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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의 가문
시바 료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역사는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 상고사에서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재창조되고 새로이 해석되어지기 마련이다.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들 또한 기존의 역사적 지식이 아닌 무수한 사료의 파편 속에서 새로이 구성되고, 해석된 창조된 역사를 원하기 마련이다. 시바 료타로의 패왕의 가문은 이러한 역사소설의 특유의 재미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하겠다. 패왕의 가문은 오닌의 난 이후 계속 된 봉건 다이묘들간의 암투와 빈번한 국지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근 270여 년간 일본의 평화시대를 안착시킨 에도 막부의 창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죽어서는 신으로 추앙되었고, 270여 년간 일본의 사상과 문화, 윤리를 사실상 지배한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한마디로 미카와 촌뜨기로 보고 있다. 미카와라는 지역은 네덜란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구문물을 급속히 흡수하고 있던 노부나가의 오와리와는 달리 중세 봉건적 농민사회의 성격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촌놈들이 살던 동네라고 할 수 있겠다. 어려서부터 약한 국력 탓에 오와리의 오다, 슨푸의 이마가와 등 세력이 강한 다이묘들의 인질 생활을 해야만 했던 이에야스가 내일을 기약할 수 조차 없었던 극도의 난세 속에서 결국 천하인에 오를 수 있었던 단 한가지의 장점이 바로 똘똘 뭉쳐진 촌놈 근성이라는 것이다.

 

도쿠가와의 아는 바로 미카와의 촌놈 근성이란 것이었고, 그의 삶은 아가 아닌 비아와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시바 료타로는 미카와를 이렇게 기술한다. 강렬한 갯내음과 싱싱한 풀내음이 열기 속에서 코를 찌른다. 길섶에 늘어서서 이에야스를 향해 고개 숙인 영민들의 장대한 기골하며 검은 살갗, 이를 드러내 웃는 모습도 스루가 사람들처럼 그리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얼굴이건 이에야스를 올려다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소리를 지를 듯 넘치는 감동과 슬픔을 억누르는 그들을 보고 이에야스는 이 땅에 오로지 이들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가혹한 난세 속에서 정세에 따라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던 다른 전국시대의 영주민들과는 달리, 미카와는 끈끈한 주종관계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강한 배타심과 음습함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일본 전국시대는 수많은 다이묘들이 이해득실과 정세에 따라 합종, 연횡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하극상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도 꿋꿋이 중세 봉건적 질서를 지키며, 토속적이며, 소박한 정토종 신앙에 따라 생활했던 사람이 이에야스였고, 그 기반의 중심에 미카와의 민초들이 있었다.

일본 전국시대를 말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다 노부나가이다. 사실상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종식시키고, 새로이 근세를 열 걸출한 인물이었지만, 측근의 암살로 인해 황망히 주저앉고 말았다. 오다 노부나가의 유산을 뒤이어 받은 이가 우리에게 임진왜란(임진전쟁)으로 잘 알려진 토요토미 히데요시이다. 굳건한 신분사회를 유지되었다면, 그리고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지 않았더라면 절대 다이묘가 될 수 없었던 비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노부나가는 중세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 인물이다. 능력이 있다면 신분여하를 막론하지 않고 중용함으로써 신분질서를 붕괴해 버렸고, 히에이잔, 이시야마 본원사를 비롯한 사원세력의 토벌로 중세 신앙적 질서와도 이별하였다. 기존의 다이묘들이 농업경제에 기반하였다면, 노부나가는 자유로운 유통질서의 확립과 관세철폐를 비롯한 적극적 상업경제에 바탕을 두었다.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호족 중심의 농민병이 아닌 전쟁과 치안만을 담당할 수 있었던 상비군을 둠으로써, 병농분리와 함께 계절과 수확에 상관없이 항상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해 두었다. 노부나가만이 이 비범한 계획의 입안자였고, 실행자였다. 노부나가의 사후, 정권을 장악한 히데요시에게는 굳건한 기초가 없었고, 노부나가의 시스템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행할 역량 또한 부족했다. 그에게는 중세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창립하고 수행할 만한 역량이 부족했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탐하는 다이묘들을 설득시키고 위협하는데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했다.

 

그러한 상황을 이해시키고자 시바 료타로는 패왕의 가문의 마지막 전투를 세키가하라가 아닌 고마키- 나카쿠테 전투로 한정하였다. 아마도 노부나가의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한 자들이지만, 그래도 비범했던 두 사람의 전투를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중세의 연공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임진왜란(임진전쟁)을 일으켜야 했던 히데요시와 중세 봉건적 질서를 끝까지 고수했던 이에야스와의 전투가 히데요시와 이에야스의 정체성을 매우 잘 드러내어 준다. 

 

이에야스의 정체성은 중세 봉건적 질서의 완성, 지속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승리자였다. 천하인이 된 이후로 그는 가신단에게는 녹봉의 원천이 되는 영지를 제한하였고, 굴복한 다이묘들에게는 광대한 영지를 주는 대신, 정치적 입지를 제한하였다. 히데요시가 그 연공적 질서를 벗어나지 못해 가신단에게 광대한 영지를 제공하고자 임진전쟁을 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에야스는 그 연공적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그 미묘한 균형을 잘 이루어 놓았다. 그것이 이에야스의 천하였고, 그 천하의 중심에는 미카와 근성이 있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의 상업경제가 아닌 질박한 농업경제와 철저한 신분, 연공적 질서를 완성함으로써 260여년간 일본의 평화를 이루어 내었다. 이에야스의 천하는 미카와의 확대였고, 그 과정에서 미카와적인 것과 어울리는 것은 철저히 모방하고, 습득했다. 오랜 시간 노부나가와의 혈맹관계 속에서도 노부나가의 전술이나 모략, 상업경제는 철저히 배제 하였고, 오히려 그에게 가장 큰 패배를 안겼던 다케다 신겐의 전술과 모략을 배워나갔다. 그에게 노부나가는 非我였고, 신겐은 我였다. 어떤 의미에선 이에야스는 신겐에게서 그의 미래를 보았다 라 하겠다.

 

역사만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라는 언명을 진리로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에야스는 끝까지 살아남았고, 비로소 그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노부나가의 천재성도, 히데요시의 호방함도 갖추지 못했지만 시바 료타로가 그를 패왕으로 일컫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며,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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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구들방을 데우다 - 서양식 벽난로와 전통 구들의 만남
이화종 지음 / 시골생활(도솔)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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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봐야 갈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중에서

 

언제나 살아오면서 난 리얼(real)을 부러워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체험이 아닌 책이나 비주얼 매체를 통해 얻은 버츄얼(virtual)한 것이다. 즉 난 입만 살은 놈이란 뜻이다. 무언가 많이 알고 있는 양 해도 실제로 해보라면 서툴기 짝이 없고, 제대로 해낼 수도 없었다.

리얼과 버추얼의 차이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난 몸으로 새겨진 지식만이 참 지식이다라고 생각해 왔고, 지금도 그런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최근에 시골에 집을 짓고 가끔씩 생활하면서 귀농, 귀촌에 대한 낭만적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다. 막연히 공기좋고, 물 좋은 시골에서 안빈낙도적인 삶을 상상해 오던 난, 때때로 모기와 벌레들에 시달리고, 뙤약볕아래서 풀을 베느라 몸살을 앓기도 하고, 흘러내리는 땀에 눈에 염증이 생기는 등 온갖 리얼리스틱한 일을 겪으면서, 루카치가 말한 낭만적 시대는 리얼이 아니라고 확고히 느꼈다.

 

"벽난로, 구들방을 데우다" 그런 낭만적 시대를 찬양하는 책이 아닌 풀과 벌레와 흙을 실로 만지며 살아야 하는 불편함에 대해 진솔히 얘기한다는 점에서 리얼한 책이다. 귀농이든 귀촌이든 혹은 이따금 들려서 귀농인인 척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리얼한 삶을 얘기한다. 구들방에 산다는 것은 그저 몸을 뉘는 공간의 변화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말해준다.

구들방과 벽난로의 장점을 취할려면, 그것에 우선하는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하고 이를 즐길줄 아는 태도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구들방을 만드는 기술보다는 오히려 책의 절반을 소박한 삶에 대한 철학을 얘기하는데 더 할애했다.

 

난 건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앞부분의 도면을 한참을 들여다보고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설명이 친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독자인 내가 문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첨단 주택에 살면서도 토목기초공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감을 전혀 잡을 수가 없었다. 책에 첨부된 동영상을 여러번 봤지만, 어디까지나 버추얼이어서 제대로 와닿지 않았다. 책을 읽고서 저자를 만나서 도제처럼 구들방 놓는 것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작은 쥐나 새도 스스로 살 곳을 스스로 지으며 살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 뽐내며 사는 우리들은 자기 살 집 도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니 새삼 나의 헛지식이 우습게 보였다.

 

다만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나같은 문외한이 보기에 보다 체계적으로 구들장 공사의 세부적인 디테일이 설명되었으면 하는 점이다. 사진 자료가 부족해 구들장 공사의 전체 공정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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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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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사람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Written by Nietzsche 선악의 저편 중에서


술에 잔뜩 취한 어느 날 밤, 솔랑카 교수는 사랑하는 가족의 앞에 선다.

한 손에는 식칼을 든 채,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살의(殺意)로 똘똘 뭉쳐진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곧이어 벌어질 잔혹한 살인과 폭력 앞에서 그저 무방비로 잠들어 있는 그들, 그 넘치는 살의로부터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선 무작정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 분노한 사나이가 되었다.....


지독스레 시시한 거짓말이다.

 

살만 루슈디가 약발이라곤 전혀 듣지 않았던 호메이니의 암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해 진 뒤 최근에 내놓은 이번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한 거짓말만을 내뱉을 뿐이다. 죽음의 문 턱 앞까지 가 본 작가들을 찾아보자면 사실 꽤 많이 있는데, 사형집행 직전에 가까스로 사면된 도스토예프스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했었던 레마르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참호 속에서 톨스토이를 읽었던 비트겐슈타인,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들었던 빅터 프랭클, 2차 세계대전 중 군용기 조종사로 종군했었던 생텍쥐페리 등등 수없이 많다.


그들이 제 일선에서 죽음과 맞닥뜨린 대표적인 사람들이라면, 살만 루슈디는 소설 속 솔랑카 교수처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안락한 복층식 임대 아파트에서 TV를 통해  죽음을 감상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차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살만 루슈디의 ‘분노’ 를 낳았다. 전자가 표면부터 밑바닥까지 영혼을 울리는 진실 그 자체라면,  후자는 진실을 가장한 허풍이요, 엄살에 불과하다.


솔랑카 교수가 ‘사랑했다고 가장했었던’ 가족의 곁을 황급히 떠난 건 사실 살의 때문이 아니요, 그저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조한 인형 ‘리틀 브레인’이 매스 미디어의 강력한 세례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의 손 안을 벗어나자 그는 리틀 브레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감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의 분노의 정체는 자신의 창조물인 리틀 브레인이 창조주인 자신을 벗어나, 오히려 그 자신이 창조물에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며 또한 그 상황을 역전시킬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력감이 바로 권태이며, 권태가 바로 분노로 표출된 것뿐이었다.


그런 시시하기 짝이 없는 분노였기에 그 해소 또한 시시하기 그지없다. 밀라 마일로의 조언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형 ‘퍼핏 킹’을 제작하면서부터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살의에까지 이르렀던 끔찍했던 분노는 어느새 사그라지기 시작하며, 친구의 애인이었던 아름다운 미녀 ‘닐라’를 소유하면서 그 분노는 어이없이 해소되어 버린다.

 

500페이지가 넘는 시시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살만 루슈디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그 500페이지가 넘는 분노의 정체는 말이다.

 

살만 루슈디의 분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상의 ‘권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눈동자)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몹시 바쁘다)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자의식 과잉! 이것만큼 이 소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평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일은 그 거짓말들이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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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7-04-03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기 손으로 자신의 피조물을 파괴하려고 했었죠. ^^ 사필귀정이랄까...

2007-04-09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 2007-04-10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오타수정에 감사드립니다.
 
Bill Evans - Conversations With Myself & Further Concersations With Myself - The Art Of Duo
빌 에반스 (Bill Evans) 연주 / 유니버설(Universal)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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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황홀한 우리 마음위에 밤은 내리고 있다.


written by Andre Gide


빌 에반스의 Conversations with myself를 듣고 있노라면,

jazz가 밤의 음악이라고 말했던 스탄 겟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금방 깨닫게 된다.

 

밤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소리의 파문(波紋)이 나와 공명하는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파문이 일으킨 틈새를 비집고 나와 텅 빈 공간을 하나씩 잠식해 간다. 그건 분노도 아니며, 슬픔도 아니다. 그건 그냥 새하얀 한숨 같은 것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조셉 콘래드의 말을 빌리자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가닥의 연기를 뿜으면서 꿋꿋이 항해하고 있던 외로운 배는

마치 하늘에서 무자비하게 던진 불길에 그을린 듯이 넓고 환한 바다에서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날마다 밤이 축복처럼 배위에 내렸다.(Lord Jim 중에서)


그의 음악은 이처럼 고독한 밤바다를 항해하고 있던 나에게 축복처럼 내렸던 것이다.


Conversations with myself의 첫 장을 넘기면, 에반스가 그려놓은 밤의 정경이 펼쳐진다.


‘Round About Midnight!


그가 그려놓은 밤은 적막하면서도 따뜻한 눈이 내린, 겨울 숲의 밤이다.

이는 전적으로 스타인웨이(Steinway) 피아노와 웹스터 홀의 목재마감으로 인한 소리의 반향에 기인한 것으로, 빌 에반스는 이번 앨범을 위해 특별히 글렌 굴드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선택했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획기적인 해석으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빌 에반스의 투명하고도 명료한 음색을 너무나도 좋아했다고 한다. 섬세하면서도 영롱한 소리가 매력이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그런 그의 요구에 적합한 악기였고, 굴드 역시 1960년이래로 줄곧 스타인웨이 피아노만을 연주해 왔었다. 글렌 굴드와 빌 에반스. 이 두 사람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섬세하면서도 다소 단단한(solid) 음색에서도 많이 닮았지만, 관중에 대해 철저히 무심하면서, 스스로의 내면에 침잠하는 듯한 연주 자세에서도 정말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음반의 곡목을 살펴보면, 에반스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셀로니우스 몽크와의 대화도 여러 번에 걸쳐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Round About Midnight’뿐만 아니라  ‘Blue Monk’, ‘Bemsha Swing’등 몽크의 여러 자작곡들을 만날 수 있다.

“음악에 있어 절정의 순간은 음과 음사이의 짧은 정적에 있다.”라는 음악적 소신을 밝혔던 몽크와 마찬가지처럼 에반스는 그의 음악의 절정을 음형이 일으키는 파문과 파문사이에 던져 놓았다. 정적 속에서 툭툭 깨어져 나가는 소리의 파문은, 깊은 밤 소리없이 내리는 하얀 눈송이처럼 조용히 쌓여가는 것으로 마지막 음이 피아노를 떠나는 그 순간 가만히 한숨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Stella by Starlight의 연주를 막 끝내자 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냉장고로 가서 얼마 전 사 놓았던 카르멘 리저브를 한 병 깠다.





차갑고 단단하며 오크향이 감도는 맛이 눈 내린 겨울 숲 같았다.

 

wine comes in at mouth                     와인은 입으로 마시며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사랑은 눈으로 마신다.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he truth    그것이 우리가 알아야할 유일한 진실!

before we grow old and die               우리가 늙어 죽기전에

l lift the glass to my mouth                  나는 입에다 술잔을 들고

l look at you, and i sigh.                     그대를 바라보며, 한숨 짓노라.

 

예이츠의 싯구를 읊어보며 난 풍류에 흠뻑 젖어본다.

 


그날 밤 나에게 밤은 축복으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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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26 1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르헤스 2007-03-2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전 자주 뵈었는데요 ^^ 님의 페이퍼를 통해서 말이죠.
 
[수입] The Genius of Bud Powell
Verve / 195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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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livion>

 

위대한 기지는 광기에 아주 가깝고

그들의 경계를 가르는 엷은 칸막이만 있을 뿐이다


written by Alexander Pope


지난 밤, 나는 지독한 무거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자신의 무게에 짓눌려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타인을 사랑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를.

나 자신의 무게도 이토록 힘겹고 고통스러울진대, 타인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함께 껴안아야만 하는 사랑의 무게는 얼마나 힘겨운 것일까?

낯모르는 타인에게 선뜻 사랑한다며 껴안는 무리들을 그래서 난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의 사랑은 분명 거짓임이 분명하기에.


무거움의 늪에 빠져있는 동안,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처방은 모조리 해봤지만 결국 짜증만 더 늘 뿐이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쥐죽은 듯 가만히 침묵하며 견뎌야 한다. 관조반야(觀照般若)하면서...

브로크벡 마운틴의 마지막 글귀처럼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하는 법이다.

짜증이 조금 가신 후에야 가까스로  Bud Powell의 The Genius of bud powell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난 파웰의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그의 이름 앞에 늘 붙어다니곤하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더 좋아했다.

천재라... 그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가?

평범이라는 말은 진부하고 따분하게만 들리지만, 천재라는 말은 내뱉는 그 순간부터 스스로 환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다 ‘요절했다.’라는 짧은 부언이 더해지기까지 하면, 난 지랄발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중력(重力)에 사로잡혀 밤하늘에 스스로를 못 박아버린 수많은 별보다, 은하를 가로지르며 스스로를 불태우며,

소진해가는 한 떨기 유성이 더 아름답지 아니한가?

천재는 바로 그 유성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천재성에 관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중 하나는 쇼펜하우어의 것인데, 조금 인용해보면


"천재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월등한 관조의 능력에 있다.

그런데 관조는 자기 자신과 그의 관계들의 완전한 망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천재성이란 다름 아닌 가장 완전한 객관성, 즉 자기 자신 곧 의지로 향하는 정신의 주관적 방향과는 다른 정신의 객관적 방향이다. 따라서 천재성이란 순전히 직관적으로 행동하고, 직관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이며, 본래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식을 이러한 봉사로부터 떼어놓는 능력, 즉 자기의 관심, 자기의 의욕, 자기의 목적을 전연 안중에 두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한 순간에 완전히 포기하고, 순수 인식 주관으로서 분명한 세계의 눈 그 자체로 되는 능력인 것이다."


버드 파웰은 바로 그런 천재성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Tatum에서 테크닉이 나왔다면, Powell에게선 스타일이 나왔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는 아주 독창적인 모던 재즈 피아노기법을 완성해 내었다. 왼손이 베이스 음계와 코드를 짚어나가는 동안, 오른손은 쉬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읊어나간다.

그런 그의 음악적 특징은 BACH의 음악과도 유사한데, 통주저음이 갖는 즉흥성과 바소오스티나토(basso ostinato)양식의 화려한 변주성이 왼손과 오른손에서 동시에 펼쳐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거기다 걷잡을 수 없이 내지르며 질주하는 스피드의 향연이란!

바흐의 클래시컬한 정격성과 변주성, 거기다 불타오르는 ROCK적 열정의 혼합체. 그것이 바로 버드 파웰이다.


그의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당신은 어쩌면 한결같은 그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잡것들아! 할 수 있음 나를 한번 따라와 봐. 우하하하!”


The Genius of bud powell에도 그런 그의 목소리가 담뿍 담겨져 있는데, 진땀 꽤나 흘렀을 것이 분명한 리치의 드럼과 레이 브라운의 베이스는 파웰의 스피드를 따라가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지만, 자기 파멸적인 독특한 정신세계와, 코를 찌를 듯이 오만하며 거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파웰은 그런 그들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어느새 자기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린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그는 어느새 망각해 버리고,  재즈 세계의 눈이 되 버린 것이다.



John Stevens의 말처럼 그는 늘 피아노가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피아노를 놓아주곤 했다.


“이제 내가 하고픈 말은 다 했으니, 그담은 니들이 알아서 해.”


분명 그의 음악에는 재즈 앙상블의 우아한 맛은 떨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거기엔 삶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소진해 가는 눈부신 유성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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