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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보다도 오래된 낡은 책을 뒤졌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하고, 왠지 구색도 전혀 맞지 않는 낡은 장정의 책 한권을…….




그 책엔 500원이라는 믿기 힘든 가격표와 한땐 내 나이였음직한 나이든 청년이 서 있었다.

당시엔 선홍색이 분명했을 빨간 잉크의 만년필로 적어놓은 낯선 글씨체…….

여기저기 줄도 그어놓았고, 맘에 드는 구절은 책장의 하얀 여백에 빼곡 적어놓았다.




지금의 당신이 아닌 1971년 당시의 당신을 지금 뵙니다.




-남자와 교제가 없는 여인은 차츰 퇴색한다. 여자와 교제가 없는 남자는 차츰 바보가 된다.




쿠쿡! 당신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슬기롭게 행동하기에는 슬기로움만으로는 부족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한 구절이네요. 전 얼마 전에야 비로소 도스토예프스키의 4대 장편을 겨우 읽었답니다.




-여자는 예술에 매혹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들러리들이 내는 소음에 매혹된다.




하하하! 저보다도 여자에 대해 더 냉소적이신데요? 근데 어떻게 결혼하셨어요?




-결혼하는 것은 두 사람이 모두 그 밖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큿! 정말 위험한 발언인데요. 아무래도 어머니께 고해바치는 편이…….




-죽은 자에게 치욕은 없다. 그러나 지독한 악취를 풍긴다.




네엣. 그냥 모른 척 해드릴께요. ^^:




-암참새에겐, 남편인 수참새의 우는 소리가 짹짹 지저귀는 것이 아니라,

무척 훌륭한 노래인양 들린다.




하하하! 네네 알겠습니다. 확실히 지퍼 채우겠습니다.




-생활에 굶주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은 즉 한잔 하고 싶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포도주를 마셨다.




이번 추석엔 맛난 포도주 사들고 찾아뵐게요. 아버지! 그 때까지 몸 편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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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Su 2007-09-07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버님께서 꽤나 멋지신 감성을 지니셨는데요 :-D

하이드 2007-09-0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미하엘 부르벨의 <앉아있는 악마>네요.
오래간만입니다. 점점 퇴색해가는........ 하이드입니다.

보르헤스 2007-09-0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퇴색이라니요? 여전히 강인한 포스를 뿜고 계시던데요 ^^

구영탄 2007-09-1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별명이 '보르헤스'라 그런가, '경전'(?)을 집필했다 해야하나 '서사시'(?)를 쓰셨다고 해야 하나. 선인(先人)들의 경구와 한자, 라틴어(아니면 개망신)까지 섞여 '가오다시' 확 잡힌 글을 보면서 '풉'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위서가님은 “악즉참(惡卽斬)”을 서슴치 않는 '거짓 선지자'(!!!!)로 등장하셨으니 내가 우려하던 위서가 수난사는 '보르헤스'에 의해 쓰여지는가 보다. 그런데 수난사가 아니라 '조조'처럼 묘사되고 있으니 후일 이학인 같은 사람이 나타나 '위서가판 창천항로'(?)라도 집필하진 않을지, 위서가님도 곤혹스럽겠군.



그토록 조롱하던 '성녀'(聖女)와 '제단'(祭壇)', '제사장'의 존재를 고백하시는데다 위서가란 '이단자'의 '말씀'까지 등장시켜서 그 극적 효과가 더욱 배가되고 있다. 게다가 알라디너들의 지금 모습이 '집성촌'의 안녕을 흔드는'거짓 선지자'에 대항한 '성전'(聖戰)처럼 묘사되어있다. 엽기 함수(?)나 만드는 찌질한 3류 인생인 내 말이 맞을 때가 있구나.
너무 안타까워서 알라디너분들께 '샤를마뉴'가 나타나시길 빌겠습니다. 하지만 존경받는 제사장이신 황빠 마태우스는 아닌거 같네요
http://www.kyobobook.co.kr/booklog/myBooklog.laf?memid=allagri

구영탄 2007-09-11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야오이' 정도는 써주었길 기대했구만. 저 정도 밖에 못 되는군요. x
위서가 | 2007-01-15 15:04:01.813
아, '야오이' 정도는 써주었길 기대했구만. 저 정도 밖에 못 되는군요. x
위서가 | 2007-01-15 15:04:01.813






 

 

사람도, 神도, 그리고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Written by Horatius


나는 내 여가 생활의 대부분을 무용한 것에 쓴다. 지인(知人)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교우관계를 넓혀 인맥을 쌓는다던지, 자신의 커리어(Career)를 개발하고자 각종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닌다던지 하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상당히 유용한 일에 전혀 투자하지 않는다.


다만 하는 일이라고는 짬나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음반을 듣는 것이 고작이다.  내가 교우관계를 넓히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내 자신의 커리어를 관리하는데 아무런 흥미가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관심은 있으되 게으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지금도 후달리며 살고 있는데, 거기다 채찍질까지 해야 되겠느냐? 정도의 속편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채찍질을 당하는 것은 최하층 노예들뿐이었다. 귀족들과 왕들은 내내 게을렀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도 마찬가지요.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걸 염두에 두고 있노라면 더 빨리 소모하고, 더 빨리 죽어 나자빠지라는 채찍질이 곱게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다.


근데 나보다 훨씬 영악하고 품위 놓으신 분들까지 예전에 이런 생각을 다 하고 계셨다는 점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버틀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조르쥬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을 참고 하시면 되겠다.


지금 내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는 것은 그런 유용한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 무용한 것들 때문이다.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들에 내 유용한 가치들을 소모하고 있는데도, 이것들이 내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내게 찬탄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분노케 한다.


온갖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종종 만들곤 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서문에서 이렇게나 솔직히 밝히고 있다.


무용한 사물을 만들어 낸 것에 대한 단 하나의 구실은, 우리가 그것에 강렬히 찬탄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상당히 무용하다.


암! 그렇고말고. 이런 쓸데없는 것에 내 유용한 가치(시간, 돈)를 투자하고 있는데 즐거움이 아닌 분노와 희열이 아닌 짜증이 몰려온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기억력이 차츰 감퇴하고 있는 것을 요즘 느끼기에, 이젠 노트를 하나 마련해 목록을 작성해 두어야 겠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이 분노가 어느덧 퇴색해버려 망각해 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벽에 매달아 놓은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칼날을 벼리던 월왕 구천(句踐)까지는 안 되더라도 말이지.


목록의 맨 위에는 이렇게 적어야지.


1.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작가(두 번 다시 이 분노를 잊지 않도록)


 아멜리 노통브, 파울로 코엘류, 마루야마 겐지, 호어스트 에버스, 요시모토 바나나, 퍼트리샤 콘웰, 제임스 패터슨, 미키 스필레인, 공지영...


2. 이젠 그만 사도 좋을 작가(이젠 약발 다 됐어!)


알랭 드 보통,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 파트리크 쥐스킨트...


3. 긴가민가 (아직은 조금만 더 지켜볼까)


빌헬름 게나찌노, 장 폴 뒤부아, 조너선 사프란 포어, 로버트 실버버그, 수잔 손택, 강유원, 실비 제르멩, 줄리언 반즈,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카슨 매컬러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존 버거, 앤토니어 수잔 바이어트, 파스칼 키냐르, 움베르토 에코, 러브크래프트, 미셸 투르니에,


4. 출판되어서 나오는 대로 다 사자.


곰브로비치, 페터 한트케, 밀란 쿤데라,


예술가에게 혹독한 비평이나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감내해야 할 일이다. 다른 공산품이나 서비스와는 달리 이건 반품내지는 환불이 안 되는 거니깐 말이지. 보고 났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오를 정도로 한심한 작품이었다던 지, 잠이 쏟아질 정도로 지루했다고 해서 반품이나 환불이 가능한 것은 아니지 않나? 각자의 취향의 다름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건 옷이나 다른 상품들도 마찬가지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이건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불공정 거래란 말이지. 선불로 땡겨먹고 나 몰라라 하는 것 아니겠어? 그러니 온갖 혹독한 비난과 비평에도 강인한 인내심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지. 예술가라는 직업은 말이야. 이번 목록은 작가에만 국한했는데 말이지 다음에는 연주자나 공연가 쪽으로도 범위를 넓혀야 겠다. 이건 무용한 것들에 관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아주 유용한 작업으로 남을 듯하다.


ps>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임을 미리 밝혀 두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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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7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울로 코에료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 바나나도 거의 동의. 보통씨는 너무 좋아서 제외. ^^ 나머지 작가들은 제가 많이 접해보지 않은 관계로 보류.

보르헤스 2007-02-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el/ 리스트 다 만드시면 저두 구경가도 되겠죠?
아프락사스/알랭 드 보통 저두 참 좋아했습니다만, 어느때부터인가 늘 같은 얘기만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좋은 꽃노래도 삼세번이면 질린다던가 뭐 그런거죠 ^^:
 



Goya의 dog

Miles Davis의 Blue in Green

 

11월에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를 디시 읽었어. 읽다 마음을 휘잡아 끄는 구절에 줄을 그었지.

 

우리의 옷이 우리를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슬픔을 짊어진 광대들이다.

우리는 상심한 마음을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하는 광대들이다....

1895년 11월 13일, 나는 런던에서 이곳으로 이감되었다. 그 날 2시부터 2시 30분까지

나는 죄수복을 입고 수갑을 찬 채로 클래팜 역의 중앙 플랫폼에 서 있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나는 병동에서 끌려나와야 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렇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괴물 같은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삼십분 동안,

 

나는 조소를 보내는 폭도들에 둘러싸여 잿빛 11월의 비를 맞으며 그곳에 서 있어야 했다.

 

난 언제나 고독과 방랑에 관한 구절이 눈에 띄면 지나치지 못했어.

언제나처럼 고독이란 글자사이에 내 검은 사인펜을 갖다 들이대야 직성이 풀렸지.

난 그렇게 고독을 사랑했어.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 그어놓은 고독에 관한 아포리즘을 몇 가지 적어보면...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의 도피이며, 또 어떤 사람의 고독은 병자들로부터의 도피이다.

 

달아나거라, 나의 친구여. 그대의 고독속으로!

-Nietzsche-

 

나는 반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외롭다.

-Camus-

 

인간은 시회(詩會)속에서 사물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靈感)을 받는 것은 오직 고독 속에서다.

-Goethe-

 

완전한 고독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것은 야수(野獸)나 신 뿐이다.

-Aristoteles-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고독한 인간이다.

-Ibsen-

 

그렇다고 고독이 항상 우울하고 무거운 것만은 아니지.

 

 

 

 

 

이런 것도 있다.

 

남녀간의 섹스는 사실 서로가 상대방의 "마스터베이션"을 도와주는 행위이다.

혼자서 하는 마스터베이션은 아무래도 처량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이성(異性)의 몸을 빌려,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다.

섹스라고 해서 두 몸이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영원한 혼자"이다.

-마광수-

 

재미나지? 아닌가. 난 한동안 아랫배를 움켜지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는데...

다들 각자의 취향이 있으니까 말이지

하긴 프랑소와 모리악은 "우리들 각자는 하나의 사막"라고 말하더군. 맞는 말이것 같어.

흠...

 

꿀꿀한데 꿀꿀한 시 하나 읊어줄까?

 

혼자라는 건 / 최영미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만큼
힘든 노동이란 걸

고개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넘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혼자 살아본 사람만 알 수 있을꺼야. 이 안전한 저녁이란 거 말이지.

혼자 살다보면 다들 한가지씩 병들을 달고 살게 되지. 나같은 경우는 만성 위염이었어.

가끔 혼자인 건 좋지만, 항상 혼자인 것은 권장할만한게 못 돼.

혼자인게 싫다고 무작정 길을 나서서도 안돼.

지금은 11월이야. 특히 밤에는 무지 춥지. 콧물이 나올지도 몰라.

 

다들 무지 외로울꺼야 하지만 힘내.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네

It's all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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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11-08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야 그림 스크롤 내리는데, 가슴이 철렁.
11월의 너덜해진 잿빛수요일에... 남은 목,금,토가 너무 버거운 어느 수요일에...
 

 

" 나였어?" 그녀가 물었다.

환한 뉴욕의 대낮.

"천만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날 선택한 거지?"

"난 당신처럼 마음이 텅 비고 외로웠어. 다른 가능성이 없었던 거야."

그건 내 솔직한 대답이었고 그녀는 안심한 듯 어느새 잠이 들었다.


미하엘 크뤼거의 달빛을 쫓는 사람들 중에서


토요일 4시 32분!  미지의 여인에게서 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0 00 님 댁 맞으시죠?”

“그런데요? 누구신데요?”

“본인이신가요?”

“예! 그런데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고객님! 하나로 통신인데요. 댁 전화기를 KT 쓰시던데...”


마침 포크너의 따분하고도 지루한 “미시시피”얘기에 질려있던 터라, 난 갑자기 장난끼가 동했다.


“아! 하나로 통신이시군요. 일면식 하나 없는 고객에게 이런 친절한 전화를 다 주시고 감사합니다.”

“네? 아... 예, 근데 0 00 댁 맞으신가요?”

“예. 맞습니다. 전화 정말 잘 하신거에요.”

“네? 네.”

 

잠시 침묵..

 

“하나로 통신 인터넷 서비스 잘 쓰시고 계시죠? 그런데 전화도 저희 하나로 통신으로 바꾸시면 여러 혜택이 있습니다...”

“잠시 만요, 전 말이 길면 잘 못 알아듣습니다. 육하원칙 아시죠? 왜 하나로여야만 하는지, 육하원칙에 딱 맞게, 짧게 해주세요. 30초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육하원칙에 맞추어 해주세요. 지금 카운트 들어갑니다.”

“어? 네?”

 

무척이나 당황한 미지의 여인은 잠시 후 수화기를 내려버렸다.

미지의 여인으로부터의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끊어오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낯선 타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불편하다. 침묵은 나에게 그리 불편한 것이 아니지만, 낯선 타자와 함께 마주친 침묵은 정말로 힘겹다. 이 기묘한 침묵은 손가락과 발등을 바삐 만들고, 괜스레 침이 마르는 것이다. 그러다 이 무거움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사람이 먼저 입을 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언제나 five W's and one H중 하나이다.

21세기! 지금 현생인류간의 모든 소통은 five W's and one H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있어서는... 어떨까?


WHEN

        1)언제부터 날 사랑했어?

        2)우리가 언제부터 손을 잡게 되었지?

        3)우리가 처음 키스한 날이 언제야?

WHERE

       1)우리가 처음 만난 곳이 어디인지 기억나?

       2)우리 어디서 만날까?

       3)가장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말해봐. 거기로 가자.

    

WHAT

      1)지난 월요일 우리 뭐했냐. 기억나?

      2)네가 지난번 갖고 싶다고 했던 거. 뭐였냐?

      3)내일 너 뭐할 거야?

WHY

      1)넌 왜 날 사랑하니?

      2)왜 그렇게 화가 난거야? 이유가 뭐야?

      3)날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넌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 그렇지?

WHO

      1)누구야? 지금 방금 네 옆에 있던 사람...

      2)내가 누구랑 있던 넌 상관 하지마! 넌 나한테 딱 그 정도 일 뿐이야.

      3)지금 그 사람은 누구랑 있을까? 과연 우리가 사랑을 했을까...

HOW

      1)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렇게 잔인한 짓을 어떻게 나에게

      2)어떻게 우리 사랑이 끝나버린걸까?

      3)그 사람을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우린 항상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써왔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도...

이젠 그만두어도 되지 않을까. 뭔가를 설명하려 애쓰는 짓 따윈!

언제나 의미가 말이 되면 변질되어버리기 마련이지만, 때론 구차히 뭔가 말하려 애쓰지 않아도 나의 침묵을 그저 묵묵히 받아주는 그런 사람이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난 자네를 정말 많이 좋아했어. 테리. 미소 한번과, 가벼운 인사 한번, 그리고 손짓 한번과 여기 저기 조용한 Bar에서 술 몇 잔 마신 것만으로도 그렇게 됐지, 그러는 동안 즐거웠네. “잘 가게. Amigo. 안녕히!”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 말은 이미 진짜 의미가 있었을 때 했지, 그 말이 정말 슬프고 외롭고 마지막이었을 때 했던 거야.

 

Raymond Chandler의 “The Long good bye" 중에서

 

 

ps> 전 Alone together라는 곡을 참 좋아합니다. 인간은 항상 혼자일 수도, 항상 함께 있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 모순성이야말로 인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본성임에 틀림없다고 믿고 있죠. 그래서 이 곡을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Alone together는 1932년 뮤지컬 "flying collars"에 처음 삽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뮤지컬은 어느새 잊혀져 버리고, 이 곡만이 다행히도 살아남았죠. Popular한 곡인만큼 여러 version이 있습니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케니 도햄의 것입니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쳇 베이커, 음울하고 철학적인 에릭 돌피, 감성과 테크닉 모두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마일즈 데이비스, 정감이 넘치고 절묘한 인터플레이가 매력적인 짐 홀&론 카터, 광폭하면서도 처절한 음색의 아치 세프 등등 수많은 버전이 존재하지만, 쓸쓸하지만 왠지 따스한, 서글픈 꿈같은 느낌을 주는 건 오직 케니 도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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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xes have a hole and bird of the air have ne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written by Jesus Christ


Whoo! 그래 오늘 크리스마스다. 근데 나 지금 혼자가 돼 버렸다. 뭐 그렇게 됐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혹은 그것이 일시적이든, 잠정적이든, 영구적이든 간에 이 험한 세상에 달랑 혼자 몸으로 내팽겨질 때가 있는 법이다.


누구하나 불러주는 사람 없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불러주는 사람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서는 거다.

모비 딕의 이스마엘(아브라함의 버림받은 아들, 방랑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처럼 입술이 근질근질해지고 텁텁함을 느낄 때, 동짓달의 장마를 만났을 때처럼 마음이 울적해질 때, 울적한 마음으로 괴로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남의 모자라도 벗겨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는 한시라도 빨리 문을 박차고 나가는 거다.


난 곧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물은 별거 없다. 혹독한 밤의 기운을 잠시나마 막아줄 캐시미어 목도리 하나, 등산을 좋아하시는 아버지께 선물해 드렸다가 내가 다시 빼앗은 손난로 하나, 랭보의 시집하나, 그리고 몸을 데워줄 와인 한 병! 아 음악도 빠질 수 없지. CDP도 챙기자.

달랑 은전 2개로 대서양을 거쳐 일본해까지 가버린 이스마엘에 비하면 난 꽤나 준비가 투철했다. 크흐흐흐 자 이제 방랑의 시간이 왔다.


아! 막상 나와 보니 무지 춥다. 젠장할! 이런 날씨라니 나온 지 5분 만에 투철했던 내의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벌써 코끝이 찡하고 귀때기가 아프다.

휘파람을 불어볼려 했으나 입이 얼얼하니 벌써 굳었다. 나지막하게 랭보의 나의 방랑을 읊조려본다.


 

 

 

 

 

 

나의 방랑


쏘다녔다. 터진 주머니에 두 주먹 쑤셔 넣고,

짤막한 외투도 이상적으로 헐었고,

하늘 아래 걸어가던 나, 시의 여신이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다오.

오, 릴라! 내가 꿈꾸었던 찬란한 사랑들이여!


내 단벌 바지에 커다란 구멍 하나,

꿈꾸는 엄지동이, 이 몸은 발걸음마다

시를 뿌렸노라,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에 있었다오.

하늘에선 내 별들이 부드럽게 살랑대고,


길가에 앉아 내 별들의 몸짓에 귀 기울이곤 했다오.

9월의 이 멋진 밤, 나는 이마에 떨어지는

이슬방울등 속에서 정력의 포도주를 느끼곤 했다오.


환상적인 그림자들 사이에서 운을 맞추고,

내 가슴 가까이 한쪽 발을 치켜들어,

상처 난 내 구두의 고무 끈을 나는 리라처럼 잡아 당겼노라!


톨킨의 호빗이라도 된 양, 시를 읊다보니 노래도 절로 나왔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디찬 대기가 내 허파로 들어오자 짜릿하면서도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차디찬 공기가 뜨거운 내 심장과 폐를 만나 증발무(蒸發霧)라도 만드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파에 공기방울이 차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죽는다면 기네스에 오를 수 있을지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벌써 고지는 눈앞에 섰다.

여긴 내가 좋아하는 장소다. 난 시추를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다. 그녀석이랑 종종 오르곤 했던 동네 야산 아니 언덕 쯤 되려나? 나무벤치가 하나있고, 레몬빛 가스등이 하나 서 있다. 그 녀석은 종종 여기서 소변을 보곤 했었는데... 문득 그 녀석이 그리워졌다.


품안에서 어느새 따뜻하게 데워진 와인 한 병을 꺼냈다.  Bottle by bottle! 여기서 오줌을 싸곤 했던 그 녀석을 향해 건배!

꺼내든 와인은  Jacobs Creek Chardonnay Pinot Noir. 바로 요 녀석이다.

 <사이드웨이>란 영화에서 피노-누아 품종에 관해 주워듣고, 꼭 한번 먹어보고 싶어 사 놓았었다. 마일즈란 녀석의 말을 빌리자면...


 “피노는 까다롭고 재배하기 어려운 품종이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는 와인이지. 신경 안 써줘도 아무데서나 자라는 카베르네와는 달라. 끊임없이 신경 쓰고 돌봐줘야 하는 골치 아픈 녀석이지만 굉장히 복잡하고 다양한 맛을 지녔거든.”


헹! 정말 멋지지 않아? 난 풍류라고는 전혀 모르는 따분한 녀석이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도 그냥 지나치는 무감각한 놈은 아니다. 한때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사과향 칼바도스를 사기위해 온 동네 주류shop을 뒤진 적도 있었다. 결국 아직 못 먹어봤지만...


파아란 침묵은 어느새 나랑 레몬빛 가스등이랑 지금은 곁에 없는 그 녀석에게도 내려왔다.

지금 모두가 고요하다.

인간은 침묵 속에 있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어떤 말이든 애써 하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자신의 내면으로 가만히 침잠해 들어가 나를 바라봐야 할 그 시간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피카르트는 말했던가.

음악의 소리는 말의 소리처럼 침묵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하는 것이며,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하기 시작하는 침묵이라고 말이다. 음악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 들릴 때는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난 그가 말했던 그 절대의 침묵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난 가만히 CDP 를 꺼내어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Gerry Mulligan의 <Night Light>!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의 밤에도 정취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제리 멀리건의 이 음반만큼 그 정취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Bee Bop이나 Hard Bop의 통렬하고도 찌를 듯한 열정은 여기엔 없다. 이른바 Westcoast Jazz라고 불리는 Cool의 무덤덤함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을 법 하지만, 저항과 반역이 항상 들끊는 열정과 분노로만 나타낼 수 없는 것처럼,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날카로운 냉소 또한 저항과 반역의 한 방법인 것이다.


메마른 잿빛 도시의 밤!

밝지만 따스한 온기를 줄 수 없는 네온의 불빛처럼 그렇게 Cool은 찾아온다.

그것이 쿨의 진정한 매력이다.

고독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있을 때 찾아오는 법이 아니던가. 지금 혼자 있는 나보다 함께 있을 그대들에게 고독이 찾아오지 않을는지...

지금 고독을 느끼는 그대들에게도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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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2-2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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