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가끔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의 모든 문제는 선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같은 텍스트를 보더라도 다 각기 다른 것에 꽂히게 되는 것은 그것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본다라는 것은 바로 선택이다."

 

라는 절대명제가 나에게 유난히 힘을 발하는 것도 영화를 볼 때인 것 같다.

 

폴 베타니가 나오는 갱스터 넘버원을 볼 때도 난 그러했다.

난 텍스트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복식에 관심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조직의 수장이자 갱스터들의 KING으로 묘사되는 프레디(데이빗 듈리스)를 묘사할 때처럼

 

"제기랄,, 구두를 좀 봐! 최고급 이탈리언 수제화로군. 보나마나 슈트도 최고급이겠지."

 

그리고 야심에 불타는 보잘것없는 건달이었던 베타니의 시선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조직의 보스의 옷차림을 내리훑으며 지나간다.

그 시선의 종착점은 진주로 장식된 커프스링크와 넥타이 핀.

덩달아 보스를 향한 그의 끝없는 질투와 분노는 그 시선의 종착점인 넥타이 핀과 더불어 극대화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내내 나의 눈도 베타니의 시선과 맞물려 돌아갔다

확실히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새빌로우의 맞춤양복일 것이 분명한

브리티시 슈트의 최고봉을 보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났다. 머릿속으로 몇가지 계산이 지나갔고,,,




 


 

아마도 슈트 한벌만으로도 2만유로는 족히 나가야겠지. 헌츠먼앤서스같은 곳에 가서 맞춘다면 말야

스테파노 베멜이나 실바노 라탄지 같은

이탈리아 아르티자노(장인)에게 구두를 맞춘다면 250에서 300정도는 가볍게 넘어서겠지.

 

젠장 탐난다. 제길!

 

진주로 장식된 자신의 이름 첫 글자가 새겨지 커프스링크와 넥타이 핀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

 

갱스터 넘버원! 영화 그 자체로는 무지 좋았지만. 영화를 보는내내 마주쳐야만 했던

나의 속물적인 탐욕과의 싸움이 더욱 힘들었던 영화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근데 왜 영화마다 갱스터들이 이리 멋지게 나와선 안되지 않을까?

대부의 꼴레오네는 얼마나 멋졌냐 말이야?

갱스터들이 정말 찌질하게 나오는 영화가 보고싶다.

진짜 무식한데다 입에 욕을 걸쭉하게 담고 살고, 매너는 개황인데다

무지 촌스러운 그런 갱스터가 나와야 사회순화가 좀 되지 않을까...

 

갱스터들이 멋지게 나오는 영화는 이제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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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ies and Gentlemen




 

나는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습니다.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에요.

Oscar Wilde의 The Picture of Dorian Gray 중에서


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 거울을 봤다.

약간 덥혀진 증기로 인해 뿌옇게 서린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어! 언제 여기 잔주름이 생겼지?”


어느새 내 얼굴 위로도 삶의 고단한 편력들이 아로 새겨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단숨에 빼앗아 가는 법이지만 늙음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을 부패시켜버린다. 갖고 있던 열정도, 꿈도, 사랑도, 시간의 침식아래 서서히 퇴락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난 죽음보다 늙음이 두렵다. 존재를 상실하는 것보다 존재가 부패되고, 퇴락되어가는 것이 더 두렵다.

 Walter Raleigh 의 우울한 시구가 떠오른다.


믿지 못할 꿈처럼 나의 기쁨은 막을 내렸고,

내 좋았던 시절은 모두 과거로 돌아갔다네.

사랑도 잘못 되었고, 환상도 완전히 물러갔고

그 모든 지난 일 중에서 슬픔만이 남아있다네.


아침부터 시작된 씁쓸함은 종일 나를 괴롭혔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잠시동안 천장에 비쳐지는 그림자들의 희롱을 묵묵히 견뎌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 밖에 없었다. 스탕달의 말처럼 잘못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에 있다. 우린 그렇게 만들어 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TV를 봤다. 아! 반가운 사람을 나왔다. 제레미 아이언스다! 내가 좋아하는 정말 몇 안되는 배우 중 하나이다. 이란 다소 기묘한 이름의 영화였는데, 모로코의 이국적인 풍경과 Patricia Kaas가 부르는 Jazz Standard를 들을 수 있어서 꽤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던젼 앤 드래곤즈였다.^^)보다 많이 늙어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멋있었다. 그는 정말 내가 닮고 싶은 외모를 가졌다.





가끔씩 여자 친구에게 넌지시 물어본다.

 

“나랑 제레미 아이언스랑 둘 중 누가 더 멋지냐?”

“그걸 말이라고 해! 터진 입이라도 말은 바로 해야지. 당연히 제레미지.”

“야! 나도 아는데, 그렇다고 바로 직사포를 때리냐? 아씨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짱나네.”

“흐흐. 확실히 제레미가 나은데 자네도 자네만의 멋이 있어.”

“그게 뭔데?”

잠시 침묵

“자네는 일단 착하고, 성실하고.....”

“야! 됐어! 관둬.”

 

자신이 가장 아름다울 때 죽을 수 없다면, 결국은 시간의 끊임없는 침식과 맞서 싸워야 하리라. 끊임없이 투쟁하고 때로는 패배하고, 때로는 승리하며 그렇게 마치 戰士의 몸에 새겨진 상처의 각인처럼 우리의 얼굴에도 그렇게 주름이 하나씩 늘어갈 것이다.


그 주름진 얼굴이 부끄럽지 않은, 오히려 당당해 보이는 그런 전사의 얼굴이 갖고 싶다. 삶의 고난함과 치열함을 그대로 드러내도 결코 추하지 않은...

 



 

아이언스처럼 멋지게 늙는다면, 늙는다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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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the First

물론 나는 이마빼기로 이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만한 힘은 내게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결코 이 벽과 화해하지는 않겠다. 왜냐? 내 앞에 돌 벽이 서 있으나 나는 그걸 무너뜨릴 힘이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Written by Dostoevskii, 지하생활자의 수기 중에서


신화의 원형에 있어서 영웅은 언제나 버림받고,(Wasted) 상처받으며(Wounded), 그리고  정처 없이 어디론가 방랑을 떠나야만 하는 존재(Waltzing Matilda)로 묘사되어왔다.

이런 신화적 원형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여전히 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새로운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만약 영웅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힘을 발휘하는 숙명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도 방랑자의 운명일 것이다. 운명에 쫓겨 사살당하는 삶이 아닌 운명을 지배하는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가 필요하다.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부자유와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고귀한 분노를 머금은 채 방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영웅에게 주어진 전사의 삶이다.


난 21세기에 있어서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Roman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방랑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방랑자를 이렇게 노래했다.


“방랑자는 인간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향락을 누리는 사람이다. 기쁨이란 한 때 뿐이라는 걸 머리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직접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랑자는 잃어버린 것에 연연해하지 않으며, 한 때 좋았던 장소에 뿌리를 내리려 안달하지 않는다.”


또한 방랑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이러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나도 몰라” 나는 말했다.

“여기를 떠날 뿐이야, 여기서 나가는 거야 어디까지라도 가보는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

“그럼 가실데가 있으시군요?” 하인이 물었다.

“암! 그럼.” 나는 대답했다.

“방금 말하지 않았나. 여기서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내 목표야!”


서두가 너무 길었는데... Tom Waits 도 그런 방랑자의 운명을 타고났다라는 단 한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Tom Waits



그의 운명은 “1949년 캘리포니아 포모나(Pomona)의 달리는 택시 안에서 태어났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요약되어 질 수 있다. 그 후로도 그는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낡은 차 안에서 기거해야 했으며, 69년 L.A.의 트라우바도(Troubadour)에서 열린 그의 첫 공연이 열릴 때까지 차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느새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린 거리의 부랑자요, 방랑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언제나 끊임없이 부유해야만 하는 도시 빈민의 삶에 강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들풀같은 노래 안에는 수많은 부자유에 맞서 기꺼이 싸우려는, 강인한 삶에의 의지와 방랑자의 고귀한 분노가 녹아있다.


영화 바스키아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바스키아(Basquiat)"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 영화는 거리의 부랑자이자 포스트모던의 위대한 화가였던 Jean-Michel Basquiat의 생애를 그린 전기영화로, 어디에서도 소속될 수 없었던 방랑자 바스키아의 삶을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한  쪽에선 노예적 삶을 위해 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부유한 백인들에게 팔아먹고 있다는 비판을 다른 한 쪽에선 그저 마약에 찌든 'Nigger' 낙서쟁이에 불과했던 바스키아는 이중적 삶에의 정체성 혼란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차에 유일한 친구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앤디 워홀의 죽음을 맞게 된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워홀의 영상을 지켜보면 소리 없는 절규를 부르짖던 바스키아의 눈물이 Tom Traubert's Blues과 함께 유유히 흐른다.

 

Tom Traubert's Blues

 

Wasted and wounded, it ain't what the moon did
Got what I paid for now
See ya tomorrow, hey Frank can I borrow
A couple of bucks from you?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I'm an innocent victim of a blinded alley
And tired of all these soldiers here
No one speaks English and everything's broken
And my Stacys are soaking wet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w the dogs are barking and the taxi cab's parking
A lot they can do for me
I begged you to stab me, you tore my shirt open
And I'm down on my knees tonight
Old Bushmill's I staggered, you buried the dagger
Your silhouette window light
To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w I lost my Saint Christopher now that I've kissed her
And the one-armed bandit knows
And the maverick Chinaman and the cold-blooded signs
And the girls down by the strip-tease shows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No, I don't want your sympathy
The fugitives say that the streets aren't for dreaming now
Manslaughter dragnets and the ghosts that sell memories
They want a piece of the action anyhow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And you can ask any sailor and the keys from the jailor
And the old men in wheelchairs know
That Matilda's the defendant, she killed about a hundred
And she follows wherever you may go
Waltzing Matilda, waltzing Matilda
You'll go a waltzing Matilda with me

And it's a battered old suitcase to a hotel someplace
And a wound that will never heal
No prima donna, the perfume is on
An old shirt that is stained with blood and whiskey
And goodnight to the street sweepers
The night watchman flame keepers and goodnight to Matilda too


 

하루 위스키 1병과 2갑의 담배를 꾸준히 피어대야만 만들어질 것 같은 그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인간의 슬픔을, 존재로서의 고독을, 구속되어지지 않는 자유를 노래한다. 굳이 인간으로서의 톰 웨이츠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짐 자무쉬의 영화 <커피와 담배>를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톰 웨이츠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커피와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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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은 죽음까지도 파고드는 삶이다.

Written by Georges Bataille


새벽 4시, 알콜 그리고 구토

토사물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그렇게 난 4시의 밤을 삼켰다.

침대에 누워 한 얼굴을 떠올린다. 처음엔 웃음,, 때로는 분노... 하지만 결국엔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은 훼스탈 2정과 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슬픔이다.

바타이유가 말했던 서로 교통하려 애쓰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원래의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마치 거대한 심연과도 같은...


침대에 똑바로 누워 Baruzi의 글귀를 떠올렸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모든 종류의 위로받을 수 없는 비탄도 시간과 더불어 스러져 가는 법이라지만, 때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버거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럴 땐 한 모금의 담배와, 방안에 조용히 울려퍼지는 음악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새벽 4시에 Mahler를 들었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교향곡 5번의 Adagietto는 그렇게 조용히 내 방안의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듣노라면 언제나 루키노 비스콘티의 <Death in Venice>가 떠오른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탐미적이고, 에로틱한 영상과 더불어 처절하리만치 비극적인 정서가 말러의 선율로 완벽히 장식되어 있는, 정말 치명적인 작품이다.(아마도 여성분들에게는 더욱 치명적일 미소년 비요른 안데르센과 함께)



소설과 영화는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비스콘티는 토마스 만이 말러의 죽음을 계기로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된 것을 떠올리고 소설의 주인공인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 라는 인물을 작가에서 작곡가로 바꾸어 놓았는데, 이는 철저히 말러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에로티즘은 오로지 응시라는 수단만으로 표현되어지는데,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사랑의 열정이 시작되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가운데 죽음을 맞음으로써 끝을 맺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라는 것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바라보게 된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존재는 근본적으로 고독하다. 태어나는 순간에도 혼자이며, 모든 사건들을 혼자 감당해야 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철저히 혼자일 수 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각자 자신만을 가리킬 수 밖에 없다.”라는 말은 분명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고 또 사랑하게 됨으로써 그 순간만큼은 바타이유가 말했던 그 거대한 심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매혹의 과실이 그만큼 달콤했기에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는 사랑하는 소년 Tazio의 곁을 떠나야만 하는 치욕적인 삶 대신 의연한 죽음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누워있는 이 순간 난 영원을 떠올리고, 다시한번 그리움을 떠올린다.



영원(아르뛰르 랭보)


되찾았도다!

뭐가? 영원성이

태양과 함께

바다는 떠나가고


영혼, 나의 파수꾼이여

그토록 무가치한 밤과

불타는 낮의

고백을 속삭이도록 합시다.


인간적인 간구와

평범한 충동,

거기서 벗어나 그대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사탄의 잉걸불이여

그대에게서만

[결국]이라는 말도 없이

의무가 터져버린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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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2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영화 보고 싶어요.
이 책은 꼭 베니스에 들고 가서 읽을꺼에요. 이왕이면 토마스 만이 머무르며 썼다던 그 자그마한 호텔이서면 다 좋겠죠.

보르헤스 2006-03-2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디비디 나와있으니까 한번 보세요 가격도 싸던데... 그리구 잘못 기입된 주소때문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했어요. 그리고 책은 낼 온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소중하게 읽겠습니다.

하이드 2006-03-2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하두 잘못 보낸 전적이 많아서 ^^:; 주의 하는라 하는데, 제가 이렇습니다. ^^: 그런김에 목소리도 듣고 좋죠 뭐.알라딘에 유포되고 있는( 혼자 유포하고 있는) 하이드 섹쉬허스키고음 보이스의 진실은 비밀입니다. 흐흐
디비디는 거진 품절이던데, 한번 더 찾아봐야겠어요.
 




그저께였나 낮에 낮잠을 조금 잔 관계로 밤에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이럴 경우 2가지 선택을 한다.

하나는 책을 꺼내 읽는 경우이고 또 하나의 경우는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것이다.

특히나 유난히 잠이 오지 않을때 읽는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은 나에게 있어선 최고의 수면 치료제이다. 읽는 도중 몇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느샌가 보면 난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하나의 해결책은 음악을 듣거나 TV를 보는 경우인데 이럴 경우는 책을 읽는 것 보다는 조금 귀찮아진다.

우선 음악을 듣는 경우는 CD를 꺼내기 위해 침대에서 어쩔수 없이 일어나야만 하고 한동안 뭘 들을까 선택의 기로에 서야 하기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해야 한다. 또한 밤인 관계로 어쩔수 없이 헤드폰을 껴야 하는데 이 헤드폰이 문제다. 헤드폰을 끼게되면 몸을 뒤척일 수가 없기 때문에 자면서 자주 몸을 뒤척이는 사람일 경우에는 절대 해서는 안될 행위이기도 하다(특히나 내 여자친구처럼 옆으로 누워자는 사람은 하고 싶어도 절대 못한다.또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는 나는 헤드폰을 자주 끼면 난청이 될 수 있다는 경고기사를 읽은 후로는 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헤드폰을 피하기도 한다.)

 

맨눈으로 밤을 지새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 때 나의 Best Choice는 언제나 푸르니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prelude를 감동에 떨며 듣다가도 3번의 sarabande 쯤 가면 난 어느새 잠들어 있다.(대체 난 언제쯤이나 가야 맨정신으로 무반주 첼로조곡 전부를 들을 수 있을 건지 원! )

 

잠이 오지 않아 TV를 어쩔수 없이 봐야할 경우 난 주로 홈쇼핑을 주로 본다. 난 원래가 홈쇼핑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여자친구가 홈쇼핑을 즐기는 관계로 자연히 그쪽 세계(?)를 알게 되었고 또 그게 은근히 감칠 맛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다.그 후론 심심할때면 홈쇼핑을 본다. 물건 팔아볼려고 온갖 미사여구로 무장된 호스트들을 지켜보는건 웃찼사나 개콘을 보는것 보다 나한텐 더 큰 재미를 가져다 준다.

 

홈쇼핑을 보다가 지겨워져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나에게 충격적인 영화로 다가온게 있었으니 그게 바로 <허공에의 질주>였다. 볼려고 하던 영화가 아닌지라 극 초중반부터 보게 되었는데 보는 도중 "아 물건이다. 그것도 제대로 된... 왜 이걸 이렇게 늦게 봤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났다. 예전에 리버 피닉스가 약물중독으로 요절했을때 그저 아이다호의 그 압도적으로 잘생긴 배우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 영화를 본 후 새삼 리버 피닉스의 영화들을 찾아 보게 될 정도로 강력한 영화로 다가왔다. 영화 자체로도 뛰어났지만 음악은 더 훌룡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 특히나 리버가 줄리어드 오디션에서 친 모차르트의 Fantasy는 그가 그저 그런 배우라고 기억되기엔 너무 뛰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영화 전반에 흐르는 James Tylor의 의 멋진 가사와 함께 감동적인 엔딩은 영화의 주제를 실로 멋드러지게 압축해 보여주었다.

 

극 도중 리버(대니)가 음악 선생님인 필립스의 집에서 실내악 연주회가 열려 찾아가 볼려고 하자 리버의 아버지는 부르주아지의 속물근성이 판치는 곳이라며 가지말라고 강압적으로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1988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서도 이른바 Classics이 어느새 부르주아지의 음악으로 대변되어버린 현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게 다가왔다. 20세기 전반만 하더라도 고전음악(당시에는 아니었겠지만)을 듣는 청중은 자유로웠다. 음악을 듣는 내내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먹을 것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데이트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무례해보이고 난잡해보인다.(아마 오늘날의 가수 콘서트장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진정한 음악의 역할이 아닐까한다.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 청중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음악을 이해시키는데는 그들이 그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고 있는가 하는데 있지 않을까?

 

토스카니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회에서 무례하게 떠들거나 야유를 보내는 청중을 쫓아내기 시작했고 어느새 그게 관행이 되어버려서 고전음악을 들으러 갈때는 격식을 차려야만 하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모든 사람의 음악을 소수의 사람의 음악으로 스스로 한정짓기 시작한  Classics은 정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듣는 음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영화에서 리버는 줄리어드의 오디션에 평범한 캐주얼 복장으로 참여한다. 다른 연주자들은 모두 격식을 차린 정장차림이지만 그는 그냥 면 Shirts에 청바지,겨우 보잘것 없는 작은 넥타이만 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터지는 음악은 절대 Casual 하지 않았다. 오디션이 끝난 후에 심사위원이 말한다. "당신의 재능은 정말 뛰어난데 도대체 누구에게 사사받았냐고?" 사실 그는 누구에게도 사사받지 않았다. 그냥 그의 어머니에게 배웠을 뿐이고 스스로 재능을 닦아왔다. 그는 말한다. "이사를 자주 다녀서 여러사람에게 배웠다고...하지만 당신이 아는 유명한 누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없다고."

 

얼마전 고클에서 양성식이라는 연주자가 이준호라는 청중이 올린 공연후기담으로 발끈해 한 적이 있다. 물론 연주자도 사람이기에 발끈해 하는건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또한 이준호라는 군인이 올린 글 또한 다소 무례한 언사로 쓰여져 있는데다 오해의 소지도 충분히 줄 수 있는 글이었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의 글이 아닌 그 두 사람의 글 뒤에 올려져 있는 리플을 읽다 깜짝 놀랐다.

 

자신도 음악을 전공하고 있다는 한 여성분이 올린 글에는 <청중의 횡포>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언제부터 클래식이 아니 음악이 일방적으로 청중에게 주어지는 하사품이 되어 온 것인지.. 음악은 창조자와 청중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었던가? 위대한 작가였던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증이 가장 심각해졌을 시기는 자신의 작품이 발표되고 독자의 반응을 기다린 때가 아니었던가?

 

요즘처럼 이렇게 청중이 철저히 무시되고 간과되어 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문 평론가의 한 줄 기사에는 촉각을 곧두세우면서 가장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어야 할 청중의 의견이나 반응은 마치 음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한 자들의 헛 메아리처럼 치부해 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아닌 우려가 내마음을 사로 잡았다. 양성식과 이준호의 논쟁의 핵심은 음악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연주자는 자신들이 전문적으로 몇년에 걸쳐 스코어를 공부하고 연주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더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하다는 것이고, 청중은 이런저런 cd나 매체를 통해 다년간 그 음악을 들어왔기 때문에 청중들도 작곡가의 의도 쯤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엔 두 사람 모두 틀렸다. 멘델스존의 의도는 그 자신 밖에 알지 못한다. 음악이든 책이든 일단 창작되어 공개되면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실제로는 10정도의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다른 가치관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창작을 무한대로 확대 재생산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핵심이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책에서는 네루다가 자신의 시를 연애편지에 무단 도용해 문제가 생기자 마리오에게 그 시는 내 것이니 함부로 여기 저기 쓰지 말라고 하자 마리오는 "아니오 선생님! 그 시는 그 시를 읽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한다.)

 

그리고 연주자는 청중에게 존중받아야 할 존재지 존경받아야 할 존재는 아니다. 연주자로써의 존경은 청중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모든 연주자들이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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