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늙은 밤나무의 선물

정용주·시인 《고고춤이나 춥시다》의 저자




Url 복사하기
스크랩하기
블로그담기











▲ 정용주·시인 《고고춤이나 춥시다》의 저자
치악산 숲 속 내 움막 마당에는 산밤나무가 하나 있다. 가을에는 야무진 알밤을 마당에 툭툭 던져 놓고, 때로는 깊은 밤 함석 차양에 떨어지며 딱! 하고 소리를 질러 잠든 나를 놀라게도 한다. 이제 깊은 겨울이 오고 밤나무는 한 장 남은 달력의 날짜처럼 몇 개의 잎사귀만을 매달고 바람을 맞는다. 우툴두툴한 껍질에 파인 깊은 주름과 가지를 잘라낸 톱 자국을 몇 군데나 가지고 있는 밤나무는 아침에 방문을 열면 일찍 일어난 노인처럼 마당에 서 있다.

더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나무는 그러나 깊은 겨울을 건너는 동안 나에게 따뜻한 위로와 먼 곳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일깨워준다. 이 늙은 밤나무에는 딱딱해진 가지마다 알밤을 뱉어낸 쭉정이가 벌어진 목화송이처럼 매달려 있는데 숭숭한 가지 사이로 차가운 구름이 지나가고 때로는 보따리 같은 흰 달이 걸린다. 나는 이것을 그냥 쭉정이라 부르지 않고 쭉정이 꽃이라는 나만의 호칭을 주었다. 밤에는 바삭거리는 눈을 밟으며 새벽에 오줌 누러 나왔다가 고개를 들어 가지에 달려 있는 이 쭉정이 꽃을 올려다본다.
그럴 때 먼 허공에는 수만 평의 메밀꽃밭을 거꾸로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별이 반짝인다. 이것은 겨울 숲의 적막을 건너가는 내게 늙은 밤나무가 주는 선물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삶의 새로운 의미를 하나 더 깨닫는다. 누구에겐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존재란 없다고 나무는 말한다. 그가 내게 무언가 주지 않아도, 내가 그를 발견하고 느끼며 그에게 감사할 때,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된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