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박퇴진] 어제 부산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95]

  • 봉두난발봉두난발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904430 | 2008.08.29 IP 125.1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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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전이면 어땠을까요.


    철도에 다닌다하면 그냥 다 철도청 직원인 줄 알았던 그 시절에


    누군가들이 한꺼번에 400명쯤 짤렸다면 그랬다면 우린 어땠을까요.


    그때도 KTX가 저렇게 하루도 멈추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달릴 수 있었을까요.




    10년전이면 어땠을까요.


    정규직이라는 사람들마저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하루하루 가슴 졸이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군가 911일을 저러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을까요.


    한번 입사하면 사직서를 쓰기 전까진 그냥 그 직장에서 정년퇴직하는 게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10년전쯤이었다면 우린 내 밥그릇보다는 정의를 먼저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용노조 수십년의 굴레를 마침내 벗어던지고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고


    감격에 겨웠던 10년전쯤이었다면 우린 당연히 억울한 자들과 함께 목이 쉬고


    그들과 함께 거리에 서지 않았을까요.




    정규직 비정규직이 따로 없이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 같은 직원이고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대우를 받는 게 상식이었던 그때였다면 차별에 함께 저항하는 것도


    상식이지 않았을까요.




    굳이 정의를 소리높여 외치지 않더라도 손짓만으로도 기차가 멈추고


    눈빛만으로도 한곳에 모일 수 있었던 그때였다면


    우린 지금보단 마음이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요.




    같은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수백명이 짤리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면


    우리가 일하는 이 삶의 터전은 지금보단 인간적이지 않았을까요.


    노동자는 하나다 굳이 목청 높이지 않더라도 10년전이었다면


    그들만 짤리고 그들만 싸우고 그들끼리 끌려가고 그들끼리만 울어야 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비정규직은 생존을 유린당하고 정규직은 용기를 유린당한 10년.


    비정규직은 목숨이 흔들리고 정규직은 양심이 흔들리던 10년.


    비정규직은 일자리를 잃어버리고 정규직은 영혼을 잃어버린 10년.


    비정규직은 악만 남고 정규직은 눈치만 남은 10년.




    정규직은 철로에서 죽어가고 비정규직은 천막에서 시들어 가야 했던


    그 세월은 우리 모두에게 상처였습니다.


    철비철비 철철비는 없어졌다는데도 우린 왜 행복하질 않은걸까요.


    신이 내린 직장 철밥통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이 불안감은 도대체 뭘까요.


    넘어진 비정규직을 우리가 일으켜 세워 줬다면 우리가 넘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울고 있는 비정규직의 눈물을 우리가 닦아줬다면 우리가 울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올림픽 성화가 피워오르던 날 이땅 공영방송엔 공권력이 투입됐습니다.


    누군가 금메달을 따서 시상대에 올라간 날 기륭전자 옥상엔 관이 올라갔습니다.


    4년을 피눈물 나게 연습하면 금메달도 따는데 4년째 피눈물을 흘리는


    기륭전자 노동자는 왜 시시각각 임종을 맞아야 하는 겁니까.


    금메달 13개를 딴 조국은 이제 자랑스런 선진국이 됐다는데 비정규직임이


    부끄러운 860만 의 노동자는 어느 조국의 백성입니까.




    연대가 아닌 펀드가 우릴 지켜줄 거라는 믿음과 집에서 살고 싶은 게 아니라


    부동산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이명박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밤 다다를 수 없는 욕망의 빈자리를 과음으로 채워넣고 그 욕망의


    정직한 토사물이 이명박입니다.


    밤의 욕망은 유혹적이나 그 욕망이 토해놓은 토사물을 아침에 확인하는 일은


    이렇게 곤혼스럽습니다.


    촛불들이 지켰던 광장을 올림픽의 환호성이 뒤덮으면서 올림픽의 진정한 승자는


    박태환도 아니고 장미란도 아니고 이승엽도 아닌 이명박입니다.







    잔칫집에 든 도둑처럼 올림픽을 틈타 공영방송을 훔쳐 간 이명박은 이제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부칠 겁니다.


    만사는 형님으로 통한다는 만사형통의 형님께서 고문으로 있는 코오롱 그룹은


    이미 코오롱워터라는 회사까지 차려놓고 수돗물 민영화를 진행하고 있고


    매출 1조원에 영업이익만 4606억원의 알짜배기 인천공항은 그 아들을 위한


    민영화랍니다.


    그 거대한 인천공항에 정규직은 869명에 불과하고 38개 업체에


    6천명이 아웃소싱이라는 이름으로 하청화됐습니다.


    민영화라는 이름은 그 869명마저 비정규직이 된다는 말입니다.


    1인 승무를 막아내지 못했던 지하철은 공사로 넘어가는 걸 막아내지 못했고


    매표소가 용역이 되는 걸 막아내지 못했고 그렇게 용역으로 넘어간 매표소는


    결국 폐쇄됐습니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자를 사람이 없다고 믿었던 정규직들을 향해


    지금은 서비스지원단이란 이름의 퇴출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퇴출후보들로 구성된 서울시 현장시정추진단에 배치받은 공무원은


    또 한사람이 죽었습니다. KTX,새마을여승무원 동지들의 투쟁이 패배하면


    철도공사의 머잖은 장래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들 대학보내서 내처럼 안살게 하겠다는 걸 삶의 목표로 삼고


    인생에 유일한 낙이 잔업이었던 한진중공업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몇 년전 이 아저씨 명퇴로 짤리고 결국 아들이랑 같은 하청공장에 다니게 되면서


    이제 인생에 유일한 낙이 술 마시는 게 되어버렸답니다.




    2003년. 수십미터 크레인 위를 혼자 올라갔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은 비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처럼, 미치도록 하늘이


    푸르른 날은 한점 구름처럼 129일을 그 자리에 찍혀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밑에서 올려다 보기만 했던 사람들은 그 까마득한 높이를 잘 몰랐습니다.


    땅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은 바람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도 잘 몰랐습니다.


    비를 피할 곳이 있었던 사람들은 비가 사람의 영혼까지 적실 수 있다는 것도


    그땐 잘 몰랐습니다.




    그 꼭대기까지 올라간 건 투쟁전술 중에 하나가 아니라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목숨 한줌씩 내려놓는 일이라는 걸 그가 밟아 올라간 계단을 뒤늦게 밟아보고야


    알았습니다.


    그 까마득한 꼭대기는 땅보다는 천국이 훨씬 가까운 거리라는 것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가 섰던 자리에 서 보고야 거기가 얼마나 아득한 높이였는지


    129일을 거기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는 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가 지고 간 절망의 부피가 얼마만한 것이었는지를 그가 떠나고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 엄청난 절망의 무게를 그가 다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한 절망이 산자의 몫으로 남는 다는 걸


    깨닫게 해준 건 세월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는 게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는 걸 시시각각


    일러주는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무거워지는 짐도 있다는 걸


    영악스럽게 깨우쳐주는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지회장의 부음을 듣고 달려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어도


    크레인에서 끄집어 내렸어야 했다고 엉엉 울었습니다.


    잠긴 크레인의 문을 부수고라도 끌어내렸어야 했다고 자기의 멱살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하더라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우린 압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을 끄집어 내리는 일이 아니라


    조합원들을 만나고 설득해서 크레인 밑에 다시 모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김주익.그의 목숨이 회장님의 손안이 아니라


    우리의 손안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재규형마저 보내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을 땐 후회마저 사치가 된다는 걸 알려준 것도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김소연은 김주익이 되어가고 오미선은 김소연이 되어갑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정규직의 것을 나누자는 말이 아니라


    자본의 것을 나누자는 말이었습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그래야만 우리가 강해진다는 말이었습니다.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말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천막농성을 하고 노숙농성을 하고 끌려가고 짓밟히고 단식을 하고


    어딘가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저들도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10년전에 우리가 내밀었던 손을 저들이 간절히 내밀고 있는데 우리가


    그 손을 잡아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10년전에 우리가 외쳤던 절규를 저들이 저토록 목놓아 외치는데 그 외침을


    우리가 들어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추석명절에 고향에도 못가시는 철도동지 여러분.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부모님을 명절 때도 찾아뵙지 못하는 철밥통 여러분.


    오미선,정미정,장희천,하현아,황상길 저들을 부디 잘 지켜주십시오.






     
     
     
     
    출처 :전국철도 비정규직노동자 권리찾기 원문보기 글쓴이 : 물병자리
     
     
     


    지지방문을 부탁드립니다.



    철탑농성장소, 여기가 대충 맞을 겁니다.

     

    서울역 서부역으로 나오시면 맞은편에 소화병원이 보입니다.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왼쪽으로 돌아서서 30미터만 오시면 하얀색 건물이 있습니다. 서울고속철도 열차승무사업소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오시는 길에 공사팬스가 쳐져있는데 쭉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끝까지 들어오시면  철탑과 그 아래 천막이 보입니다.

     

     

     

    ktx 승무원 블로그입니다. 지지하는 댓글을 달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http://blog.daum.net/ktxcrew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30일 오전 11시 철탑아래에서 집중집회가 있습니다.

     

     

    기륭, KTX여승무원, 코스콤! 비정규직 싸움의 마직막 보루입니다. 참고로 철탑위에는 철도의 정규직 조합원 2명도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해고를 각오하고 올라갔습니다. 더 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심과 연대를 바라는 마음에서겠죠.

     

    아무튼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KTX, 새마을 승무원 철탑 고공농성 2일차 방문후기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904273

     

    KTX, 새마을 승무원 철탑 고공농성 1일차 방문후기(동영상포함)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89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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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12시간 일해 고작 3만원…폐업 생각 굴뚝” [0]

  • 북치기박치기북치기박치기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819444 | 2008.08.07 IP 61.25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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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던 지난달 29일 중복. 서울 광진구 중곡동 가구거리 뒤쪽에 자리잡은 '돼지분식' 주인 이모씨(62·여)의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배추를 다듬는 손이 분주하다. 한여름 뙤약볕에 가게 안은 거대한 찜통이다. 가게 한쪽엔 선풍기 한 대만 뜨거운 바람을 쏟아내고 있다. 20㎡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라고는 고작 2개. 낮 12시가 갓 넘어 점심시간이 한창이지만 거리는 인적이 드물다. 이씨는 "이 시간엔 원래 손님이 없지만 오늘은 중복이라 다들 보신탕 먹으러 간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쉰다.

    이씨는 지난해 3월 이곳에 분식점을 열었다. 국수와 떡볶이·순대 등을 팔았다. 주변에 밀집해있던 소규모 모피공장이나 봉제공장 노동자들이 싸게 한 끼를 해결하는 곳으로 자주 찾았다. 큰 돈은 아니지만 월 130만원씩은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매출은 점점 떨어졌다. 이씨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선을 전후로 공장들이 하나 둘 씩 망하더니 매상도 급감했다"고 말했다. 음식값을 올릴 수도 없었다.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 단돈 500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버티다 못해 올해 초 국수 2종류만 500원씩 올렸다. 그래도 지금은 한달에 80만원 벌기도 힘들다.

    밀가루값과 LP가스비 상승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지난해 여름 2만5000원이던 LP가스 한 통이 지금은 3만7000원이다. 1년 사이에 50%가 오른 셈이다. 식용유·라면·달걀 가격도 모두 올랐다. 혼자 일하기가 너무 힘들지만 인건비를 생각하면 엄두를 낼 수 없다. 이씨는 "원래 사람을 한 명 쓰다가 도저히 수지가 안 맞아서 그만 두게 했다"며 "당연히 배달은 못 하지만 인건비 주느니 배달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폐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하루 12시간 일해도 겨우 3만원 버느니 차라리 식당에 취업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한다.

    동대문구 답십리동에서 3년째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는 최우영씨(38)는 "친척들과 모인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까마득하다"고 말했다. 최씨 가게는 '연중무휴'다. 공휴일은 물론이고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었다. 최씨는 "하루 쉬면 매상 타격이 커서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한다"며 "아파도 눕지 못하니 서러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식자재값 때문에 최씨의 한숨은 늘어만 간다. 지난해 1마리당 2800원이던 생닭은 올해 3300원으로 올랐다. 하루에 40마리 정도를 판매하니 한 달에 닭 구입비로 60만원을 추가 지출하는 셈이다. 최씨는 "지난해 7월쯤 월 수익이 300만원 정도였지만 요즘은 200만원으로 30%가량 줄었다"며 "닭값을 1000원 올렸지만 손님이 떨어지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

    최씨 부부는 전세비와 교육비를 생각할 때마다 막막하다. 당장 올해 오른 전세비가 걱정이다. 인근 왕십리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이른바 '풍선효과'로 답십리 지역 부동산 수요가 늘었다. 최씨는 "벌써 가게 임대료가 월 20만원 올랐다"며 "뉴타운이 들어서면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딸과 3학년 아들의 교육비도 마찬가지다. 최씨 부인은 "제발 사교육비 걱정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테크 계획은 '언감생심'이다. 주택청약부금 통장 하나가 전부다. 승용차도 처분했다. 최씨는 "노력하면 잘 산다는 얘기는 옛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인터뷰한 지 1시간 동안 치킨주문은 한 건도 없었다.

    "시세에 민감한 양파랑 무를 어떻게 잡아? 매점매석이나 잘 감시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성북구 동선동5가 미아리고개 옆 주택가 변두리에 자리잡은 중국음식점 '흑룡강' 사장 변모씨(48)는 정부의 물가정책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는 "지난해보다 식자재값이 전체적으로 35~40%가량 비싸졌다"고 하소연했다. 그동안 쓰던 LP가스비도 2배가량 올라 한 달 전쯤 도시가스로 교체했다. 치솟는 밀가루값을 감당하기 힘들어 지난 2월부터 자장면 등 주요 메뉴 가격을 500~1000원씩 올렸지만 손에 떨어지는 돈은 1년 전보다 100만원 넘게 줄었다. 그는 "그래도 이 근처에선 우리가게가 제일 장사가 잘 되는 편"이라며 "다른 가게들은 인건비도 빼기 힘들어 직원을 해고한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변씨는 "중국집을 시작한 이래 요즘이 제일 힘들다"고 했다. 그는 "예전엔 중국집을 차리면 90%는 잘 됐다"며 "그런데 요새는 주변에 폐업하는 집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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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목소리의 언어와 삶


    꽃이 피어납니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스며들 물기 없는 보도 불록 위에서, 열기와 함께 솟아오르는 폐유 냄새 진한 아스팔트 위에서 연꽃들이 피어납니다. 울렁이는 촛불의 자태와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같이 호흡하고 한강 하구의 춤사위처럼 굽이치고 있자니 아우가 수행할 일상이라든가, 형이 항상 이야기하던 김포라든가 하는 낱말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며, 오래된 숙제 또한 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이 서울광장을 딸들과 함께 다녀갔었다는 일전의 통화를 떠올리며 아우가 형을 형으로 호칭함을 다행한 일이라 다시 한 번 여깁니다. 어쩌면 형의 무심한 듯 보이는 행동의 게으름보다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의 울렁이는 충동으로 인한 조바심이 더 컷을 것이라는 점은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은 항상 그렇고, 형의 성정 또한 항상 그렇습니다. 숱한 꽃무리의 물결 속에 눈에 띠든 그렇지 않든, 또 한 송이의 꽃을 피워 올리는 형의 심사, 그래야만 삭신의 피로와 게으른 무관심과 나약한 행동의 양심 앞에서 알리바이를 마련해두는 그 나마의 조처라 여김을 다른 이는 몰라도 이 아우는 압니다. 추론하건대 그날 형은 밤늦게 귀가하였을 것이고, 피로한 몸에 겹친 약한 열기로 앓는 밤이 되었을 터이고, 늦은 아침을 맞이하여 예의 ‘미학사’ 원고지 위에 꽃들의 소란함에 대해 차분하고도 나직한 말의 보고서(詩)를 다듬었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날 작성하였을 보고서는 아우가 아직 열람치 못하여 꽃들에 담긴 연민의 서정적 낱말들은 읽어낼 수 없으나 일찍이 평이한 일상의 문체로 연민을 담아내는 솜씨는 ‘미학사’라는 시에서 진한 감흥과 함께 확인한바 아닌지요. 한 번 볼까요?

    미학사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한때 잘 나가던 그 출판사가 문을 닫던 날
    거기 디자이너로 있던 여자는 남편을 위해
    용달차를 불러 원고지를 횡령하였다
    한 시인이 평생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이건 사주이던 박의상 시인도 사장이던 배문성 시인도 모르는 일이다
    여자는 원래 그런 여자였다
    그런 여자의 등 뒤에서
    원고지는 퇴색되어간다

    빈 하늘을 보며
    여자는 앉고 사내는 서 있었다
    「미학사」, 『험준한 사랑』

    화자인 시인과 그 시인의 아내와 한 출판사의 폐업과 남겨진 원고지와 남겨진 원고지나마 건지려는 아내 된 자의 행위가 어우러져 일구어내는, 실화를 바탕으로 구체적 일상을 서술하는 행간에 스민 연민이 눈물겹게 합니다. 형은 그렇게 가끔 바라보고 지켜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할 때가 있습니다. 일상으로, 일상과 결부된 문학으로, 또 형의 작품에 깃든 서정적 미학의 힘으로.


    그대를 골목 끝 어둠 속으로 보내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의롭지 못한 만큼을 걷다가
    기쁘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울다가
    슬프지 아니한 시간만큼을 취하여
    흔들거리며 가는 김포행 막차에는
    손님이 없습니다
    멀리 비행장 수은등만이
    벌판 바람을 몰고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먼 훗날 아직도
    그대 진정 사람이 그리웁거든
    어둠 속 벌판을 달리는
    김포행 막차의 운전수 양반
    흔들리는 뒷모습을 생각하라고.
    「김포행 막차」, 『김포행 막차』

    서울 어디서든 ‘김포행 막차’를 아우로서는 타보진 못하였으나, 개화산 자락의 형이 살던 동네로는 불림을 당한 적은 있습니다. 그 당시 이 아우는 모 문학잡지로 등단하여 모 문학단체의 신입회원으로 문단 말단의 자리에서나마 천지구분 없이 들까불 때였고, 형은 중견문학인(?, 당시 적어도 아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으로 소속된 단체에서 자칭 문예군기반장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불림 당해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김포행 막차」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는 다른 작품은 몰라도 표제작만큼은 숙지를 하여야 높으신 군기반장 앞에서 주눅 들지 않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불러주는 선배에 대한 최소한의 예가 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날이 아마 형과의 사적 만남으로는 아우에겐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형은 나서 자라고, 가정을 꾸려 분가하고, 식솔 거두고를 40년 넘게 김포와 김포주변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이 해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김포에 거하며 형이 자주 만나는 이들의 이름들(현기영, 고형렬, 박영근, 이재무 등등)이 술자리에 불려나와 술잔에 담긴 채 아우의 목구멍으로 넘어가갈 때, 취기와 함께 담긴 김포의 바람 냄새에 대한 호기심이 자리하였고, 지금도 그 냄새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습니다. 서울과는 다른 맛과 색깔의 바람이 박철이라는 시인을 키웠다는 사실을 영근 형은 살아생전 형에 대해 이렇게 말했지요. “현실을 살 수 밖에 없는 치욕과 비참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삶을 살아내면서 파격으로 현실에 맞서”고 있다고. 이는 형의 문학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자 위의 시 「김포행 막차」에 대한 헌사가 아닐런지요. 형과 아우를 포함한 모든 약자들의 삶이 시의 전반부에 흐르는 고뇌와 다르지 않다고 할 때, 삶의 비애와 애잔함과 나약함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근거 또한 쓸쓸한 그들 중 말없이 삶을 수용하고 견디어내는 ‘운전수 양반 흔들리는 뒷모습’과 같은 평범하고 무심히 일하는 자의 일상이라는 진술은 천만금의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잠언이자, 도저한 세계에 처한 인간 삶의 태도에 대한 문학적 결구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시민적 일상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통한 형의 문학 생산 활동은 『김포행 막차』(창작과 비평사 1990) 이후, 『밤거리의 갑과 을』(실천문학사 1993), 『새의 全部』(문학동네 1997), 『너무 멀리 걸어왔다』(푸른숲 2000),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문학동네 2003), 『험준한 사랑』(창비 2005) 에 이르기까지 형의 문학을 형의 문학이게 하는 독창성과 시적 완성도를 관통하는 일이관지 미학적 알리바이가 되고 있다고 아우는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김포라는 공간에 대한 문학적 변용의 예는 시집 『험준한 사랑』에 잘 갈무리 되어 있는 바대로, 그곳은 메트로폴리스 사이에 낀 변두리로 도회적 어수선함과 한적한 시골의 이미지가 상존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띠고 있는 곳이며,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들 또한 도회적 삶과 농촌공동체적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복합적 성격을 품고 있음을 형의 시나 형이 만나고 교류하는 원주민 친구들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환경에서의 문학적 행위가 형의 시를 교차로써의 역할을 담지해내는 독특한 형태로 표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그 특성은 지리학적 개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김포라는 공간이 제공하는 느림의 산보성(散步性)이 시간에도 영향을 미침을 형의 시를 통해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걷는다’와 ‘본다’라는 행위의 시적 표현 앞에 ‘천천히’ 라는 휴지부가 필히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형 시들의 특징은 김포 들녘을 미음완보하는 속도의 느림, 변화의 속도에 거부하고 저항하는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미음완보하는 형의 일상과 시에서 들려지는 음성은 느리고도 낮다는 점입니다. 일상과 시적 주체의 목소리의 낮음은 -무릇 아우가 보아왔던 국내 시인들의 무수한 작품들과 비교해도 그 개성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시와 그 시를 쓴 시인과의 관계가 불가분임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겠으나, 시에서 보여주는 삶과 시인의 실체적 삶이 괴리된 허다한 예를 아우는 보아왔습니다. 허나 형의 시와 형의 삶은 그 그릇과 지향하는 바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실체적 삶의 크기와 목소리가 시적 그것과 일치한다는 소박한 진실 앞에서 아우는 줄곧 경이로움과 함께 안쓰러움을 느껴왔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이별의 종착역(형이 기타반주와 함께 즐겨 부르는 노래)’을 부를 때나, 혹은 오해로 더러는 타이름으로 아우에게, 또는 타인 모두에게 이야기할 때도 형은 늘 상 목소리를 높이는 적이 없습니다. 때로 분노할 때조차 형의 톤은 낮아 역설적이게도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분노에 대한 공감의 폭을 더욱 넓히는 효과를 빚기도 합니다.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견디어낼 양과 질만큼만 생활하고 창작하는 형은 무서운 사람이고, 철저한 시인입니다. 이는 외부의 요인이나 영향이라기보다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사람됨의 성정에서 비롯된다고 아우는 굳게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 시점 아우의 이야기가 그르지 않다는 반증의 시가 떠오릅니다.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 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영진설비 돈갖다주기」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우리네 구차한 삶이야 말로 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만은, 이 시에 이르러 서민적 삶의 단면이 이렇게 서글프고도 아름답게 펼쳐질 수 있다는 문학적 진실 앞에 아우는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시적 형상화가 가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상성에 대한 시 쓰기의 훌륭한 성공사례로 고운기는 이 시를 예로 들고 있거니와, 이는 백석, 신경림, 최두석, 박철로 이어지는 ‘서사를 통한 리얼리즘 시의 구현’이라는 한국시가 성취한 한 갈래의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아우는 생각합니다.

    형은 지난 2005년 시월 김포를 잇대어 가로지르는 한강을 도강하듯 건너 정발산 기슭으로 옮겨왔지요? 그 정든 고향을 떠나 온 심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전 아우가 느꼈던 상실감이 크기에 형의 심정을 차마 물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궁금함에 앞서 드는 아우의 생각은 -비록 서울특별시에서 고양시로의 이사일 망정- 김포를 벗어난 시점이 오히려 형이 이제야 도시인으로 편입되었구나 하는 생각과 형이 이제는 촌티를 벗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촌티와 관련된 긍정적 정서가 앞의 예의 ‘연민’이라면, 형이 누누이 이야기해 마지않던 형의 김포 친구들을 아우가 다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형이 식솔을 이끌고 김포를 건너와 일산에 둥지를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것입니다. 술잔 비우기의 속도로 형과 아우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고, 형은 생전 처음 고향 떠난 아쉬움과 상실감을 김포와 김포친구들의 이야기로 달래고 있었지요. 그러던 중 이점은 형의 특기이기도 한 것이지만, 불현듯 손전화로 김포친구들을 호출하기 시작했지요. 한 삼십분이나 지났나요. 이미 꽤 늦은 밤 시각이었음에도 한 친구 A(편의상 A, B)가 먼저 도착했었지요. 오, 그런데 맙소사. 우째, 이런일이? 한마디로 어깨였지요. 영화에서나 봄직한 친구의 몰골과 행동이라니. 또 그 곁에 미동도 않고 선 보디가드인지, ‘가방모찌’인지, 수행비서인지 알 수 없는 사내, 이른바 깍두기의 인상이라니. 낯설고도 비현실적인 웃지 못 할 가관이었지요. 어깨 특유의 넘치는 ‘가오’와 즉물적인 언사와 거친 품행을 거리낌 없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행하는 저 도도한 카리스마 앞에 한낱 서생인 이 아우가 눈 뜨고 차마, 감히, 온전히, 똑바로 바라볼 수나 있었겠습니까? 또한 차렷 자세로 어깨 뒤에 선 깍두기의 몰골은 시방 막 학교를 출소한 듯 일자 폼을 일시도 놓치지 않고 유지하였기에 본 서생은 명퇴 리스트에 오른 말단사원마냥 복지부동 할 밖에요. 형님! 나 좀 살려주소. 속으로 내이고 있는데, 아 형의 차마 가관인 위험천만한 오만방자와 안하무인의 행동이라니. 몇 마디 인사 후 그 친구에게 쏟아내는 살벌한 단어들이라니. 가령, 야, 이 새끼야! 너 왜 그렇게 사니? 양아치 티 내지마라 새끼야! (오, 오, 오…. 형, 아니 철이 형님.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시고 그 위험한 주둥아리 좀 닥쳐주세요. 이렇게 속으로 빌고 또 빌었지요.) 형의 입에서 그 거친 낱말이 튀어나온 것을 아우의 귀로 경청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아니, 그런데 그 순간 A의 행동과 표정은 의외로 순진한 한 악동의 그것처럼 귀엽기조차 한 겁니다. 경동천지할 일이 벌어질 줄로만 알고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냅다 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하던 중인데 이 무슨 싱거운 일이란 말입니까?
    그렇게 또 몇 분이 지난 뒤 또 한 친구 B가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형에게 걸려왔을 때였지요. B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당황해하는 A의 표정이 굳어진다 싶더니 안절부절 못하는 게 영 이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B가 술집에 들어서자 A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테이블을 빙빙 돌며 애면글면하였고, 신사 본때의 B가 차분하나 또렷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지더군요. “A, 너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그 말을 받은 A의 변명과도 같은 항변이 있었으나, 그 대답은 그리 힘이 실린 것도,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끝을 흐리는 말이었습니다. A의 허장성세와 난감함이 교차하는 표정과 B의 느긋하나 자신감 있는 표정이 잠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둘을 향해 이 아우의 형, 철이 형이 또 철없이 한마디를 쏘아 부치 듯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야, 이 새끼들아 내 앞에서 뭐하는 거야. 둘 다 앉아!” 이 아우는 정말 형이 미워 미치겠더군요. 아니 이런 심각한 상황에 50kg을 겨우 넘길까 말까 한 일개 서생인 형이 낄 자리인가요. 형이 낀다한들 한주먹거리나 되긴 하나요. 낄 자리 안 낄 자리가 있지……. 어쨌든 형이 던지는 말의 짧은 틈을 타 A가 깍두기를 데리고 급히 술집을 나가는 것으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종료되기는 했습니다만, 곧 B의 정체를 듣고 아우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름도 찬란한 청송학교 출신으로, 그것도 10년 이상 장기 공부를 마친,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거물급 건달이라나요. 말하자면 셋은 김포 동창이며 친구사이로 A가 김포의 지역구 건달이라면 B는 김포 출신의 전국구 조폭이었던 셈이지요. 그리고 그 친구들은 형을 누구보다 아끼며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우스갯소리 하나 덧붙이자면 B가 하루는 늦은 밤 형에게 손전화하여 멋진 글귀가 생각나니 받아 적어 품평을 부탁하는데, 형이 펜이 없다고 하자 B가 하는 말 “시인의 머리맡에 펜이 없다는 것은 건달이 머리맡에 칼 없이 잠든 것과 같다”고.
    다소 장황스러운 이 회고는 형의 문학적 모티프인 연민의 폭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점과 일상의 삶과 창작의 과정이 괴리되고 분리되지 않는 문학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함입니다. 형이야말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따오기 같은 삶이로되, 그 정중동하는 삶의 미세한 관찰로 해 그 얼마나 다채롭고 활달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인지 이 아우는 잘 압니다. 형은 평소에 아우에게 말했지요. “꼭 날아봐야 하늘 깊은 줄 아는 것은 아니다. 난다한들 저 창공의 어느 만큼 날겠느냐”고. 형이 어린 시절부터 건강상의 문제로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도 넓은 교유와 깊이 있는 사유를 멈추지 않았던 점이 이 아우에게는 경이로움으로 항시 다가옵니다. 정중동의 자세로 독자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힘을 소유한 형의 작품들이 이제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염원과 인간을 사랑하는 맘 더불어 새로운 일산의 일상과 그리운 김포의 바람이 실려 나오겠지요? 이미 그 편린의 한 단면이 애잔한 강물로 흘러감을 아우는 볼 수 있었습니다. 형의 좋은 작품에는 항시 맑고 시린 강물소리 울렁이고, 읽는 아우 또한 형으로 해, 형의 시로 해 울렁입니다.

    행주강

    내 눈이 점점 커지는 것은 외로움 탓이다
    시가 길어지는 일처럼 요즘 그리움이란 지금은 부재하는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누군가 나의 별빛을 본다면 희망에 대해 노래해다오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안개 짙은 야적, 강의 하류에선 그들 나름대로 시대를 앓고


    둑으로 쌓아 올린 바람이 외면을 받으며 갈대 곁에 섰다
    언덕을 돌아 결국 다시 만나련만
    강폭이 점점 커지는 것은 할 말이 많아서일 거다
    사랑이든 역사든 배고픔을 달래는 무엇이든 말로서 될 일이 아니건만
    물살이 거듭 손마디를 꺾으며 행주강이 흐른다
    400년 전 임진란의 함성이 되살아나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대는 강
    치마폭에 돌덩이를 주워 담던 아낙도 가끔은 허리를 펴 강 건너 친정아비의
    안부가 그립기도 했을 저녁 바람처럼 날이 진다

    오늘은 먼 사랑
    내 인생은 겨우 강 하나 건너온 것이다
    그것도 개구리헤엄조차 잊고 육중한 시멘트 다리를 빠르게 건너왔다
    사람들은 5분이면 건너는 강을 때론 50년이 걸려서 지나온다
    오늘은 내가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
    꿈의 불빛을 따라 김포에서 일산으로 이사 와 나는 자주 강으로 나간다
    물수재비를 뜨며 천둥오리 날고
    나의 파랑波浪을 아는 안개가 더 큰 한숨을 쉬노니
    안개의 흐린 눈빛은 다만 난세 탓이고
    내가 점점 외로워지는 것은 그래도 생의 아름다운 때문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시인으로 연민의 그 대상이 김포 들길에 널부러진 쑥부쟁이가 되었든 바람에 깡총거리는 강아지풀이 되었든, 양아치가 되었든 건달이 되었든……. 인간과 사물과 현상 앞에서 낮은 목소리로 일관된 형의 시세계가 부럽고, 그 세계를 훔쳐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50년 걸린 지난한 형의 강 건넘과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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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에게 할 말? "MB 좀 데려가줘요"
      [현장] 부시가 오던 날, 다시 짓밟힌 민주주의
     
      2008-08-06 오전 8:59:02
     
       

     
     

      미국산 쇠고기 파동, 독도 영토 표기 파문 등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가운데 5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날 서울 시내에서는 민주주의가 또 한 번 죽었다.
      
      경찰은 부시 대통령의 방한 일정 시작과 함께 최고 경계령인 '갑호비상령'을 선포했다. 부시 대통령 방한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예고된 가운데 경찰은 2만4000여 명을 동원해 이를 철저히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1만여 명(대책회의 추산)의 시민들은 도심에서 경찰과 쫓고 쫓기는 가운데에서도 6일 새벽 1시 가까이 가두 시위를 벌였다. 강제 진압에 나선 경찰은 미성년자, 종교인을 가리지 않고 연행했고, 외마디 항의를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도 연행했다. 연행자 수는 150여 명에 달했다.
      
      색소 섞인 물대포 발사…경찰 "도로교통법 위반이라서"
      
      이날 집회는 오후 5시 종로 보신각에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파병반대국민행동,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주관으로 시작됐다. 꽉 찬 인도에서 밀려나 도로 건너편에서 손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던 700여 명의 시민들은 6시 30분경 청계광장으로 이동했다.
      
      경찰은 곧바로 행진을 따라와 뒤를 막았다. 행진이 도착한 청계광장은 이미 광화문 방면이 경찰버스로 봉쇄돼 있었다. 사방을 막아선 경찰버스와 부대로 인해 청계광장은 이내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폐쇄 상태가 됐다. 시간이 갈수록 참가자는 점점 늘어나 1만여 명이 됐다.
      
      7시 15분경 경찰이 청계광장으로 통하는 골목으로 첫 진입을 시도했다. '깃발'이 나가려했다는 이유였다. 한 시민은 경찰들 사이에서 소주병이 날아왔다며 격앙했다. 경찰은 "노약자, 어린이, 기자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주길 바란다"며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쏘겠다고 경고했다. 또 경찰은 "비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불법행위를 중단하라"며 이전 촛불 집회에서처럼 시위대를 자극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때는 아직 해가 지기 전. 집시법에 따른다고 해도 야간 집회로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경찰은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듯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경찰은 "도로를 점거한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에 따른 불법행위"라고 주장했다.
      
    ▲ 집시법에 따르면, 일몰 전에는 야간 집회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경찰은 이날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참가자들에 대한 진압과 검거 작전에 나섰다. ⓒ프레시안

      
    ▲ 참가자들은 사진을 찍다가도 연행됐다. ⓒ프레시안

      "여기가 미국 땅이냔 말이야"
      
      7시 50분경, 청계광장에 모여 있는 집회 참가자를 향해 세 방향에서 동시에 경찰 부대가 진격해 진압을 시도했다. 경찰은 깃발을 들고 있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연행했으며, 주변에서 항의하는 이들까지 막무가내로 연행했다. 비명소리와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졌다.
      
      퇴근길에 양복을 입고 이를 지켜보던 한 시민은 "이 쓰레기같은 XX들아"라며 울음으르 터트렸다. 곳곳에서 "저게 인간이냐"라는 항의가 쏟아졌다.
      
      8시경부터 종로구청 사거리 방면에서 경찰은 색소를 이용한 물대포 발사하겠다고 경고하며 진압과 일보 후퇴를 반복했다. 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워주며 "물대포 맞는다고 죽지는 않아"라며 달래기도 했다. 또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1명이 '너무한 것 아니냐'며 경찰에게 따졌다는 이유로 연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참가자들은 "여기가 미국 땅이냔 말이야, 부시를 반대하는데 왜 이러는 거야", "아주 원시시대로 가는구나", "어째 노무현보다 더 못해"라며 경찰을 성토했다.
      
      경고 방송에 이어 경찰이 시범 발사하듯 물대포를 쏘며 진압을 시작했다. 이를 몸으로 막던 광우병 기독교대책위 소속 문대골 목사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응급차로 후송됐다. 이외 10여 명의 대책위 관련 목회자도 모두 연행됐다.
      
      참가자들은 청계광장에서 보신각으로 다시 이동했다. 경찰은 어김없이 종각 사거리 사방을 둘러쌌고, 9시 무렵 또 다시 동시 진압을 시작했다. 종로2가 방면에서는 색소가 섞인 물대포가 발사됐다.
      
    ▲ 경찰은 이날 색소 섞인 물대포를 참가자들에게 발사했다. ⓒ프레시안

      
    ▲ 물대포를 몸으로 막고 있는 문대골 목사. 그는 이후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다. ⓒ프레시안

      상점 안까지 난입해 연행 시도…"프레시안은 안 됩니다" 취재도 막아
      
      9시 40분경, 경찰이 물러간 도로에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을 비롯해 시민들이 '모이자'를 연호하며 집결했다. 이들은 종로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고,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확보한 경찰은 또 다시 뒤쪽에서 달려 나와 진압을 시작했다. 인도로 피한 2000여 명의 시민들은 "폭력 경찰 물러가라"며 차도를 점령한 경찰에게 외쳤다.
      
    ▲ 참가자들은 보신각 앞 사거리에서 한때 점거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곧 경찰이 사방에서 포위하며 진압 작전에 나섰다. ⓒ프레시안

      경찰은 차도에서 카메라를 찍고 있던 여성을 연행했다. 인도에 서서 구호를 외치는 여성에게도 "한 번만 더 하면 연행한다"며 협박했다. 인도에서도 한 대학생은 "밀지 말라"고 했다가 연행됐다. 이를 '집시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가 멱살 잡혀 연행될 뻔한 이도 있었다.
      
      10시경 종로 2가의 한 화장품 점포에서는 경찰의 진압을 피해 들어온 시민 7명을 끌어내려 경찰 부대가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가게가 파손되자 점포 주인은 경찰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 경찰은 상점 안으로 피신한 참가자들까지 연행하려 난입해 매장 안을 어지럽히는 등 물의를 빚었다. 항의하고 있는 매장 주인. ⓒ프레시안

      
    ▲ ⓒ프레시안

      언론에 대한 통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경찰은 카메라를 든 기자들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대포를 발사했다. 연행 장면을 찍으려 하는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제지당했다. 한 경찰은 진압이 벌어지는 봉쇄선 안으로 들어가려는 <프레시안> 기자에게 "프레시안은 안 됩니다"라며 막아서기도 했다. 또 진압 과정에서 <경향신문> 기자도 연행될 뻔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관 기동대와 전경 부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종로를 따라 후퇴하던 참가자들은 자정을 넘긴 시각, 명동성당 들머리로 자리를 옮겨 연좌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이들까지 연행을 시도했다. 6일 오전 1시 무렵 남아있던 100여 명의 시민들이 집회를 마무리했다.
      
      "부시가 가는 어디에서든 이런 저항이 일어난다"
      
      강기갑 의원은 "자국 이익 위해서라면 전쟁을 불사하고, 세계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승자 독식 패자 몰락'하게 하는 장본인인 부시가 방한한다"며 "독도 표기 해결 방안 같은 건 가지고 오지도 않는 부시를 반대하며 당당하게 헌법적 권리를 요구하는 국민을 경찰은 토끼몰이식으로 연행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 종각 앞 도로에서 연좌 농성에 나선 강기갑 의원과 민노당 당직자들. ⓒ프레시안

      친구와 함께 집회에 참가한 중학교 3학년 이예슬(가명) 양은 "경찰이 연행하려고 인도에 있는 우리더러 도로에 있었냐며 물어보더라"며 어이없어 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정신 차려라, 명박이 좀 데려가라. 필요없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전모(53) 씨는 부시 대통령에게 "일단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해야 한다"며 "말로만 사과하거나 빙빙 돌릴 일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는 "사실 문제는 우리 정부가 더 심각하다"며 "재협상을 하면 끝날 걸 미국 눈치를 보면서 시간을 끌고 있고, 이러다가 진짜 반미도 나온다"고 경고했다.
      
      김 모(33) 씨는 "쇠고기로 촉발되긴 했지만, 언론 통제, 인터넷규제 등 이명박 정부 자체에 문제가 많다"며 "20년 전 풍경이 이랬겠구나 싶다"고 말했다.
      
      이날 참가자들 중에는 유독 외국인들이 많았다. 미국에서 왔다는 한 외국인은 "부시가 가는 어디에서든 이런 저항이 일어난다"며 "왜? 말이라고 묻나. 전쟁을 일으킨 범죄, 고문한 범죄, 가난을 심화시킨 죄 등 그의 죄목은 수도 없이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도에서 온 한 참가자는 "아까 보수단체 집회도 갔었는데, 여기에는 더 다양하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게 젊은 사람들의 생각 아니겠는가. 한국 정부는 이제 완전히 미국에 두 팔 벌려 환영하며 개방했다. 오늘 시위는 하나의 상징이지만, 그 뒤에 비정규직, 물가 등 수많은 사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포르투갈에서 왔다는 또 다른 외국인도 "부시가 온다면 우리 역시 이와 같은 시위가 일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이날 경찰은 색소가 섞인 물대포를 진압 과정에서 수 차례 발사했다. ⓒ프레시안

      
    ▲ 참가자들에 대한 무차별 연행에 나선 경찰은 깃발을 들거나, 항의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참가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서울시청, 보수단체 집회에 다시 개방…서울공항 앞 집회, 경찰 진압에 무산
      
      ■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은 촛불 집회로 인해 훼손된 잔디를 다시 심는다며 봉쇄된 이후 처음으로 보수 단체들에게 개봉됐다.
      
    ▲ 보수 집회에는 한나라당 각 분과별에서 제작한 부시 방한 환영 현수막이 내걸렸다. ⓒ프레시안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촛불집회 중단, 독도 침탈 일본 규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단호한 대처, 한미동맹강화' 등을 주장하며 '나라사랑 한국교회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성조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붙인 애드벌룬을 광장 한가운데에 띄워 부시의 방한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이날 참석한 1만여 명의 시민들 역시 태극기와 성조기 모형 깃발을 나란히 들고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50~60대 연령층이 대부분이었으며,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가 나와 "우리는 미국을 반대하는 죄를 저질렀다"며 촛불 집회를 성토하기도 했다.
      
      해병대전우회가 군복을 입고 인도를 행진하는 등 한대 청계광장에서 열리는 촛불 집회 참가자들과의 충돌이 예상되기도 했으나, 이날 집회는 별다른 사고없이 마무리됐다.
      
      ■ 부시 대통령이 도착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앞에서는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집회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봉쇄로 열리지 못했다. 바로 전 날인 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의 집회 금지 결정이 부당하다며 긴급구제를 결정했지만, 경찰은 이를 정면 무시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관계자 등이 공항 근처에서 피켓을 들고 있었다는 이유로 무차별 연행됐다.
      
      

    이에 반해 한국자유총연맹 회원 수백 명은 서울공항 입구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부시 방한을 환영했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 경찰의 경호 가운데 서울시내 방향으로 차량으로 이동했다.
      
      


       
     
      강이현,손문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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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푸른고개 2008-08-0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야, 물대로 맞는다고 죽지는 않아."...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도 치뤄야 되지 않을까, 이 아침이 답답하다.
     



    • 정치토론 [명퇴]왜 이명박 지지율 16.5% 최저치 기록? 9월 위기설!! [65]

    • 광야에서광야에서님프로필이미지



    • 번호 1994556 | 2008.08.04 IP 211.106.***.53

    • 조회 3744 주소복사





    왜 이명박 지지율 16.5% 최저치 기록?

    이명박의 신기록 행진은
    최단기간 최저지지율 경신에서
    계속되고
    있다.


    CBS-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이명박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16.5%로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지난 6월 5일 16.9%를

    다시 한 번 경신하는
    기록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국민과 소통을 하지 않는 이명박,
    무능한 이명박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뜻이다.
    서울신문


    그렇다!




    이명박은
    아마추어적인 국정운영,
    경제파탄,
    새 전북신문


    미숙한
    외교력으로 무능함을
    보이더니,
    매일신문

    강원도민일보

    국제신문

    대구일보




    이제는
    친인척비리까지
    불거져 ,
    데일리 서프라이즈

    한겨레신문


    참으로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경향신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경향신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앞으로도!
    이명박이 지난 10년간 국민의 변화된 눈높이를

    인정하지 않고 또 이에 맞게 쇄신하지
    않으면서 계속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이명박에게 미래는 없으며
    최저지지율 경신은 날마다
    계속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가련한 이명박!
    벌써 정권말기 현상이라니...
    쯧쯧...
    시민일보





     







     http://hantoma.hani.co.kr/board/ht_society:001016/54615
     
    기린 (sangrin) | 08.0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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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집 2008-08-0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천하고 갑니다.

    달빛푸른고개 2008-08-05 09:16   좋아요 0 | URL
    점차 퍼져나갈 겁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