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론'에 무너진 '촛불 교육감'의 꿈
[취재후기] 1.8%p 차이 박빙 승부 벌인 주경복 후보 캠프의 마지막 표정

  송주민 (jmseria)


 




 








  
낙선이 확실시 되자, 선거 사무실로 들어와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 주경복 후보
ⓒ 송주민
주경복





'시민 후보'를 자청했던 주경복 서울시교육감 후보, 자신의 당선을 위해 지난 13일간 불철주야로 뛰었던 선거 운동원들 앞에 그가 섰다. 공정택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31일 자정 무렵이었다.

 

"부족한 저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준 서울 시민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선거기간 동안 서울 교육의 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나는 낙선을 했다."

 

'민주 교육감'을 외치며 주 후보를 도왔던 운동원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눈시울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장시기 동국대 교수는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장임원 전 중앙대 교수도 "민주화의 역정이 참으로 가파르다"며 갑갑한 심정을 드러냈다.

 

'촛불 교육감'의 꿈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공정택 후보 당선됐다. 주경복 후보는 38.31%를 얻어 2만2천여표 차이로 공정택 후보(40.09%)에 결국 패했다. 13일간 목이 터져라 "주경복"을 외쳤던 운동원들은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문 채 말을 잊지 못했다.   

 

"'전교조 색깔공세'에 무너진 현실, 너무도 안타깝다"

 

주 후보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모든 운동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상기된 얼굴의 지지자들을 다독거렸다.

 

그러나 지지자들의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선거 운동기간 동안 자신들의 자택처럼 오갔던 선거사무실 한 가운데서 연거푸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이들은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집니다'란 문구 하나에 맥없이 무너진 현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고 말했다. 아직도 색깔론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모습이 한탄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2008년의 한국사회, 3달여 동안 촛불이 일렁였던 서울에서는 자신들이 내세운 '어울림의 교육'이 '빨간색 이념공세'를 넘어설 수 있을 거라 여겼다고 말했다.

 

서울 시민들은 결국 주 후보의 '촛불' 대신 공 후보가 내세운 '전교조 색깔공세'에 손을 들어 줬다. 개표 전 "선거 막판이 갈수록 색깔론 공격이 심해져 승부를 낙관하긴 어렵다"는 운동원들의 말이 결국 현실이 된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지자는 "기대가 컸기에 상심이 너무나도 크다"며 "특히 주 후보는 모든 후보로부터 '전교조 후보'라는 색깔공세를 받았는데, 이런 낡은 방식이 아직까지도 큰 반대급부 형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다"고 울먹이듯 말했다. 

 

선본 대변인 역할을 했던 박범이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서울지부장도 "민주화됐다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색깔론이 횡횡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던 선거였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있는 '색깔의 벽'을 어떤 방식으로 뛰어 넘을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비록 졌지만 국민들의 교육 개혁 열망 확인했다"

 







  
낙선이 확실시 되자, 선거 사무실로 들어와 소감을 밝히고 있는 주경복 후보
ⓒ 송주민
주경복



'민주 교육감'을 외치며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던 주 후보가 얻어낸 성과도 분명히 많았다. 그는 '이명박식 경쟁만능교육 심판'과 '대안형 협동교육'을 전면에 내걸고 막강 조직력을 자랑하는 현 교육감 공정택 후보와 2%p내의 초 접전 승부를 벌였다.

 

또한 주 후보는 강남·서초·송파 등 이른바 '강남벨트'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근소하게나마 공 후보를 압도했다. '강남벨트'의 계급적 몰표에 맞서 이 정도 득표를 보인 것은 사실 매우 고무적인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박범이 대변인은 "4년 동안 교육감을 하며 온갖 방법을 통해 표를 조직한 공 후보의 기득권에 맞서 불과 두 달 정도 선거를 준비한 주 후보가 이렇게 당당하게 싸웠다는 것은 큰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며 "비록 졌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교육 개혁에 대한 열망을 온 몸으로 느꼈다"고 말했다.

 

주 후보도 "오늘은 비록 낙선했지만 앞으로도 교육 개혁을 위한 움직임은 많은 시민사회단체와 시민 여러분과 함께 계속 이어질 것"이라며 "서울 시민들의 소중한 지지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우리 교육이 경쟁만능·입시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중심교육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 하겠다"고 강조했다.

 

주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장임원 전 중앙대 교수도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앞을 바라봤다. 

 

"오늘 우리는 선거에서 졌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민주화의 길은 앞으로도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여기서 희망을 잃지 말자. 계속해서 민주화를 향한 산을 넘고 또 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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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31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지만, 현실의 지평을 확인한 것이기에 이겼든 졌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독도는 예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7/30] '독도 연구 총서' 펴낸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성용 교수
 
  2008-07-30 오후 5:18:15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최근 일본이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 영유권'을 명기하면서 불거진 독도 파문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하고 미국 의회 도서관이 독도의 지명 표기 변경을 재추진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더욱 커지고 있는데요. 이런 가운데 독도가 예로부터 한국어민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밝힌 연구서가 발간됐습니다.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성용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울릉도와 독도를 연구한 끝에 펴 낸 독도연구총서 독도, 울릉도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사회조직연구라는 책인데요. 오늘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영남대 박성용 교수와 함께 어업관습을 비롯한 생활문화사를 통해 밝혀진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성용 교숩니다. 박성용 교수는 1956년 경북 청도 출생으로 1977년 영남대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했고 1990년 프랑스 Aix-Marseille 1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4년부터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프랑스 파리 고등사회과학원 초청교수와 영국 런던대 방문교수를 역임했고 올해부터 영남대 박물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주요저서로는 <울릉도, 동해안 어촌지역의 생활문화연구> <독도를 보는 한 눈금 차이> 등이 있습니다.
  
  박성용 교수가 현재 KBS 대구 총국에 나와 계신데요. 연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인규 :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박성용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인규 : 네, 바쁘신데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독도 문제를 가지고 일본과 많이 싸웠지만 지금까지는 독도를 우리 선조들의 삶과 연결해서 잘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내신 책이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어민들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입증하는 그런 증거들을 많이 내셨어요. 어떻게 이런 책을 내시게 된 건가요?
  
  
▲ ⓒ프레시안

  박성용 : 그 동안 울릉도 독도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관심이 있었지만 특히 익명의 인간들이 삶의 흔적을 남긴 그런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화인류학적인 측면에서 독도, 울릉도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독도는 그냥 바위섬인 줄만 알았더니 거기에 우리 선조들이 삶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새롭기도 한데요. 영남대의 독도연구소라는 데가 있더라고요. 거기서 이번에 내신 책이 독도연구총서 2집이고 1집이 독도, 울릉도의 역사라는 책도 내셨어요. 1집은 어떤 내용의 책이었습니까?
  
  박성용 : 1집은 주로 우리의 사료, 고문헌을 중심으로 해서 독도가 어떠한 우리의 영유권으로서 의미를 가지느냐 이런 문제에 대해서 주로 천착을 했습니다. 특히 과거의 우리의 연구자들이 공도 정책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박인규 : 공도라는 것은 섬을 비운다는 말씀이시죠?
  
  박성용 : 네, 그러나 그것보다는 수토 정책, 이게 중요하다는 거죠.
  
  박인규 : 우리가 독도에 관해 말을 많이 하면서도 이렇게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서 우선 반갑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박성용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독도문제를 연구하시게 되셨습니까?
  
  박성용 :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가 한국의 문화적인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촌과 어촌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역사의 저편 속에서 그냥 의미 없게 살아 온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해, 이것은 울릉도 주민들, 또 독도와의 관련성, 이런 것들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특히 일제 휘하에 우리 울릉도 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는 전혀 제대로 언급된 바가 없기 때문에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박인규 : 처음 연구를 시작하신 게 언제부터죠?
  
  박성용 : 저는 1997년부터 독도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가졌습니다.
  
  박인규 : 10년 이상 연구를 해 오신 거군요. 저희가 그동안 독도가 우리 땅이다. 라고 했을 때는 예전에 신라에서 이사부 장군이 울릉도를 정복했다던가. 또 독도에 관련된 옛날 지도들 혹은 국제 조약 이런 문제를 가지고 많이 얘기를 했었는데. 독도와 우리 선조들의 삶을 연결시켜서 이른바 문화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그래요?
  
  박성용 : 예, 아마 그런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제가 먼저 접근을 하게 된 거겠죠.
  
  박인규 : 이런 류의 책이 이전에는 없었나요?
  
  박성용 : 그래서 문화인류학을 하는 입장에서 울릉도를 연구한 경우는 꽤나 있습니다. 그러나 독도의 공간이 가지는 어떤 의미, 현상학적인 측면에서의 해석 이런 것들은 좀 거의 지금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인규 : 문화인류학적 접근, 이른바 독도가 우리 선조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독도 영유권 싸움과는 어떤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박성용 : 그래서 잘 아시다시피 영유권이라는 것은 그곳에 사람이 평화적으로 지속적으로 삶을 영위했느냐 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과거의 우리의 연구는 문헌을 통해서 한국이 지배적으로 해 왔다. 하는 그 정도였죠. 그래서 저는 실제로 울릉도 어민뿐만 아니라 동남해의 어민들이 독도에서 삶을 영위해 왔고 나아가서는 교육까지 한 그런 사실들을 집중적으로 밝히고자 했습니다.
  
  박인규 : 그렇다면 말이죠. 지금 울릉도 주민이나 또는 동남해안에 있는 어민들이 독도를 자신들의 삶의 공간으로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그 시점을 언제부터라고 얘기 할 수가 있을까요?
  
  박성용 : 그래서 우선 동남해안 주민들의 경우에는 우리 사료 상에 보면 벌써 17세기지 않습니까? 안용복 선생이 1993년, 96년 이미 독도를 경유해서 일본을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갔다는 그 자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요. 이미 당시에 우리의 어민들에게는 독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고 거기에 들렀다는 것입니다.
  
  박인규 : 안용복 선생이 독도를 거쳐서 일본에 가셨다면 독도에서 내리셨나요?
  
  박성용 : 그렇습니다. 직접 거기 가서 일본인들이 어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들을 못하게 했죠.
  
  박인규 : 책을 읽어 보니까 "여기는 조선 땅이다. 너희들은 오지마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그때도 벌써 독도를 주변으로 어로 행위가 있었군요?
  
  박성용 : 그렇습니다.
  
  박인규 : 그 뒤로 1882년인가요? 고종이……. 울릉도 개척령이란 것은 어떤 내용입니까?
  
  박성용 : 고종이 울릉도가 그동안 수토 정책을 행하는 가운데 일본인들이 빈번이 내왕을 하게 된 거죠. 그리고 또 실제로는 울릉도를 둘러싼 주변 독도를 포함하는 이런 여러 공간에 대해서 식민지 여러 나라들의 어떠한 정치적인 문제 이런 것들이 강화되는 이런 측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춰서 우리 주민들을 울릉도에 이주를 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기 위한 그런 정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섬을 비워두고서 지키는 수토정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섬을 방어하면서 어민들 생계를 보장하려는 그런 측면에서 행해진 정책이라 할 수 있죠.
  
  박인규 :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유인도화 정책 이런 것이겠군요. 말하자면. 어제 한승수 총리가 독도를 방문하셨는데요. 거기서도 독도는 울릉도의 자도, 아들 섬이다. 그런 말을 했는데. 실제로 울릉도 주민들도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면서요?
  
  박성용 : 예, 그래서 지금 모도와 자도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7세기 이후에 쭉 이런 관념들이 섬 사이에 정착이 되었지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울릉도와 독도를 하나의 지배 사회에 있어서 기본 된 관계로 본 겁니다. 이것은 일본에서 이미 언급 되 온 바가 없는 지금까지 언급돼 온 바가 없는 그런 내용들이죠. 그래서 그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한국인들에 의해서 점유되고 인식되었다는 겁니다.
  
  박인규 : 이미 예전부터.
  
  박성용 : 네네.
  
  박인규 : 97년부터 울릉도와 독도의 삶에 대해서 연구하셨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을 민족지 방식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방식입니까, 이게?
  
  박성용 : 민족지라는 것이 우리 문화인류학 분야에 있어서는 상이한 각 민족들의 삶을 기록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활 전반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술하는 그런 결과물이죠.
  
  박인규 : 울릉도 사람들이 예전부터 실제로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현지에 있는 분들한테 얘기를 들어서 정리한다, 그렇게 정리하면 되나요?
  
  박성용 : 네.
  
  박인규 : 독도가 한국 어민들의 생활공간이었다. 예로부터.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인 증거를 봐야 할 것 같고요. 울릉도 주민이 옛날부터 이미 조선시대부터 울릉도에서 독도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서요?
  
  박성용 :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만, 이미 안용복의 경우 들르고, 두 번째는 고종이 수토정책을 이미 시행을 해서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이미 다 세계에 알린 것입니다. 이것 외에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분명히 울릉도와 독도의 어떤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런 이후에 쭉 구술사를 통해서 해방 이후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울릉도 주민들이 동해안 주민들과 함께 교육활동을 한 그런 사실까지 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공간이었음은 분명한 거죠.
  
  박인규 : 울릉도 주민들이 예전에 하늘의 별자리만 보고 어느 방향으로 가면 독도로 간다, 어떤 바람이 불 때. 그것을 알았다고 한다는 건 예전에도 자주 독도를 드나들었다는 얘긴데요. 그렇다면 독도에 실제로 사람이 산 적도 있습니까?
  
  박성용 : 그래서 우리 기록에 독도에 사람이 상주를 했느냐 안했느냐 그런 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이 점은 더 우리가 사료를 통해서 연구를 해야 되겠습니다만.
  
  박인규 : 드나들긴 했지만 정착을 한 기록은 없다.
  
  박성용 : 네, 그러나 울릉도 주민들이 천체 항해를 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이미 우리의 조상들로부터 문화적인 전승이 이뤄지면서 학습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독도를 찾아갈 때 출발할 때는 삼태성을 보고 돌아올 때는 북두칠성을 보면서 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는 실제로 그렇게 행해졌고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했던 하나의 항해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어떤 천체 항해 외에도 항해법이 다양한 게 있습니다. 독도를 찾아 갈 때 안개가 많이 끼어서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삼각 항해법이란 것을 했었어요. 독도를 가기 위해서 어떤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일정한 거리를 갔다가 다시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원점으로 와서 원점에서 다시 왼쪽으로 갔다가 왼쪽에서 다시 원점으로 오고 그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서 찾는 이런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상당히 전통적인 항해법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인규 : 그 말씀은 한마디로 독도가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관련된 것으로는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 주변에 부는 바람을 부르는 특정한 명칭이 있다면서요? 소개 좀 해 주시죠.
  
  박성용 : 바람이라는 것을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 하겠지만 저희들 입장에서는 민속 과학적인 체계가 있는 그런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동새라고 하고 서쪽에서 부는 바람을 댕갈, 남쪽에서는 정갈, 이렇게 부릅니다, 그 외에 북동풍의 경우에는 정새, 그리고 북동과 동쪽 사이에는 인당풍 등 여러 가지 바람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민들이 농촌에 사는 경우와는 다르게 바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민족 과학적인 체계, 지식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박인규 : 동새, 댕갈, 정갈 바람 이런 말들은 다른 데에서 안 쓰는 말입니까?
  
  박성용 : 이런 개념들은 동남 해안 어민들이 쓰는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바람을 인식하는 태도가 하나의 우리 조상으로부터 문화 전승을 받는 그러한 과정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고 보는 거죠.
  
  박인규 : 독도 주변에서 고기가 잘 잡히는 지역을 걸이라고 불렀다면서요?
  
  박성용 : 해저 지형에 대해서도 역시 나름대로 정확하게 인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생각하기에는 과거에 과학적인 기계가 발전되지 않은 가운데 어떻게 해저 지형을 알 수 있느냐 하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여러 가지 당시에 실을 넣어서 깊이를 잰다던가, 물속에 들어가서 그 상황을 살핀다든가 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걸 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 밑에 있는 산 모양입니다. 고기 서식지요. 그래서 독도로부터 약 2.5km 정도 되는 그런 영역에 고기가 나는 다양한 바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박인규 : 울릉도의 주민들로부터 울릉도의 선조와 삶에 대해서 많이 연구 하셨으니까 흔히 우리들이 울릉도나 독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상식과 현지에 계시는 분들이 알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까?
  
  박성용 : 일반인들이 관광을 했을 때 울릉도의 경우에는 굉장히 아름다운 섬이고, 독도는 우리 섬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독도를 가보시면 이미 중간 수역에 있기 때문에 일본 배들이 다닙니다. 그래서 전체적이 상황으로 봐서는 굉장히 미묘한 영역으로 한국과 일본이 여러 가지 다양한 절충과 화해의 대립을 갖는 그런 공간이구요, 또 울릉도 주민의 경우에는 육지에 있는 분들보다도 더 심각하게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조들이 이미 이러한 문제에 직면을 했었고 독도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박인규 : 일본의 독도를 연구하는 가와가미 겐조라는 사람이 66년도에 죽도, 독도의 일본식 이름이죠. 죽도의 역사학적 지리학이라는 책을 내면서 울릉도에서 독도를 보려면 해발 130m 이상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울릉도는 밀림이었기 때문에 울릉도에서 독도를 몰랐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했다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박 교수님께서 확실하게 반박을 하셨다면서요?
  
  박성용 : 가와가미 겐조의 논리는 우선 한국의 사류나 실제에 있어서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료를 사용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하학적인 논리로 울릉도에서는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 130m 이상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당시 울릉도는 밀림이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활공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죠. 왜냐하면 당시에 이미 선조들, 예컨대 섬 주민들, 개척령 이전에 있었던 분들은 보면 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았고요, 또 개척령 이후에도 제가 책에서 말씀 드렸듯이 행남이나 새각단, 석포, 백운동 등지는 108m, 200m, 280m, 440m 정도 됩니다. 이런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독도를 반드시 본 거죠.
  
  박인규 : 실제로 울릉도에 가서 보니까 보이더라, 이런 말씀이신 거죠.
  
  박성용 : 그렇죠.
  
  박인규 : 여러 가지 모든 면으로 봐도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게 분명한데도 일본이 우기고 있으니까 참 갑갑하네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 오늘은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성용 교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로고)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최근 독도 연구 총서 2집, 독도, 울릉도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사회조직연구란 책을 펴낸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송용 교수와 함께 어업관습을 비롯한 생활 문화사를 통해 밝혀진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영토였음 여러 가지 증거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습니다.
  
  박인규 : 박 교수님, 이번 책을 내시면서 여러 가지 많은 자료를 정리하고 연구 하셨는데, 힘들었던 점은 없었습니까?
  
  
▲ ⓒ프레시안

  박성용 : 실제로 자료 제보자들을 직접 만나야 하구요, 이 제보자들이 10년 되는 동안에 많은 분들이 작고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 또 그런 분들의 선조 분들이 남겨 놓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료들을 직접 모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점차 사라져간다는 아쉬움이 있었고요, 또 자료 제보자들 사이에 상이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일일이 체크를 해야 하고 실제와 어떻게 부합이 되는지, 이런 것을 검증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 특히 가와가미 겐조의 이야기가 맞는 지를 검증하기 위해서 울릉도 곳곳을 10년 동안 다 다녔습니다. 특히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 때에는 실제 답사하기 힘든 그런 면들이 있었죠.
  
  박인규 : 박사님 연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분명히 독도는 우리 땅인데, 일본이 부득불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유,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박성용 : 아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 합니다. 우선 일본이 장기적으로는 국제 재판소에 이러한 문제를 제기할 계획이 있을 겁니다. 분쟁지역화하는 문제죠. 경제적인 면에서 독도가 굉장히 중요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해양 자원의 보고이구요. 또 군사적으로는 전략적인 요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 외에 독도를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여러 가지 자신의 영유권을 확보하고 정당하게 주장하는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에서 독도를 끊임없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정치적인 의도라고 생각 합니다.
  
  박인규 : 저희가 보기에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우기고 있고, 더 중요한 건 국제 여론이랄까요? 이게 썩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같지는 않아요. 최근 미국 지명위원회가 독도를 미지정 지역으로 변경을 했고, 의회 도서관에서도 독도 표기를 리앙쿠르트 암석으로 바꿨다고 하고, 미국이 예전에는 중립이었던 것 같은데, 어제도 사실 한승수 총리가 독도에 가서 미국의 속내는 중립을 강조하면서 일본을 편드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미국의 태도 변화랄까요? 어떻게 보십니까?
  
  박성용 : 우리가 신한일어업협정 이후에 독도가 중간 수역에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 세계 사회에 독도에 대해서 일본 측의 논리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독도의 지명 문제에 관해서는 식민지를 지배했던 나라 이외에 제 3세계 이런 나라들 까지 우리의 독도의 지명에 대해서 알리는 연대가 필요하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실상을 알려야 하는 거죠.
  
  박인규 : 중요한 것은 저희들 끼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여러 가지 증거를 제시하기 보다는 이걸 외국에 잘 아려야 할 것 같아요. 우선 이번 저서와 관련해서 일본학자들과 논의를 한 적이 있으십니까?
  
  박성용 : 일본 학자들 중에는 독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지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는 언제든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러시아나 중국, 이런 여러 나라들의 학자들과 함께 동아시아의 영유권 문제에 대해서 바람직한 방향이 어떻게 정립이 되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도 논의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박인규 : 많은 분들이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서 안에서만 떠들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논리와 근거를 해오에 많이 알려야 한다고 이야기 하면서 실제로 대외 로비랄까요. 홍보에 대해서는 우리가 뒤지는 게 아니나, 이런 이야기도 하는데, 혹시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운 부분이 없습니까?
  
  박성용 : 독도 문제가 외국의 경우에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상당히 일본 측의 견해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들에서 보면 일반 지식인들이 독도나 동해라는 이런 쪽보다는 오히려 다케시마 또는 sea of Japan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학계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하겠고요, 정부 당국자들은 앞에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세계 사회의 식민지를 경험했던 나라들, 이런 나라들에 대해서도 좀 더 관심을 가지면서 독도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많은 홍보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인규 : 학계에서는 독도에 대한 논리나 근거를 개발을 하고 정부에서는 그런 것을 해외에 홍보를 많이 하고, 이런 역할 분담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독도와 관련된 총서 3집을 계획하고 계십니까?
  
  박성용 : 저는 개인적으로 독도의 역사 문화 지도를 작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소 측에서는 3집으로 아마 생활 문화에 관한 그러한 책이 곧 준비가 되리라고 생각 합니다.
  
  박인규 : 독도 연구소와 박성용 교수님의 활동을 기대를 해 보면서, 앞으로 독도와 관련된 연구 계획이나 못 다하신 말씀 있으시면 마지막 정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성용 : 넓고 큰 차원에서는 세계 사회에서 이런 영토 문제에 대한 국가 전략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에 대한 연구가 더 심화 되어야 하겠고요, 좁은 차원에서는 동아시아에 생기는 여러 가지 민족주의 문제, 나아가서는 영유권과 관련된 아시아의 공동체 문제, 이런 것 까지도 넓혀 볼 생각입니다. 그런가 하면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서는 생존해 있는 노인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의 삶과 경험, 역사적인 실천 이런 문제도 다루고요, 독도 울릉도에 대한 문화 지도를 화급하게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일본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을 세워서 차근차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데에 비하면 우리가 준비가 부족 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앞으로 박성용 교수라든가 영남대 독도 연구소 등에서 독도 문제에 대한 정교한 논리와 근거가 개발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 오늘은 최근 독도 연구총서 2집을 출간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박성용 교수와 함께 어업관습을 비롯한 생활 문화사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입증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박인규였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박인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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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만난사람] “부동산 거품 붕괴, 이제 시간문제일 뿐”
‘경제 위기’ 경고하는 김광수 경제연구소장
 
 
한겨레 정남구 기자 이정아 기자
 








 

» 김광수 경제연구소장
 
IMF이후 늘어난 가계부채 ‘시한폭탄’
친재벌 정책으로 기술벤처 설 곳 잃어
노동자 임금수준 올라가는 게 ‘성장’


“사회 구성원들이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게 경제 운용의 기본목표인데, 우리나라에선 중산층이 계속 붕괴하고 있습니다. 잘먹고 잘사는 것은 노동을 통해 실현하는 것이니까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일자리는 없고, 미래마저 불확실한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부동산과 주식 투기판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건전성이 사라지고 도박경제, 사기경제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김광수경제연구소 김광수 소장((49·[사진])은 우리 경제가 ‘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진단은 ‘저성장’이나 ‘고물가’ 같은 경제지표를 들이대는 이들과 뿌리부터 달랐다. 그가 강조하는 위기는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경세제민’과 정반대로 가는 한국경제의 흐름이다. 그는 우리 경제를 재벌에 짓눌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창출하지 못하는 불임경제, 생산보다 투기에 열을 올리는 투기경제, 사람을 값싼 생산도구로만 보는 머슴경제라고 지적했다. 발상의 대전환이 없이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크게 달라진 세계 경제환경 변화에 맞춰 우리 경제가 대응할 기반을 닦아야 할 시기에 정부가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을 그는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노무현 정부는 5년 동안 위기를 조금씩 키워 왔고, 새 정부는 한단계 더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기술벤처들이 끊임없이 탄생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갑니다. 일본에도 중견 중소규모의 기술벤처 기업층이 매우 두터워 대기업과의 유기적 공생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그게 없습니다. 외환위기 때 20~60위권의 중간 재벌기업들이 거의 사라졌는데, 이 또한 기술벤처적 뿌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역동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해 나갈 벤처기업, 중간 허리를 맡을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로 그가 ‘산업의 최정점에 있는 재벌기업들의 잘못된 지배구조’를 지목하는 것은 의외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대기업이 잘돼야 나라 경제가 잘된다’고 믿는 시대 아니던가?

“한국의 재벌들은 일제 시대에 약탈적 상업자본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시절에는 정·경·관 유착에 기대 성장해 왔지요. 90년대 들어 정부의 관심이 기술개발에 쏠렸지만, 국책사업 지원의 대부분이 상위 재벌그룹에 집중됐습니다. 기술벤처 기반을 구축하고 이로부터 글로벌 기업이 나올 수 있는 산업구조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상위 재벌이 기술개발을 독점하다시피 한 겁니다. 설령 성장 가능성이 있는 기술벤처 기업들이 나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술을 독점하려는 재벌들의 방해를 넘지 못하고 잡아먹힙니다.”




그는 우리나라엔 “기술벤처 기업이 재벌 하청기업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독자적으로 존립하기 어렵고, 그래서 역동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핵심 문제는 눈감아 버리고, 감세와 규제완화로 성장 동력을 확충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을 그는 “소수 대기업을 위한 엉터리 정책”이라고 잘라말했다. 처음부터 대놓고 재벌에 몰아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금산분리 경제원칙을 무시하고 금융산업까지도 다 재벌에게 주자고 하지 않습니까?”

정부가 이른바 ‘친기업’(비즈니스 프렌들리)을 주창하는 데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제든 기업이든, 성장의 목표는 국민이 다같이 잘먹고 잘살자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 수준이 올라가는 게 발전입니다. 사람을 머슴으로만 아는 경제는 일시적인 성장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습니다. 경제관료들은, 제조업은 중국에 밀려 더는 안 되니 서비스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서비스업 경쟁력을 강화하여 일자리를 만들려면 서비스업의 임금이 올라가야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에서 이발비가 괜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게 아니죠. 서비스업을 육성하려면 서비스업의 임금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부터 개발해야 합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국제유가 급등은 최근 우리 경제가 지고 있는 큰 짐이다. 하지만 그는 고유가를 내세워 경제가 어려운 핑곗거리를 찾기에 앞서 세계경제의 커다란 변화를 먼저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금리와 유동성 과잉 탓에 세계적으로 부동산 거품이 커진 것과, 브릭스 국가들이 새로운 세계경제의 성장축으로 떠오른 점을 주목해야 할 외부 환경으로 그는 꼽았다. 그런 상황에서, 외환위기 이후 폭증한 가계부채 문제가 우리 안의 시한폭탄이라고 그는 말했다.

“부동산 투기를 잡지 못한 것은 참여정부의 최대 실책이죠. 부동산으로 흘러든 그 많은 돈이 생산 쪽으로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성장 잠재력이 커졌겠습니까? 지금 일자리가 넘쳐서 고민하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

그 때 어떻게 해야 했다는 것인가? 그는 “집이 얼마에 거래되든, 건설업자들이 어떻게 주택을 분양하든 이는 정부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장가격을 통제하려하지 말고, 국민의 ‘주거권’ 보장을 위해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해법이 나온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정부가 법으로 수용 가능한 토지를 이용해서 임대료가 싼 질좋은 공공 임대주택을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게 해법입니다. 그러면 시장 임대료가 낮아지고, 집값도 낮아집니다. 주거비용이 낮아지면 국민의 삶의 질이 높아지고, 우리 경제의 경쟁력도 커집니다. 그런데, 왜 못했겠습니까? 떡고물을 떨쳐 버리지 못한 때문이었겠지요.”

그는 2005년부터 부동산 거품 붕괴 가능성을 경고해 왔다. 그는 “물가가 오르고 금리가 계속 상승하고 있어, 거품의 본격 붕괴는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말한다.

“2001년에서 2003년까지 부동산 붐은 시장금리 급락에 대한 가계의 부적응에 기인한 면이 큽니다. 은행도 소매 대출을 크게 늘렸지요. 미래가 불확실하니까 재테크 붐도 일었습니다. 이 때의 부동산 투기열은 수도권에 집중됐고, 재건축 아파트, 새도시 등과 겹쳐 있습니다. 하지만 2006~2007년에 일어난 2차 부동산 붐은 수도권에서는 뉴타운과 재개발에 기댄 ‘이명박 거품’이었습니다. 지방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행정중심 복합도시·혁신도시 개발에 뿌리를 둔 거품이 일었습니다. 붐은 이미 끝났지요. 지금은 거래가 급감해 있어요. 거품 붕괴 초기단계에서는 거래가 줄고 가격은 떨어지지 않는 기간이 1년 반에서 2년 가량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폭락하지요.”

적정 집값 수준을 얼마로 보느냐고 물었더니 “전셋값과 집값이 같아야 정상”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전세가격이야말로 실수요와 공급을 반영한 값인데, 그보다 집값이 비싸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집값 하락이 이어지면서 금융시장이 큰 혼란에 휩싸였다. 우리나라 은행들은 집값의 절반 이하로 돈을 빌려줘서 집값 거품이 터져도 금융시장에 큰 혼란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고 하자, 그가 또 피식 웃는다.

“미국에서도 다를 그렇게들 얘기했습니다. 금융회사들의 자기기만이었지요. 우리 은행들은 지금 예금총액의 130%를 대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은행은 160%를 빌려주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의 은행은 대출총액이 예금총액의 90% 가량입니다. 은행들이 양도성예금증서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외화를 단기 차입해 엄청나게 대출을 늘렸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은 자기기만이죠. 위기의식이 없는 게 가장 큰 걱정입니다.”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글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김광수 경제연구소장
 

■ 김광수 소장은

IMF때 대처보고서 ‘화제’

1997년12월3일, 우리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경제관료들조차 사태 전개를 잘 이해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 이틀 뒤 50여쪽짜리 한 보고서가 주요 경제부처와 청와대, 한국은행 간부들에게 건네졌다. 외환위기는 왜 발생했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담은 것이었다. 보고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김광수가 바로 그 보고서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노무라연구소 서울지점에서 일하던 그가 개인 자격으로 쓴 것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몇 달에 한번씩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정책결정에 참고가 될 보고서를 만들어 돌렸다.

그는 2000년 8월 주식회사 김광수경제연구소를 세워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일찍이 우리 사회에 없던 개인 독립연구소 실험이었다. 연구소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지식의 생산기관을”을 표방한다. 김 소장이 그동안 숱한 ‘돈’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온 힘이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기업이나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한 연구소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구소는 연구용역과, 보고서 판매를 수익원으로 한다. 연구소가 생산한 자료들을 다 받아보는 회원에게는 연간 300만원의 회비를 받는다. 그간 나온 보고서들은 <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 3권으로 묶여나왔는데, 단 한번도 추천사를 써 본 적이 없다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추천사를 썼다. 매주 발행하는 경제시평 등 세 가지 자료는 연 20만원에 받아볼 수 있다. 이른바 ‘시평회원’ 제도는 2006년 시작했는데, 올해 들어 회원이 본격적으로 늘고 있다. 김 소장은 “회원 증가로 연구원을 한 명 더 늘릴 수 있게 됐다”며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회원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구 인력은 김 소장을 포함해 4명이다.

인터넷 카페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cafe.daum.net/kseriforum)은 연구소가 세상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통로다. 지난해 7월 연 카페는 회원이 현재 1만2천명으로 불어났고, 방문자가 하루 3천~4천 명에 이른다. 김 소장은 “연구소가 생산하는 지식·정보의 질은 이제 충분히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렀다”며 “연구인력을 20~30명 수준으로 늘려 세상에 본격적으로 기여하는 단계로 접어들면, 연구소를 세상에 환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남 광주 △진흥고 △서울대 경영학과(석사) △도쿄대 박사과정 수료 △노무라연구소


정남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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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행복하게 살았는가를 가늠하는 척도 하나

"일출과 일몰을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멋진 곳에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이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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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25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나 멋진 곳'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많이 다르겠지요. 하루의 땀을 씻는 공사판 함바집 수돗가일 수도 있겠고, 새벽녘 고깃배 들어오는 포구 어시장일 수도 있겠고, '서울의 달'을 가장 가까이 바라보던, 그래서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던 드라마 소재가 되었던 곳에서의 저물녘일 수도 있겠고...
 

비폭력 외친 시인을 짓밟다니
 
 
 
한겨레 최재봉 기자
 








 

»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전경1이 진압봉으로 그의 팔을 쳐서 쓰러뜨린다. 꿈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를 뒤따라 오던 전경2가 방패로 어깨와 등을 찍어 다시 쓰러뜨린다. 앉은 채로 뒷걸음질쳐 도망가는 그에게 이번에는 전경3이 다가와 수평으로 눕힌 방패로 가슴과 관자놀이를 힘껏 가격한다. 가슴을 움켜쥔 채 쓰러져 신음하는 그에게 전경4와 전경5가 욕을 퍼붓고 손가락질을 하며 지나간다….

인터넷 한겨레(hani.co.kr)의 동영상 뉴스 ‘경찰 ‘무차별 폭력’ <한겨레> 생방송 요약’의 한 장면이다. 6월 29일 시청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야만적인 폭력에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린다.

피해자는 당시 과격시위를 벌이던 중이 아니었다.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그는 시민들에게 고립되어 있던 전투경찰 한 명을 구출해 주었다고 했다. 자신이 평화주의자이며 시인이라고 안심시키자 전투경찰은 자기도 대학에 다니다가 입대했노라면서 울먹이더라고 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길 한복판에서 열 명 정도의 전경이 진압대원들에게 쫓기던 시민들에게 포위된 것을 보고 비폭력을 외치며 다가서다가 전경이 벗어던진 철모에 얼굴을 맞고 코에서 피를 흘리며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지하철 출구 쪽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던 그가 시위대를 쫓던 전경들의 먹이가 된 것이다.

이 불운한 피해자가 다름 아니라 시인 함민복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퍼뜩 든 생각은 ‘왜 하필이면 함민복인가?’라는 것이었다. 함민복이 누구인가. ‘한국판 <우동 한그릇>’이라고나 할 시 <눈물은 왜 짠가>의 시인이 아니겠는가. 설렁탕 한 그릇을 두고 가난한 모자와 배려심 깊은 식당 주인이 펼치는 감동의 무언극에 코끝이 찡해졌던 이들이 많을 것이다(혹시 그에게 진압봉과 방패를 휘두른 전경들 중에도 있지 않을까). 사십대도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고 강화의 버려진 집에서 시만 쓰고 사는 ‘천상 시인’이 바로 함민복이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긍정적인 밥>)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경계하는 사람,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뻘>)며 “말랑말랑한 힘”을 예찬한 이 평화주의자에게 야수적인 폭력이 웬말이란 말인가.

현재 그는 왼쪽 관자놀이 부분이 심하게 부은데다 정신도 혼미한 상태이고, 오른쪽 어깨가 결리고 허리 통증도 심해 거동이 불편한 처지라고 한다. 그는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한 전경들을 고발하고자 피 묻은 셔츠와 시청 응급진료막사에서 찍은 사진, 인터넷 한겨레 동영상 등을 피해자 진술서와 함께 제출해 놓았다. 시인으로 하여금 시 대신 피해자 진술서를 쓰게 만드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일까.




‘꽃의 시위’(flower movement)란 말이 있다. 무력한 시인을 짐승처럼 짓밟은 저들에게 그가 쓴 시 한 편을 시위 삼아 들려 주고 싶다.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봄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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