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늙은 밤나무의 선물

정용주·시인 《고고춤이나 춥시다》의 저자




Url 복사하기
스크랩하기
블로그담기











▲ 정용주·시인 《고고춤이나 춥시다》의 저자
치악산 숲 속 내 움막 마당에는 산밤나무가 하나 있다. 가을에는 야무진 알밤을 마당에 툭툭 던져 놓고, 때로는 깊은 밤 함석 차양에 떨어지며 딱! 하고 소리를 질러 잠든 나를 놀라게도 한다. 이제 깊은 겨울이 오고 밤나무는 한 장 남은 달력의 날짜처럼 몇 개의 잎사귀만을 매달고 바람을 맞는다. 우툴두툴한 껍질에 파인 깊은 주름과 가지를 잘라낸 톱 자국을 몇 군데나 가지고 있는 밤나무는 아침에 방문을 열면 일찍 일어난 노인처럼 마당에 서 있다.

더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나무는 그러나 깊은 겨울을 건너는 동안 나에게 따뜻한 위로와 먼 곳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일깨워준다. 이 늙은 밤나무에는 딱딱해진 가지마다 알밤을 뱉어낸 쭉정이가 벌어진 목화송이처럼 매달려 있는데 숭숭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구름이 지나가고 때로는 보따리 같은 흰 달이 걸린다. 나는 이것을 그냥 쭉정이라 부르지 않고 쭉정이 꽃이라는 나만의 호칭을 주었다. 밤에는 바삭거리는 눈을 밟으며 새벽에 오줌 누러 나왔다가 고개를 들어 가지에 달려 있는 이 쭉정이 꽃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 먼 허공에는 수만 평의 메밀꽃밭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별이 반짝인다. 이것은 겨울 숲의 적막을 건너가는 내게 늙은 밤나무가 주는 선물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하나 더 깨닫는다. 누구에겐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존재란 없다고 나무는 말한다. 그가 내게 무언가 주지 않아도, 내가 그를 발견하고 느끼며 그에게 감사할 때,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된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정용주
나는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던 강원도 치악산 속에서 산다.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고, 도시에 살던 나는 그들이 떠나간 터로 돌아와 흙집 한 채에 짐을 풀고 토종벌을 키우며 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여섯 번째의 겨울을 맞는다.

도시에서 가끔 방문자들이 오면 강아지와 두 마리 닭만 어슬렁거리던 작은 마당이 북적거린다. 돌판 위에 삼겹살이 익고 웃음소리는 가랑잎처럼 굴러다닌다. 그들은 해발 700미터에 고적하게 자리 잡은 내 움막에서 보이는 경치에 감탄을 하며 날 부러워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꿈을 꾼다. 배낭을 메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오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올 수 있는 곳인데도 굳이 "짐 보따리를 싸서 들어오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에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애들 졸업시키고, 정년퇴직하고, 더 늙기 전에 돈을 모아 땅도 사고 그럴 듯한 집이라도 한 채 지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살아가면서 어느 때가 되어야 자신의 할 일을 다 끝내고 미뤄뒀던 삶을 시작해도 되는 때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지금의 모습이 결국은 제 살고 싶은 모습 아닌가 하는 것이다.

짧은 방문을 끝내고 어둑해진 산길을 내려가던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떠나온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차마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들을 갖고 있는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이 아니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멀쩡한 논에서 짠물이 나오니 참… "
섬진강 하구 농민들 '염분피해'로 생계 막막
광양만 매립·강 골재채취 따라 해수 유입
재첩도90% 급감… '남도의 젖줄' 말라가
水公등 뒷짐에 주민들 내주에 상경 시위


광양·하동=안경호기자 khan@hk.co.kr  



2일 오후 전남 광양시 진월면 인근 섬진강변에서 한 어민이 바닷물 역류로 폐사한 민물조개 재첩을 치우다 말고 주저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안경호기자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2일 오후 전남 광양시 진월면 인근 섬진강변에서 한 어민이 바닷물 역류로 폐사한 민물조개 재첩을 치우다 말고 주저앉아 허탈한 표정으로 섬진강을 바라보고 있다. 안경호기자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케엑, 퉤퉤! 물 맛이 더 짜져븐 것 같소. 에잇, 퉤퉤!"

2일 오후 전남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 자신의 양상추 재배 비닐하우스 앞에서 뽑아올린 지하수를 맛보던 김현홍(53)씨는 연방 침을 뱉어댔다. "염전도 아닌디 멀쩡한 땅에서 짠물만 나오고, 정말 미쳐블겄소. 이런디 농사를 짓겄소?"

지하수 관정 구멍을 우악스럽게 틀어 막던 김씨는 "섬진강(하구)에서 12㎞나 위쪽에 있는 곳에서 판 지하수가 이 모양"이라며 "목구녕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이 물을 끌어다 비닐하우스 난방용으로 쓰기는 하요만, 이 땜시 노랗게 변한 양상추를 보면 (농사를)때려 치우고 싶당께"라고 허탈해 했다.

'남도의 젖줄' 섬진강 하구에 농어민들의 한숨소리가 넘쳐 나고 있다. 바다로 흘러가야 할 강물이 오히려 바닷물에 밀리면서 바다화 해 섬진강을 밑천으로 살아가는 영호남(전남 광양ㆍ경남 하동)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 지류까지 차고 올라온 바닷물로 농업용수를 빼앗긴 농민들은 "물이 부족하다"며 아우성이다. 평생 섬진강 특산물인 재첩을 잡아 삶을 이어가던 어민들도 하나 둘씩 짠물로 변한 강을 등지고 있다.

"세상에 강에서 적조가 발생하고 감성돔이 잡힌다면, 볼짱 다 본 것 아니겄소?" 진월면 월길리에서 20년째 재첩잡이를 해온 양현호(63)씨는 넋이 반쯤 나가 있었다.


올해 최소한 30톤은 채취했어야 할 재첩을 겨우 3톤밖에 건지지 못해 1,000만원의 적자까지 본 터였다. "수년째 적조가 생기면서 재첩 씨가 말랐어. 그나마 건진 것 중 폐사한 게 절반 이상이여. 무담시 죽은 것 골라낸다고 인부 썼다가 돈만 날렸제. 올해도 빚 갚기는 폴세 틀렸어."

재첩 산지로 유명한 경남 하동군 신기리 상저구 마을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이미 하구 일대가 바다로 변하면서 생계기반을 잃은 주민들 대부분이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다.

주민 경강근(50)씨는 "재첩과 민물고기는 다 죽고 붕장어나 농어, 숭어 등 바닷고기만 잡힌다"며 "돈벌이가 없어진 마을 사람들 80% 가량이 인근 광양제철소나 하동화력발전소 등지에 잡부로 일을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바닷물의 역류는 현재 강 하구에서 상류쪽으로 20여㎞ 지점인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까지 집어 삼켰다. 이 곳 염분농도는 바다의 평균 염분농도 30~32‰(퍼밀ㆍ1퍼밀은 1,000분의 1)에 육박하는 26‰로, 이미 민물생태계는 파괴된 상태다. 이 때문에 강 중류에 있던 다압취수장도 상류쪽으로 4.6㎞ 올라가 새로 지어 이전했다.

바닷물이 섬진강을 거슬러 북상하는 것은, 강 하구와 연결된 광양만에 광양제철소와 율촌산업단지 부지 매립으로 수위가 41㎝ 높아지고 자치단체의 무분별한 골재 채취로 강 바닥이 2m 정도 낮아지면서 해수 유입량이 증가한 반면 주암댐 건설 등으로 섬진강 수량이 줄어든 탓이다.

실제 2003년 당시 건설교통부의 섬진강 수계 하천정비기본계획에 따르면 주암댐 건설 이후 강 중류인 경남 하동읍 송정지점의 초당 유입량이 98㎥에서 49㎥로 절반이나 줄었다.

게다가 현재 다압취수장이 하루 28만 톤의 섬진강 물을 뽑아올리고 있지만 주암댐과 섬진강댐에서 하천 유지용수를 흘려보내는 양은 1일 19만여 톤에 불과하다.

초당대 환경보건학과 조기안 교수는 "섬진강이 물을 주암댐과 취수장 등에 빼앗기면서 늘 수량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며 "강물이 마르면서 바닷물이 올라와 농어업 피해가 속출하는 만큼 한국수자원공사와 광양제철 등은 당장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관계 기관들은 뒷짐만 지고 있다. 수자원공사는 2006년 4월 섬진강 주민들과 섬진강 환경영향 및 농ㆍ어업 피해 조사를 하기로 합의해 놓고도 3년째 연구용역발주도 하지 않고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도 광양만권 부지 매립으로 인한 수위상승 등 섬진강 피해를 인정하면서도 주민들의 대책 마련 요구에는 귀를 막고 있다. 심지어 영산강유역 환경관리청은 섬진강 바다화와 염해 피해 실태 등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전문가인 초당대 (조기안) 교수에게 물어보라"는 황당한 답변만 늘어놓았다.

광양 진월면 선소리 이기태(53)씨는 "주민들이 10년 넘게 염해 피해를 호소하고 섬진강 살리기에 나설 것을 요구했는데도 책임 지고 나서는 곳 하나 없다"며 "지금껏 제대로 된 섬진강 환경피해실태 조사도 한 번 없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참다 못한 섬진강 주민들이 포스코와 수자원공사 등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포했다. 섬진강 바다화 방지와 염해 피해 대책 등을 촉구하는 대규모 상경 시위를 벌이기로 한 것.

영호남 농어민 염해 피해 대책위원회 김영현 상임대표는 "섬진강 바다화로 인해 생계를 위협 받고 있는 광양과 하동 지역 농어민들은 줄잡아 10개 읍ㆍ면ㆍ동 3만여 명에 달한다"며 "8일 포스코 본사 앞 시위를 시작으로 전면투쟁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기획] 시간도 느리게 흐르는 '슬로시티'를 아시나요
아시아 첫 슬로시티들의 겨울풍경

사진·글=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화보 보기
쉬엄쉬엄 -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햇살이 따스한 오후 밭일을 끝낸 할아버지 한 분이 농기구를 지게에 지고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쉬엄쉬엄 -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햇살이 따스한 오후 밭일을 끝낸 할아버지 한 분이 농기구를 지게에 지고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구불구불 - 완도군 청산도에서 한 농부가 다랑이논 사이에 나있는 좁은 길을 따라 경운기를 몰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쉬엄쉬엄 -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햇살이 따스한 오후 밭일을 끝낸 할아버지 한 분이 농기구를 지게에 지고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무럭무럭 -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의 소나무 숲사이에서 마을 주민이 표고버섯을 따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무럭무럭 -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의 소나무 숲사이에서 마을 주민이 표고버섯을 따고 있다.




하늘하늘 - 신안군 증도에서 바닷물이 빠지자 살아 있는 갯벌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하늘하늘 - 신안군 증도에서 바닷물이 빠지자 살아 있는 갯벌이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따끈따끈 -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마을에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전통 쌀엿을 만들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따끈따끈 -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마을에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 전통 쌀엿을 만들고 있다.



슬로시티(slow city)를 아시나요?

잿빛 하늘의 서울을 떠나 쉬지 않고 4시간 반 정도 차로 달려 도착한 전남 담양군 삼지천마을. 구불구불 골목길에 오래된 돌담들이 도심에서 온 객을 정겹게 맞이한다.

"광주 사는 딸애가 전화해 좋은데 살응께 부럽다고 하는디 난 40년간 여서 살았지만 다른게 없당께." 라며 이 마을에 사는 윤애영(71) 할머니는 마당텃밭의 배추를 뽑으며 담담한 미소를 짓는다.

아시아 최초로 전남의 4개 지역인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마을, 장흥군 유치면,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가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을 신청해 지난해 12월 인증 받았다.

슬로시티는 '전통을 슬기롭게 보전하고 주민 중심의 생태주의를 표방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발전과 진화를 추구해 나가는 도시' 라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며, 급하고 획일적이며 생산성에 매달리는 생활에서 벗어나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자연과 인간의 삶의 조화 속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 1999년 10월에 슬로푸드 운동을 펼치던 이탈리아의 포시타노를 비롯한 4개의 작은 도시 시장들이 모여 슬로시티를 선언하면서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 세계 10여개국 100여개 도시가 가입돼 있다.


슬로시티 가입은 인구가 5만명 이하이고 도시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환경정책 실시, 유기농 식품의 생산과 소비, 전통 음식과 문화 보존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며 구체적 사항으로 친환경적 에너지 개발, 차량통행 제한 및 자전거 이용, 나무 심기, 패스트푸드 추방 등을 실천해야 한다.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 마을은 예전부터 보존된 돌담길과 한옥 문화 그리고 전통적인 한과와 쌀엿 만들기, 장흥군 유치면은 아름다운 자연휴양림과 지렁이 농법 및 소나무 숲속의 표고버섯 재배 등 친환경 농업, 완도군 청산도는 섬의 전통 농경문화인 구들장 논과 다랑어 논 및 인근 바다에서 맨몸으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생활모습, 신안군 증도는 여의도 4배 면적의 염전과 살아 있는 갯벌 및 자전거 이용 가능한 교통시스템 등이 주목을 받아 슬로시티에 지정되었다.

8년간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탈리아의 그레베인 키안티가 전통적인 삶과 자연환경을 활용해 세계적인 관광지로 변모한 후 도시보다 삶의 질과 만족도가 높고 경제적 수입도 훨씬 나아졌듯이 이제 1년이 지난 전남 4개 지역의 슬로시티들도 지역적 특수성을 바탕으로 도시화가 아닌 전통이 살아 숨쉬는 마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침 지하철 훈남~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소나무집 2008-12-0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가본 청산도가 있네요.
참 좋은 곳, 12월중에 한 번 더 가볼 예정이랍니다.

달빛푸른고개 2008-12-09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군요.
 

[2008 순위의 재구성] <1> 추격자 수익률 '추격불허 1위'
영화 '우생순' 은메달
최고 흥행작 '놈놈놈' 수익률은 8위… '모던보이' 수익률 최저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12월이다.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일보 문화부는 관객 동원이나 시청률, 음반 판매량 등의 단순 수치를 넘어선 '2008 순위의 재구성' 시리즈를 통해 올해 대중문화의 진정한 강자를 꼽아본다. 첫 대상은 충무로. 올해 개봉된 영화 중 관객 동원 1~30위의 영화를 대상으로, 수익률 분석을 통해 흥행 순위를 재구성했다.

■ 가장 장사 잘한 영화는 '추격자'

올해 가장 장사를 잘한 영화는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였다. 상반기 최고 히트작인 '추격자'의 순제작비는 37억원, 마케팅비 등을 포함하면 총 60억원이 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추격자'의 매출액은 총제작비의 5.6배인 339억4,200만원에 달했다. 극장이 영화관람료 수입 50%를 가져가는 영화계 관례를 따지면 '추격자'의 순수 수입은 170억원에 이른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도 알짜 장사를 했다. 총제작비 54억원으로 5배 가까운 261억4,200만원을 벌어들여 '추격자'의 뒤를 이었다. 문소리와 김정은 등 출연 배우들의 열연과 임순례 감독의 연출력이 어우러진 결과. 때마침 불었던 핸드볼 바람도 흥행에 훈풍으로 작용했다.

3위는 여름 막바지 극장가를 점령한 '고死: 피의 중간고사'가 차지했다. 주연 이범수가 평소 10분의 1 수준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해 화제를 모았던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짠돌이 정신을 강력하게 발휘했다.


총제작비 25억원을 지렛대로 10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액 대비 수익률이 412%다. 관객 동원으로만 따질 때 '고死: 피의 중간고사'의 순위는 9위에 그친다.

수익률 4위는 410%를 기록한 강우석 감독의 '강철중: 공공의적 1-1'이 차지했다. 관객 동원 순위 14위에 그친 '영화는 영화다'(386%)가 5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영화는 영화다'는 불황의 수렁에 빠진 충무로에 제작비 절감의 적절한 성공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 '님은 먼 곳에' '모던 보이' 빛 좋은 개살구

매출액 덩치는 컸지만 정작 수익률은 낮은 빛 좋은 개살구 식 영화도 있었다. 대표적인 영화가 관객 동원(181만명) 7위를 차지한 '님은 먼 곳에'. 총제작비 100억원이 투입된 '님은 먼 곳에'는 134억9,500만원의 매출을 올려 수익률 118%에 그쳤다.

극장과의 분배를 감안하면 제작비의 절반 가량만을 건진 셈이다. 흥행 순위(208만명) 6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도 수익률(178%) 순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올해 최고 흥행작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도 이름값을 못했다. 수익률 229%로 8위다. 200억원의 총제작비를 들여 459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는데, 제작사와 투자배급사에 떨어진 돈이 230억원 정도로 순 수익은 30억원에 불과했다. 일각에서 총제작비가 더 들었을 거라는 추측도 제기돼 실제 수익률이 더 낮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수치상 수익률이 가장 낮은 영화라는 불명예는 '모던 보이'가 떠안았다. 총제작비 96억원으로 추정되는 '모던 보이'는 49억9,920만원밖에 벌지 못했다. '고고70'(총제작비 66억원, 매출액 38억6,400만원)과 '울학교 이티'(총제작비 50억원, 매출액 41억5,700만원)도 바닥권의 수익률을 보였다.

뜬 별 - 하정우 추격자 등 3편서 활약… 김남길 팔색조 변신 눈길



하정우, 소지섭, 김남길, 손예진(왼쪽부터)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하정우, 소지섭, 김남길, 손예진(왼쪽부터)



올해를 통틀어 스크린에서 가장 돋보인 배우는 하정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상반기 최고 인기를 누린 화제작 '추격자'에서 속내를 알 듯 모를 듯한 연쇄살인범 역을 '치가 떨릴 정도로' 소화해내 대중에게 이름 석 자를 확실히 각인시킨 그는, 이어 전도연과 호흡을 맞춘 '멋진 하루'도 자신의 영화로 만들었다.

2003년 '마들렌'으로 데뷔한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존재가 미미한 배우에 속했지만, 올해에만 '비스티보이즈'까지 3편의 영화를 찍는 등 가장 바쁜 남자 배우로 떠올랐다.

'영화는 영화다'의 소지섭과 강지환도 TV용 배우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스크린을 장악할 수 있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는 수확을 거뒀다. 특히 소지섭은 군복무의 공백기를 딛고 컴백에 성공했다.

은근히 자기 영역을 넓힌 또 다른 남자 배우는 김남길이다. 그동안 드라마 등에서 별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그는 '강철중'에서는 악당으로, '모던 보이'에서는 냉철한 일본 검사로, '미인도'에서 순박한 연인으로 다채로운 변신을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만든 것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세 주연배우 정우성 이병헌 송강호는 스타일리시한 영화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현했지만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이병헌 정도다.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관심을 모은 이병헌은 할리우드 영화 'G.I. 조'에 출연하는 등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반면 여배우들은 2년째 기근이라고 할 정도로 뜬 별이 드물다. 자신의 이미지를 십분 살린 손예진('아내가 결혼했다')이 그나마 유일하게 주목받았고 신인 중에는 '과속스캔들'의 박보영이 눈길을 끌었다. 주연이었지만 공효진('미쓰 홍당무') 김혜수 박해일(이상 '모던 보이')은 흥행성적과 캐릭터의 한계로 크게 남는 장사는 못 했다는 평가.

대신 나홍진('추격자') 이경미('미쓰 홍당무') 장훈('영화는 영화다') 등 신인 감독들이 대거 인정받은, '신인 감독의 해'였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