셨는데, 우리 아버지 장례식은 온 세상이 주는 선물 같았지.” -p.176-177발췌


크리스틴과 히드가 평생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면,(크리스틴은 또 다른 부성애의 대상이었던 닥터 리오를 만나지만, 그로부터 잔인한 버림을 받게 된다. 또한 히드는 남편인 코지를 항상 “파파”라고 부른다.) 주니어는 두 여성과는 조금 다른 존재이다. 그녀 또한 미혼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부성애를 겪어보지 못한 인물이지만, 그녀의 시선은 아버지에게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대등한 대상인 <남성> 로멘 에게 머문다. 그녀와 대등하지만 때로는 미숙하기까지한 그에게서 사랑을 느끼며, 비로소 상처의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토니 모리슨!

 

어쩌면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AAB라는 블루스의 3부 형식이 흑인 여성 작가인 그녀에 의해 이처럼 멋지게 체화되었고, 사랑과 증오, 그리고 용서와 치유라는 블루스의 진정한 가치가 소설이란 또다른 이름으로 여기에 구현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앞에서처럼 난 진정 그녀에게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블루스의 시작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시작한다는 말처럼, 소설 Love도 우리의 가슴에서 시작되어 가슴에서 끝이 난다. 냉철한 이성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머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뜨거운 피와 심장이 가득한 가슴의 이야기이다. 바로 진한 블루스처럼!


삶이 외롭고 괴로우세요?


ASK THE BLUES!(블루스에게 물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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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11-12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지금 읽고 있거든요. 님의 리뷰가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리뷰 자체만으로도 퍽 좋은 글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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