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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에 자리한 남창장은 예로부터 어물전과 갯것전이 걸었다. 지금도 그 위세를 이어가고
있다. |
ⓒ 김창헌 기자 |
이른 새벽 문절이를 장에 가져온 어부는 “가을 왔어” 한다. 수온이 차졌다.
가을 생선의 대표주자인 전어도 장에 나왔다. “전어 팔리믄 가을 시작인디…” 하던 상인이 귀띔한다. “아직 기름이 덜 찼어. 맛이 서서히 들어갈 때제, 지금 사다 묵어도 아쉬울 것은 없어.”
남창장에는 숭어처럼 흔하게 돌아다니는 고기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숭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영전리에서 온 한 어부만이 숭어를 몇 마리 가져왔다. “아직은 눈 다 떠 갖고 있는게 안 잽히제(잡히제). 그물 있는 것 확인하고 뛰어넘어버려.” 여름에 숭어는 눈이 가장 밝다. 가로막고 있는 그물이 환히 보인다. 그러다 가을 초가 되면 눈에 백태가 서서히 끼기 시작한다. 겨울에는 완전히 껴 ‘눈먼 숭어’가 된다. 겨울과 봄, 눈먼 숭어일 때 남창장은 ‘숭어장’이 된다. 시방, 어부에게 잡힌 숭어는 “정신 못 차린 놈들이제.”
여름에는 바람이 심하게 불 때 숭어가 잡힌다. 바람이 불어 물이 흐려지면 숭어 시야도 좁아지는 것이다. “여름에는 바람 안 불믄 그물 넣어도 헛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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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전리에 사는 부부가 덤장으로 잡은 고등어 새끼, 민어, 줄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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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이 많아 간재미보다 찰지다는 ‘목떼기’. |
ⓒ 김창헌 기자 |
“딱 열다섯 그릇 나온 게 두 그릇 냉가 묵어”
새벽 5시께 남창장(2·7일)에는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켜진다. 조용한 바닷가 남창장이 깨는 시각. 용달차가 몰리고 상인들 물건 내리는 소리로 요란해진다.
장 안쪽 상인들이 그렇게 하루를 준비하는 동안, 장옥 가에서는 또 다른 소란이 인다. 급하게 거래가 이뤄진다. 서두르는 사람들은 어민들에게 물건을 받는 상인들. 어민들이 용달차로 경운기로 택시로 물건을 가져오면 앞다투어 챙겨든다. 자기 자리로 물건부터 끄집어온다. 대야에 바닷물 받아놓고 나서야 “몇 마리요?” 묻고, “어떻게 해줘야 쓰까” 하며 값을 흥정한다.
상인들과 어민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철 따라 달라지는 어물값, 상인들이나 어민들이나 늘 민감한 부분이어서 물건의 시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어민은 상인에게 “나한테 6천원에 받고 7천원이나 8천원에 팔아. 그라믄 장사할 만하겄고만” 한다. 고동을 ‘착실하게’ 까온 할머니는 “딱 열다섯 그릇 나온 게, 두 그릇 냉가(남겨) 묵고, 한 그릇은 자네 묵고 그려” 한다.
행정구역은 완도군에 속하지만 해남 북일면과 더 가까운 토도에서 온 할머니는, 반지락과 굴을 상인에게 넘겨주고 바쁘게 일을 본다. 채 물건 정리도 안 한 잡곡가게에 가 ‘깨 내놓아라’ 한다. ‘양말(양말장사) 어디로 간지 모르냐’고 물으며 맘이 다급하다.
토도는 ‘모세의 기적’이 하루 두 번 일어나는 섬. 바닷길이 열리면 섬에 들고, 나고 한다. 바삐 가야 바닷길 ‘문 닫기’ 전에 갈 수 있다. “퇴갱이섬이라 퇴갱이마냥 뛰어 댕겨야 해.” 토도는 섬 모양이 토끼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몰리기 시작한다. 북평 땅끝 영전리 사람들, 신흥마을 안평마을 사람들, 밤섬 남섬 사람들, 북일면 만수리 사람들, 완도 군외면 사람들…. 남창장 인근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한 짐씩 이고 들고 와 장바닥에 부려놓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마을마다 자리가 있다.
상인들에게 남창장의 가장 편리한 점은 갱물(바닷물)이다. 통에 담아올 필요 없이, 다른 사람에게 빌리러 갈 필요 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갱물이 쏟아진다. 바다가 바로 앞이라 이러한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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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자는 오래 산디, 문애는 금방 디져”
영전리에서 온 부부는 사람들을 모은다. 용달차에서 덤장으로 잡은 어물을 내리고, 또 내린다. “혼자 고기잡이 다 해불었네.” 숭어 방어 장대 줄서대 전어 병어 문어 꽃게. 생선 가게 하나를 다 차렸다. 어부는 “하루 쟁일(종일) 펐으믄 좋겄지만 이것이 마지막이고만” 하며 고기가 듬뿍 든 고기망을 내려놓는다. 이곳 사람들도 “뭣이여” 하며 관심을 보인다. “가라지 새끼여?” 등 푸른 고등어 새끼였다. “가라지는 (고기) 옆구리에 줄이 있어야 가라지제.” 고등어 새끼가 관심을 끄는 것은 해남 바다에서는 거의 잡히지 않는 물고기이기 때문. 그런데 떼로 잡혔다. “꿔(구워) 먹든 못할 것이고 멸(멸치) 식으로 묵은지에다 볶든, 지져 묵으면 맛 날 거여.”
문어가 많이 나왔다. 문어는 오도방정이다. 대야 안에 가만있지 않는다. 두 마리, 세 마리가 한꺼번에 바닥을 긴다. 북평 남성리에서 온 박가덕(69) 할머니는 꽃게 대야 속으로 들어간 문어를 냅둔다. “이놈이 이놈을 잡아묵을란가, 저놈이 저놈을 잡아묵을란가 해필 궁금해지네.”
광주에서 여행 온 관광객이 “광주까지 가져가도 살까요” 묻는다. 할머니 대답이 너무나 솔직해 관광객이 웃어 버렸다. “금방 디져(죽어).” 할머니는 핀잔에 가까운 말을 건넨다. “야가(문어가) 지 빈(변)하고 싶은 대로 막 빈해버리는 애여. 삘겋게 허옇게 얼룩달룩. 그렇게 예민한 애긴디, 광주까정 숨이 붙어 있겄어. 낙자는 오래 산디, 문애는 금방 디져.”
박가덕 할머니는 남창장은 ‘입 아픈 장’이라고 한다. 완도 들머리, 길가 바로 옆에 있는 장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든다. “요것 뭐냐고 묻고, 어찌게 묵냐고 묻고, 맛있냐고 묻고, 비린내는 안 나냐, 생으로는 묵는 거냐, 고치가리(고춧가루) 넣냐 안 넣냐 묻고. 일일이 답할라믄 한나절 연설을 해야 한단게.”
마지막 묻는 것은 “얼마예요?”. “내가 다 썰어주고(써는 방법을 알려주고) 요리까지 다 해줬는디 비싸다고, (요리를) 못 해묵겄다고 돌아서불믄 열 받치지.”
할머니에게 관광객은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이다. 바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문애(문어) 쫌만 작으믄 다 낙자(낙지)여. 납작한 것은 다 홍어고. 횟집에서 썰어놓은 것만 묵은게, 저것이 광어인지 돔인지 농어인지 알지를 못한단게. 낙자 들어간 지가 언젠디, 낙자도 없냐고 글고.”
그래도 남창장에서 한몫 팔아주는 사람들 역시 관광객들이다. “싱싱하다고 사가고, 신기하다고 사가고, 이렇게 큰놈 첨 봤다고 사가고, 자랑한다고 사가고, 애들 갖고 놀라고 기(게) 사가고. 많이 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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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들의 커플티? “이뻐보인게 나도 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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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그들 뻘떡기 아냐? 이것이 돌 밑에서 잡는 건디….” 어물장사 할머니는 ‘바다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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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칠·팔월이여. 반지락 사가”
안평마을 윤남심(67) 할머니는 바지락을 파는데 “음력 칠·팔월이여. 사가” 한다. 지금이 바지락철, 산란 끝내고 살이 여물 때. 술꾼들도 시원한 바지락 국물을 찾을 때.
바지락 나온 양이 앞장보다 못한 것은 물때 때문이다. 물이 많이 나지 않았다. 바지락은 갯벌 깊숙한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사리 물때에 나오는 양이 많다. 그런 차이로 바지락 값이 달라지기도 한다.
물때 따라 바지락 살 여문 것도 차이가 난다. 그믐사리 때 바지락을 사는 게 좋다. “삼분의 일은 차이가 나. 그믐사리 반지락(바지락)은 꽉 차 있고 보름사리 반지락은 살이 확실히 흘렁흘렁해. 달 밝으니까, 달빛 보고 조개도 술 한잔 먹고 그런가 힘아리(힘)가 없어.”
윤남심 할머니가 파는 바지락은 갯벌에서 호미로 캐낸 ‘참반지락’. 그래서 할머니는 “백퍼센트 비싼 반지락이여. 막 파온 거여. 잘 보고 사네” 하며 판다. 물속에 잠겨 자라는 바지락은 ‘물반지락’. 참반지락보다 값이 싸고 조갯살도 덜 여물다. 물반지락은 배를 이용해 기계로 긁어 올린다. “참반지락이 물 들었다 나갔다, 햇빛 받음시롱, 사랑 받으믄서 큰 게, 알이 노오라니 깨끗하고 좋아.” 겉모양새로만 보면 물반지락은 노란 빛을 띠고 참반지락은 검은 빛이 섞여 있다.
강성심(71) 할머니가 “반지락보다 더 시원한 것”이라며 바지락 대야를 뒤져 꺼내 보여준 것은 검은 빛깔의 ‘대롱’이라는 조개. “반지락보다 더 깊이 들었어. 맛있는디 없어. 잘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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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 좌판은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좋은 두불콩과 위에 좋은 간지밥나무 껍질과 삶지 않아
잘 팔리지 않는 고구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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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락만큼이나 남창장을 풍성하게 하고 있는 것이 소라와 비틀이. ‘비틀이’는 소라와 비슷하지만 몸통이 더 가늘고 꽁무니가 더 길게 빠졌다. 그 모양새가 예뻐 많이 찾을 것 같은데 사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죽 끓여 먹어도 맛있고, 날로 먹으면 고소한 맛이 그만인데 조금 위험하다. 알맹이에 있는 노란색의 골을 제거하고 먹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거나 복통이 오기도 한다. “근게 관광객들한테 권하지를 못해. 골만 띠고 묵으믄 아무렇지도 않은디, 혹시나 아퍼불까봐. 오래된 놈 팔았다고 오해받기 쉽제.”
게는 뻘떡기와 화랑기가 나왔다. 뻘떡기는 ‘뻘’에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독기’라고도 하는데 뻘에 있는 독 밑에 살기 때문. 성질이 사나워 장갑 하나만 끼고 잡으면 손이 ‘아작난다’. 화랑기는 ‘떡기’라고도 하며 뻘 속에 산다.
낙지철 끝나고 오도리(보리새우)철. 남창장은 그 오도리를 구하러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이다. 지금이 막 시작되는 때여서 찾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번 장에는 한 마리도 올라온 게 없다. “앞장날 살짝 나왔다가 들어가 불었어. 연안에 ‘인자 오도리 잡으쇼’ 하고 맛보기 보여주고 다시 빠져불었어. 8월 말이나 돼야 올라올 것 같어.” 안평리에서 오도리잡이를 하는 고선애(62)씨 말이다.
해남은 숭어, 완도는 돔, 영암은 껄떡…
“이게 뭐예요?”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어물 상인이 이름을 가르쳐 줘도 다들 얼른 못 알아듣는다. “목떼기?”
좁은 대야 속에서도 한 번씩 헤엄이 시원하다. 몸에 누런 빛의 반점이 여러 개 있어 더 예뻐 보이는 ‘목떼기’는 ‘목탁가오리’. 큰 강 하구의 뻘이나 모랫바닥에 살며 새우, 게 등을 주로 먹고산다.
맛은? “간재미보다 훨씬 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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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치조림과 고등어조림에는 호박이 제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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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떼기 먹으려면 상당한 공력이 필요하다. 간재미는 신문지로 쓱쓱 문질러 곱(겉에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만 없애고 썰어 먹으면 되지만 목떼기는 간재미보다 껍질이 훨씬 두껍다. 신문지로는 안 된다.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갖고 일단 요놈에다 조금씩 부어. 그러면서 수세미로 문질러. 한 껍딱 벗겨노믄 쓸개 빼고 다 묵어. 버릴 게 없어. 회로 묵으믄 간재미보다 살이 많은게 씹는 맛이 더 나고. 살짝 말려갖고 찜을 하믄 그렇게 맛나고. 묵어봐야 이놈 예쁜 줄 알제.”
강진에 살며, 강진장 해남장 완도장 남창장 등을 돌며 생선 장사를 하는 김창주(60)씨는 그동안의 장사 경험으로 지역마다 생선 먹는 것도 다르다고 말한다.
“해남 여그는 숭어를 좋아라 한디 영암 사람들은 숭어 잘 안 묵어. 껄떡(농어)을 잘 묵제. 해남은 껄떡 잘 안 묵고. 해남에서 껄떡 한 마리에 천원에 내놓아도 안 사간디 영암에서는 이천원에 내놓아도 사가. 보성하고 벌교는 장대를 알아주고 여수는 민어에 환장하고. 완도 사람들이 제일 비싼 생선을 잘 묵제. ‘썩어도 돔’이라고 돔이 고기의 왕인디 완도에서 팔리제, 딴 데서는 안 팔려. 완도에서 돔 열 마리 팔믄 해남에서는 두 마리나 팔제. 완도 사람들은 잔치할 때 문어가 꼭 들어가네. 해남 사람들은 하는 사람 있고 안 하는 사람 있는디 완도에서는 문어 안 올리면 욕 얻어먹어. 그런 거 보믄 재밌어.”
다 바다의 영향 때문이다. 그 지역 바다에 나는 생선의 입맛에 길들여진다는 것. “영암은 수심이 얕으니까 껄떡이 많이 걸리고, 완도는 수심이 좋으니까 돔 같은 비싼 고기를 잘 먹제. 병어는 전라도에서는 대접받지만 경상도에서는 제상에도 안 올려. 전라도는 제사상에 올리는 탕으로 명태를 쓰는디 경상도는 오징어를 써. 바다에 매여 있는 거여.”
김창주씨가 알려주는 생선회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 “포 떠 갖고 얼음물에 1분 정도 담갔다가 묵으믄 훨씬 쫄깃쫄깃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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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란 끝내고 살이 오른 문어. 방금, 막, 잡아왔다. 먹물을 쏟아낸다. |
ⓒ 김창헌 기자 |
“어물이 하도 좋은게 금방 팔려불어서 ‘허망한 남창장’이여”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이 있다. 박덕자(66)씨는 “옛날에는 남창장이 없다시피 했어. 한 시간 서고 끝나불었제. 그런게 허망한 남창장이라고 했제” 라고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김영우(72) 할아버지는 “남창장 어물전이 좋잖여” 하며 말을 꺼낸다. “남창장 어물전 좋단 말 듣고 외지사람이 남창장을 찾아오는디, 어물이 하도 좋은게 금방 팔려불고 어물전이 일찍 끝나불어. 근게 고기 구경도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가. 그래서 허망한 남창장이라고 한 거제.”
향토사학자 최종관(68)씨에 따르면 남창장은 1943년 무렵 이 지역 소방대원이었던 강철신 최석기씨 등이 주축이 돼 장이 세워졌다. 송지장 원동장 좌일장 등 주변의 장이 대부분 십리 밖이어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었다. 80년대 전까지만 해도 장이 오전 10∼11시까지 반짝 서고 마는 장이어서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허망한’이라는 말 속에는 남창의 그 당시 상황이 담겨 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한강철교를 옮겨 조립한, 국내 최초의 연륙교량인 ‘완도교’. 완도를 코앞에 두고 있던 남창은 완도가 연륙이 되며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는다. 최종관씨는 “남창이 완도 관문 역할을 하며 완도 사람들이 거쳐가던 곳이었는데 연륙교가 나며 남창은 그냥 지나쳐 가버린 곳이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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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적한 자연석이 선창 역할을 하던 남창포구도 상황이 달라졌다. 고등어 준치 은상어 삼치 갈치 고등어 등 고깃배들이 들어와 경매입찰을 하고 산간으로 올려 보냈던 포구. 완도교가 생기며 해산물은 더는 남창포구로 들오지 않았다. 완도항을 거쳐 완도교를 지나 13번 국도를 타고 전국으로 직송됐다.
남창과 완도 사이에 있는 섬이 달도. 완도교 완성에 앞서 일차적으로 완성된 남창과 달도 사이의 남창교 또한 남창의 쇠락을 부채질했다. 남창교의 건립방식이 물길이 흐르지 않는 둑 방식으로 만들어져 김과 톳 양식으로 번창했던 남창 바다가 죽었다.
“돛대 단 중선배들이 들어와서 파시를 열고 염장하는 집도 셋이나 됐었어. 목포 부산으로 가는 배가 여기 닿아 쌀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고 부산항에서 무역으로 들어온 물품이 남창에서 풀렸었어. 그런디 완도가 육지가 되면서 싹 사라져 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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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헌 기자 |
관광객들 발길 이어져…해지도록 보는 ‘골장’
남창장은 80년대 이후 기세를 편다. 남창은 해남과 강진, 완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상업을 주업으로 삼아 성장하게 된다. 북평, 북일, 송지의 싱싱한 해산물이 남창장으로 모이며 어물전과 갯것전(조개, 파래, 개, 굴 등을 파는 가게)이 다른 장에 비해 크게 형성된다. 완도를 통해 제주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을 비롯한 관광객들이 들렀다 가는 명소가 된다.
최종관씨는 “남창 시내가 전부 장이었다. 장이 남창농협 앞에서 섰는데 상인들이 달도 앞까지 늘어서서 장사를 했다. 인근 바닷가 사람들도 고기와 조개를 장에 가져왔고, 찾는 사람도 갈수록 늘어났다.”
최씨는 장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이유 하나가 주민들의 시장을 살리려는 욕구였다고 한다. 복잡한 교통체증지역도 지역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단속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장을 유지하기로 한 것.
남창장은 싸전도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완도 본섬을 비롯한 청산도 추자도 등 섬 사람들이 장을 찾아 곡식을 사갔기 때문이다. 특히 청산도 추자도 사람들은 곡식과 지붕을 이을 짚, 고기, 공산물을 사가려고 바다에서 잡은 멸치를 남창장에 유통시켰다.
지금 남창장 분위기는 다른 오일장과 사뭇 다르다. 주민들이나 상인들이나 앞으로 더욱 번창해 나갈 것이라 믿고 있다.
거기에는 예전의 명성을 잇고 있는 어물전이 그대로 성시를 이루고 있고 무엇보다 4년 전 마을에서 나와 길가로 옮긴 새 장터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완도로 드는 단 하나의 길목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장이 갈수록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주말 매상이 확연히 다른 곳이 남창장이다.
어물상 김창주씨는 “남창장도 ‘골장’(해지도록 보는 장)이나 다름없다. 최근 완도를 비롯해 해남 관광객들이 늘며 완도장 강진장 해남장 못지않게 장 위세가 커졌다. 상인들도 손님 없는 날에도 오후 2시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약속하는 등 어떤 장보다 장을 활성화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남창장 자체가 관광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와서, 구경해 보시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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