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는 빈 컵… 뭐가 담길지 기다릴뿐”









“무섭게 생겼다고요? 중학교 이후로 싸움 해본 일 없어요.” 지난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배우 김윤석은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며 “어떤 배우가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지난해 ‘추격자’로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 독식 김윤석

《실핏줄 터져 붉어진 흰자위. 다듬지 않은 거친 수염. 지난해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한 ‘추격자’의 여광()은 없었다. 하반기 개봉할 영화 ‘전우치’ 촬영에 새해 벽두부터 전력투구하고 있는 배우 김윤석(42)을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말 술자리 때문에 얼굴이 안 좋으냐고요?(웃음) 전국을 누비는 ‘전우치’ 촬영에 기분 낼 짬이 없었습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랑 세 번째 같이 하는 영화인데, 액션 장면이 많아 재미있는 만큼 힘이 좀 드네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배경 인물로 나왔던 그가 연기파 주연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하지만 김윤석의 연기 데뷔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부산의 극단 ‘현장’이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첫 무대였다. 3분 정도 나오는 신문팔이 소년 역할이었지만 긴장해서 잘 걷지도 못했다.

1995년 장사를 하겠다며 무대를 떠났다가 2000년 돌아왔을 때, 극단 연우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송강호는 최고 배우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연말 영화제를 휩쓰는 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TV를 통해 지켜봤다.

“질투요?(웃음) 강호 씨가 잘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나요. 가장 좋아하는 배우고 항상 생각하는 친구인데요. ‘연기 다시 같이 하자’고 채근하던 강호 씨가 시상식 무대에서 건네 준 상패를 손에 쥐었을 때 ‘이렇게 벅찬 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겠나’ 싶었습니다.”

불혹() 뒤에 거머쥔 성공에 대해 김윤석은 “실감이 안 나고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난 덕분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죠. 배우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둘 수 있는 성취는 없어요. 좋은 작품, 감독, 배우가 모여야 하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베스트일 수 있나요. 느낌대로 편안하게 가면서 주어진 일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최고의 순간이 오겠죠.”

그는 인터뷰 뒤 사진 촬영에서 좀처럼 웃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떻게든 웃겨 보려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가식적으로 밝은 표정 짓는 걸 싫어해요. 억지웃음을 짓기보다는 무표정하게 사람들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게 좋아요.”

멜로드라마 주연을 맡겨도 무뚝뚝한 표정을 고집할까.

“험악해 보인다고요? 선입견 참 무섭네요. ‘타짜’ 전에 알던 사람들은 ‘당신처럼 순하게 생긴 사람이 무슨 악역을 하느냐’고 했다니까요.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독특한 ‘결’은 있죠. 하지만 그 결 위에는 어떤 캐릭터든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나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거의 입어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전우치’의 화담 서경덕 역할은 색다른 도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 딱 한 번 경험한 와이어 액션을 거의 매회 해야 하고, 신비한 도인 화담의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만들어 내야 한다.

“사료에 기록된 선비 화담과 야사 소설에 등장하는 도사 화담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500년의 시공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려보려 하고 있습니다.”

김윤석의 2009년 첫 작품은 상반기 개봉할 코믹 스릴러 ‘거북이 달린다’. 그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을 쫓는 어수룩한 형사로 나온다. 전우치의 화담도 주인공을 잡으러 다니는 인물. ‘추격’하는 캐릭터로 관객에게 각인될 염려는 없을까.

“멜로도 결국 남자와 여자가 서로 쫓고 쫓기는 얘기잖아요.(웃음) 쫓아야지 관계가 생기고 드라마가 이뤄지죠. 저는 배우가 빈 컵이라고 생각해요. 추격자 같은 강한 블랙커피를 비운 뒤 우유가 담길지 물이 담길지 컵은 알 수 없죠. 그저 잘 비우고 닦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촬영현장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저릿한 ‘정점’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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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특별기획](1)이소선의 ‘80년, 내가 살아온 이야기’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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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39년을 싸웠는데, 요즘 현실보면 억장이 무너져”
ㆍ이소선-오도엽 대담

참 모질게도 걸어왔다.




이소선씨(오른쪽)와 오도엽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을 함께 걸어오고 있다. |정지윤기자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그 아들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뛰어든 지 39년. 사람들은 그녀를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 그녀의 삶은 질풍의 시대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삶에 다름 아니다. 한국 노동운동사와 한국 현대사의 고갱이다.

신산(辛酸)한 그녀의 팔십 평생을 꼼꼼히 살려낸 이가 있다.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시인 오도엽씨. 지난 2년 동안 이씨와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이씨가 들려준 이야기를 녹취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나온 책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후마니타스)이다. 사실 책은 이씨가 가슴 밑바닥부터 토해낸 이야기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오씨는 5일부터 매주 3차례씩(월·목·금) 못다한 이야기들을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렸던 지난달 29일 종로구 창신동 봉제골목 한쪽에 자리잡은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작은 방에서 두 사람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워냈다.


이소선 “사람이 똑같이 살 때까지, 죽으면 안돼 싸워야해”

오도엽 “어머니 삶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낍니다”


오도엽=몸도 안 좋으신데 요즘도 유가협(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어머니들과 싸우러 가시죠.

이소선=무슨 일 있다고 하면 모여서 같이 가야지. 어제도 두 군데나 갔다 왔지. 추도식이 많아. 자식들 죽은 날짜 잊지 않으려고. 지금도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 보면 속이 아파. 내가 노동조합 18년, 유가협 20년을 했어. 주야장천 싸움하면서 얻어 맞고 잡혀가고…. 우리 아들이 죽었는데 우리야 죽으면 뭐 어떠냐면서 싸우지. 사실 시위 도중 경찰에게 많이 맞아서 지금 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오늘 같이 흐린 날은 온 몸이 쑤셔. 그래도 애쓰는 사람들 입장을 봐서 안 갈 수가 없지. 하나 하나 싸우면 안돼. 같이 싸워야지.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

오도엽=지금까지 그렇게 해오신 데는 무슨 이유가 있으신 것 같아요. 사람들을 그리워하시고.

이소선=유가협 어머니들이 미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속에 열이 치밀어 돌아가시는 분이 많아. 그래서 ‘나도 아들 죽고 살고 있지 않으냐’고 얘기하고 두세 달 같이 살기도 해요. 서로 위로해주면서 울면 달래고 아프면 약 사주고 안 먹으면 죽 끓여주면서 같이 살지. 그러다 보니 밤에 잠을 못 자. 옛날 생각하다 보면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질기기도 해. 같이 싸운 분들 생각해보면 너무 고맙고 태일이 친구들 보면 얼마나 착한지 그 사람들이 태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나요. 태일이가 얼마나 하다하다 못하니까 죽었겠어. 그때 아무 얘기 말고 자기 말만 들어달라고 하더라고. 자기가 죽은 뒤 어떤 유혹이 올지라도 엄마는 과감히 반대할 수 있다고, 나한테 해당하지 않는 돈이나 물질은 돌 같이 보라고. 말한 거 지켜주겠다고 했어. 현장 나와서 어떻게든 싸워야 된다고 생각했어. 그때 태일이 친구들과 학생들이 같이 해줬지요.

오도엽=어머니는 세상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고.

이소선=내가 두 달 동안 팔순 잔치 안한다고 했어요. 경제도 이렇고 서민도 죽어가고 비정규직도 많이 생기는데…. 사람들 죽는 거는 극단적이고 순간적이야. 올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잠이 안 와. 1970·80·90년대 이 산을 넘으면 소외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거라고, 얻어맞고 발로 차이고 감옥 가면서도 헤매고 다녔는데 이제 보니 억장이 무너집디다. 경제는 점점 더 나빠지고 투쟁하는 것도 없어지면서 여러 가지가 작년부터 실망스러웠어. 사람들이 곧 죽게 생겼는데 대운하를 한다 무엇을 한다는데 그 돈 가지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비정규직을 줄일 생각은 안해요. 경제가 악화되면 생기는 건 비정규직이야. 이제는 싸우면 될 거다라는 말도 못나오는 세상이 됐으니까 이제까지 살지 않았으면 그런 거 안 보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없는 사람들이 또 짐승처럼 되어가는 현실이 올까봐 자다가도 놀라.

오도엽=어머니는 항상 ‘내가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옷을 입어도 되나’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셨는지…. 가족까지 그런 굴레에 묶여 있는 것 같고요. 자식들이 무슨 행동을 하면 어머니에게 전화가 오니까요. 어머니도 자식들에게 항상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세요.

이소선=알아서들 하겠지. 도둑질만 안하고 살면.

오도엽=무슨 일이 있으면 몸이 아픈데도 가시는 걸 보면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이제는 좀더 젊은 분들이 해야할 부분인데 아직까지 어머니 같은 분이 하고 계시니.

이소선=축소되고 ‘찌끄러기’ 되어가는 게 안타깝지. 옛날 거리로 나간 학생들이 잡혀가면 <전태일 평전>을 보고 운동하게 됐다고 했어요. 국가보안법이 없어지고 감옥 가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더 이상 죽으면 안돼.

오도엽=2년 전 어머니께 인사하러 갔을 때 ‘내가 1, 2년 더 살겠어’ 하셨을 때 전율이 들었습니다. ‘노동자의 어머니’로 항상 쩌렁쩌렁 힘있는 모습이었는데…. 어머니의 기억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노동운동가나 어머니를 잘 알고 있는 분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전태일의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똑같은 고민을 가진 분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거든요. 그때부터 어머니와 밤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몰래 녹음을 했어요.

이소선=어휴, 녹음을 한다고 말이나 했나. 혼자 감추고 했는데. 녹음한다고 했으면 좀더 잘했을 걸.

오도엽=어머니는 오히려 한밤중에 기억력이 좋아지고 이야기하는 힘이 생기시는 것 같아요. 한번 말씀을 하시면 4~5시간을 하시고. 제가 피곤해서 눈을 감을 때마다 ‘니 자냐’며 뭐라 하시고.

이소선=70년대 미싱하던 열네살, 열다섯살 아이들이 밤이면 우리 집에 왔어. 월급을 제대로 못받았지. 나도 태일이 죽고 직접 가보고 나서야 형편을 알았어. 기가 차서…. 얘기를 듣다 보면 너무 한 거야. 태일이가 나한테 좀 가르쳐 준 게 있거든. 잘못 없는데 해고하면 부당노동행위다, 너희가 모여 투쟁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청계노조를 7평 사무실에 만들었지. 그때만 해도 사람 취급을 안했어. 그래서 모여 가지고 농성해 보자고 얘기했지. 몇 년을 잠 안자고 이야기했으니까 이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밤이면 정신이 나고 낮이면 빌빌해.

오도엽=책 쓰면서 어머니하고 다투기도 했지요. 어머니는 당신이 부각되는 걸 말리셨습니다. 유가협이나 청계노조를 나 혼자 했느냐면서요. 또 사람 관계라는 게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닌데 그런 건 쓰지 말라고.

이소선=그분들 없었으면 내가 무엇을 했겠어. 그래서 지겹도록 고맙다고 했지요. 모든 사람이 집에 발만 디디는 것도 고맙지. 이야기를 같이 한 것도 고맙고. 길에서 만나면 얼마나 고마운지.

오도엽=책에는 구술한 내용의 20분의 1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경향신문 연재에선 책에서 밝히지 못했던 얘기들이나 어머니의 소중한 얘기들을 담을 겁니다. 어머니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굵직한 사건마다 하신 역할이 있으시니까 좀 알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노동운동이나 근현대사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써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제가 옆에서 보면 사람들이 어머니를 뵈러 오면 무릎을 꿇고 앞에서 말을 잘 못하고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저녁 먹었는지 챙겨주시고 방에 불 넣고 자는지 챙기고 잔정이 많더라고요. 사람을 그리워하시고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시고.

이소선=사람보다 귀중한 게 또 어디 있겠어.

오도엽=지금 시대가 어렵고, 사회가 후퇴한 거 같다고 하는데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새로운 희망과 힘을 느꼈어요. 어머니 삶이 희망을 주고 응원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머니 삶은 과거로 묻혀진 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마음가짐과 힘이 될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세상이 힘들다가 아니라 세상을 적극적으로 바꿔갈 수 있는 힘이 됐으면 합니다.

이소선=죽는 힘을 다해 싸워야지 죽으면 안돼. 싸우는 것도 다 같이 싸워야지. 내가 노동자도 학생도 같이 싸워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거든. 처음 노조 만들 때 내가 힘이 있었나. 태일이 친구들이 해줬지요. 정보부인지 형사들이 와서 돈 줄 테니 태일이 장례식 하자고 하니까 막 (속이) 끓더라고. 그 아까운 아들, 사랑하는 아들 뼈하고 피를 팔아서 살지 않았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안 받았지. 말 안듣고 버티니까 계속 탄압하고. 태일이 풀빵 사 먹여 줬던 시다들, 태일이가 사랑했던 그 얘들이 태일이 죽었다고 하니까 ‘그 오빠가 죽었다고요’ 하면서 울더라고. 지금 힘없는 사람을 이리저리 발로 차버리고 권력이나 돈 있는 사람 걸어가는 세상 만들자는데 얼마나 야비하고 치사하고 분통터지는지. 사람이 똑같이 같이 살자. 이거 100%는 못하겠지만 양심은 조금 가지고 살아야하지 않겠어.


▶오도엽 서울의 한 대학을 다니다 1989년부터 창원으로 내려가 공장에 다녔다. 오랜 수배와 감옥생활을 겪었다. 97년 ‘굵어야 할 것이 있다’로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고 99년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를 냈다. 최근까지 농민과 노동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해왔다.


▶이소선‘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자의 어머니’. 1970년 11월13일 “노동자도 사람이다”라며 분신한 아들의 뜻을 이어 청계피복노조를 만드는 등 평생 노동·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그 탓에 180차례 ‘범법자’가 됐고 3번 감옥에 갔다. 86년 창립된 유가협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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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9-01-03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선 여사의 구술을 오도엽씨가 풀어낸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후마니타스) 올해 가장 먼저 보고 싶은 책입니다.
 

[책과 인생] 20년 前 종이자료를 꺼내며…







 



방학을 한 김에 자료 정리에 들어갔다. 재놓기만 한 종이자료를 잘 분류해서 책처럼 만드는 일과 1만여 권의 책에 나만의 분류번호를 만들어 붙이는 일이다. 종이자료는 주로 20여 년 전 유학시절 때 집에다 복사기까지 사다 놓고 저널논문과 단행본을 복사한 것이었다. 양이 제법 되어서 4cm 두께의 파일박스 400개를 사서 라벨을 붙이고 담았다.

그러다 문득 이 자료들 가운데 죽기 전에 한 번도 안 읽어볼 것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가 한심해지기 시작했다. 내 전공은 건축역사이지만 소속이 공대라서 더 그랬다. 옆 교수들을 보면 최신 컴퓨터 몇 대 가지고 훌륭한 연구들을 척척 해내고 중학교 다니는 딸내미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거의 모든 과제를 다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50평짜리 시골 아파트를 전세 내서 서재로 쓰면서 5톤 트럭 3대분의 책을 짊어지고 2~3년마다 쫓겨나듯 이사를 다니는 수고를 하며 살고 있다. 종이자료 정리하는 걸 옆에서 본 누군가가 말했다. 자기라면 파일박스 400개 살 돈으로 스캐너를 사서 그 자료를 스캔받겠다고.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 시대에 너무 뒤떨어져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종이자료를 주제별로 분류하기 위해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입가에 작은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주옥같은 연구물들이라서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학문세계가 몇 단계는 성숙해지는 느낌이었다. 종이의 촉감을 지문 끝으로 비벼대는 쾌감도 제법 컸다.

온라인 자료만 잘 검색해도 웬만한 일이 꾸며지고 심지어 학자 흉내까지도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맨 끝 최고수가 되기 위한 진짜 고급 자료는 아직 모두 세계 유수의 도서관들 저 구석에 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꽁꽁 숨어있다.

지금이야 집에 앉아서도 쉽게 책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지만, 활자매체를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큰 노동이었던 수십 년 전, 심지어 100여년 전 연구물들을 훑어보노라면 활자 하나하나가 화살이 되어 내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나라와 인종을 떠나서 이렇게 힘들게 연구를 한 꼿꼿한 선배들의 결과물들을 복사기 몇 번 돌려서 쉽게 손에 넣는 호사를 누려놓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저런 불평만 하고 있는지 내 자신이 창피해졌다.


임석재 건축가ㆍ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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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노인의 움막엔 다시 연기가 오르고…

정용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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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주
치악산 겨울 숲에 싸락눈이 내린다. 물을 길어다 솥에 붓고 아궁이에 장작을 태우며 부엌문 밖으로 내리는 적막과 고요의 흰 가루들을 본다. 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과 싸락눈, 문득 미당 서정주의 시 구절 하나 생각난다.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내 움막 500m 아래쯤에 유일한 이웃인 노 부부가 염소를 키우며 살고 있다. 할아버지의 연세는 올해 일흔여덟이다. 처음 내가 이곳으로 온 6년 전에 할아버지는 염소 사료 두 포대를 지고 거뜬하게 산길 2km를 앞서 걸어가시고 나는 한 포대를 지고 낑낑거리며 뒤를 따랐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굴뚝에 흰 연기를 피워 올리며 이 숲에 살았다.

그러던 할아버지께 운명이 보내준 선물이 찾아왔다. 스무 살 무렵 사고를 당해 정신을 다친 딸을 마음에 묻었던 할아버지가 며칠 전 음성의 한 요양원에서 그 딸을 찾았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이미 쉰이 넘은 딸이 "아부지!" 하면서 헤죽이 웃더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마당 화덕에 산당귀를 끓이고 시내에 나가서 과자와 빵을 한 아름 사왔다. 좋아하시던 술도 끊고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삶의 애착이 드러났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삶의 무게가 늙은 어깨에 얹어진 것이다.

평소에 가끔 내 움막으로 오는 오솔길을 비틀비틀 올라오셔서 "야 이놈아 술 한잔 내 와라!" 하기도 하고 삼짇날이나 음력 9월 9일에는 몇 개의 과일과 포를 가지고 바위 아래 터에서 기도를 드리던 노인. 그 가슴 깊은 곳에서 마르지 않고 흘러간 슬픔의 샘을 이제서 나는 들여다본다. 그분의 굴뚝에도 지금 느리게 저녁 군불 때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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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언] 달에 취한 그대에게

정용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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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주·시인
치악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내 움막을 방문하는 사람들 중에 이곳을 취월당(醉月堂)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움막 뒤편의 톱날 같은 능선에서 잡힐 듯이 불쑥 얼굴을 내밀고 하나의 흠집도 없이 사뿐히 무한 허공으로 제 몸을 띄워 올리는 이 기막힌 순간을 운 좋게 맞이하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그 달에 취한 듯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달에는 모든 이들의 잃어버린 추억이 저장되어 있다. 산 속에 살며 때로는 잊어버리고 한줄기 굴뚝 연기를 겨울 숲으로 보내고 잠이 들 때에도 저 달은 묵묵히 내 움막을 내려다보며 긴 밤을 건너가고, 문득 쳐다보면 달은 두고 온 아이와 같이 저 혼자 불쑥 커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오늘은 음력 열엿새 날, 십육야(十六夜)이다. 매월 열엿새 날 밤에 뜨는 달을 기망(旣望)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바라보며 감탄하던 달은 보름달이 아니라 오히려 기망이라고 하는 이 달이었다. 송나라의 소식(蘇軾)은 적벽부(赤壁賦)에서 '임술지추 칠월기망(任戌之秋 七月旣望)' 으로 시작하며 밝은 달빛 아래 천하의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적벽의 흥겨운 놀이를 담고 있다. 그 옛사람이 보던 달을 이제 내가 보고 있다.

아무도 올 이 없는 산 속의 밤에 장작 몇 개를 가져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운다. 노란 종이 등이 켜진 방으로 들어가 오래된 빙 크로스비의 크리스마스 캐럴송을 틀어놓는다. 남자의 낮은 음성으로 은은하게 울리는 '고요한밤 거룩한밤'이 창호지 문틈으로 흘러나온다. 겨울나무와 달과 별이 음악을 듣는다. 이렇게 내 한해는 가고 또 새로운 해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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