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이후로 지금까지 전혀 글을 쓰지 못했다. 그 사이 내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후배의 사고, 그리고 진행했던 회사일... 그리고...  다시 서재에 글을 써본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카페에 올린 글인데... 앞으로는 서재 관리 잘 할 수 있을까?) 

 

따뜻하고 커피향 같은 글일지는 모르겠습니만, 어제 느꼈던 푸근한 기억 하나를 새겨봅니다.

 

세상은 벗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인데, 이러한 소중한 친구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뇌출혈을 극복하고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인데, 지금은 직원이 몇 안되는 작은 제조업체에서 제조와 영업, 그리고 배달까지 도맡아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아시다시피 최근까지 제가 조금 바쁘게 돌다보니, 1년 남짓 가끔 전화로 소식만 주고받고 만나지는 못했던 사이였지요.

 

"날도 쌀쌀해지는데 언제 저녁이라도 한번 하자."

"그래, 한번 봐야지."(바다, 그 카페에서 제 닉네임이 '바다'입니다)

"그런데 다른 얘들은 잘 있나?"

"글쎄, 얼마전에 A하고 통화했는데, 학원일이 바쁜 모양이야. 그리고 지난 주에 B한테 전화왔는데, 특별한 내용은 없었어."

"야, 그런데 우리 홍교수 모시고 동기들 송년회한 게 몇 년이나 지났지?"

"글쎄, 그게... 2003년인가 4년인가? 내가 파주로 이사온 전후였던 것 같은데..."

 

옛기억을 떠올리다가 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내일, 너 시간 어때."(바다)

"엉, 강원도에 제품 배달하고 올 일이 있는데, 늦지 않게 올라올 거야."

"그럼, 너희 집 근처인 안양문예회관 앞에서 내일 7시쯤 보자."

"어, 너 건너올 수 있어?"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지만, 남들이 하는 '번개'라는 것을 해보자는 꾀가 발동했습니다. 휴대폰에 내장된 연락처를 일별하면서, 외국에 있거나 먼 지방에 있는 녀석들을 제외하고, 수도권에 있는 동기들을 세어보니 열 명 가량 되더군요.

 

'번개. 국문 84 모임. 11월 11일(수) 저녁 7시, 명학역 근처 안양문예회관. 문의는 바다에게..'

 

그리고 답신을 기다려보았습니다. 한 두 명 정도가 내일은 어렵다는 둥, 아무리 번개라도 며칠 시간을 두고 해야지 깰 수 없는 선약이라서..(그래서 번개야 임마^^) 등의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여덟 정도는 어떨지...

 

한참 공사중이라 어수선한 안양문예회관 앞에 제일 먼저 닿아서 누가 저 골목길을 돌아올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맨 처음 연락했던 친구는 용인 근처에서 길이 막혀서 30분쯤 기다려달라고 하더군요.

 

낙엽이 떨어지듯 시간도 툭툭 지나가고...

한 친구가 골목길을 돌아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걸 어찌 알고 날을 이렇게 잡았냐. 기특하다."

중국과 평택공장을 오가며 바쁘게 살고 있는 벗이었습니다.
한 건 성공!

 

"오는 녀석들은 전화할테니, 우선 당구라도 한 게임..."

말 그대로 당구 한 게임이 끝나도 제 전화는 조용했습니다. 그리고는 용인에서 부랴부랴 올라온 친구가 들어왔지요.

 

"니 온다 해서 내 단골식당에 상을 봐놓으라고 했으니 가자."

 

셋은 같이 단골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정말 단골이었는지 메뉴판에도 없는 성찬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통통한 생굴회에 미나리무침, 그리고 보쌈고기와 얇게 썬 사과, 맛있는 된장, 그리고 생태탕까지... 집 나갔던 입맛이었더라도 되돌아왔을 음식을 나누며,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월초에 교통사고가 있었네. 그리 불편하지 않아서 드러눕지는 않았어."(미안하다! 친구야)

"그래도 나이 생각해서 며칠 쉬면서 진찰을 받아보지 그랬어."(바다)

"내가 안 나가면 회사 문 닫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래도 인마, 너 성한 몸 아니야."

 

중국쪽에서 활동중인 벗은 그쪽 근황을 전하기도 하고, 교과서 이야기도 하고...

다들 아시겠지만, 이럴 때 시간은 화살 같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흐르고, 역시 갑자기 번개 치면 어려울 나이들이야. 아줌마들은 한창 아이들 저녁 챙겨야 하고... 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옮기려고 생각하는 즈음이었습니다.

 

나이를 곱게 먹은 듯한 여인 한 명이 식당문을 열고 들어오더군요.

 

그 순간, 25년전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습이 영화처럼 오버랩되면서, 긴가민가 하는 찰나!

 

"야, 바다! 넌 도대체..."

"누구신데요? 어, 어, 너.... 넌!"

"그래, 나야. 그런데 너 엉뚱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우리 몇 년만이지? 그리고 너는 00이고, 넌 00이지? 너희들은 정말 이십 년만에 보는구나."

 

그 얼굴 속에서 예전의 모습이 찾아지더군요. 15년전에 마포 사무실 앞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었던 기억도 다시 떠오릅니다. 그때 어머님이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야, 근데 니들 정말...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어? 우리 아들 수능시험 보는 날이야. 그런데 이렇게 불러내면 어떡해!"

 

사내녀석들은 아직 아이들이 초중등생들이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지요. 여자동기들은 대개가 그렇지요. 그렇구나.....

 

"그리고 바다, 너! 그때 15년전에 만나고 나서 한번 연락이 없냐? 난 수첩을 잃어버려서 그랬는데, 너는?"

"나도 잃어버려서...^^ 하지만 우리 회사로 전화하면 알려줄텐데, 네가 먼저 연락하지!"

 

만나자마자 투닥투닥.

 

내일이 아들 수능일인데, 마다않고 찾아와준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난 오래 있지는 못해."(당연하지요)
하면서도 석 잔의 술을 나누기도 한 동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의 친구들은 그녀의 출현으로 인해 예전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수업시간에 가장 안 들어간 동기가 나인지, 너인지.(물론 접니다)

무기고 속의 권총은 누가 더 많았는지.

그리고 그때 누가 누구를 좋아했던 것 같다든지.

술 취해 학교 벽에 페인트로 썼던 문장이 누구의 시였는지.

 

그렇게 과거 추억 속에 놀다 보니, 그때의 그 청순함을 떠올리다 보니 이제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 눈가의 잔주름이 보이더군요. 작은 가게를 하다가 힘들어서 지금은 부업 삼아서 친구 가게로 일을 나간다고 하네요. 거친 손마디도 보이더군요. 술잔을 기울이고... 자작을 하려하니 "야,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그래도 술은 여자가 따라주는 게 낫단다." 하며 잔을 채워주는 넉살도 느껴집니다. 예전과 똑같은 것도 많지요. 나이가 두 살 많다는 이유로 그때나 지금이나 '누나라고 불러라' 하는 충고투는 마치 25년 전에 들었던 소리가 환청으로 다시 살아나는 듯 하더군요.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이 때문에 먼저 일어서며,

 

"다음 만날 때는 미리 상의해서 일정을 잡아. 이렇게 공치지 말고... 그리고 너무 반가웠다."

 

하는 그녀 눈가에 환한 웃음으로 피어나는 잔주름이 아름다웠습니다.

 

남은 친구들끼리 맥주 한 잔을 더 나누고, 대리운전을 불렀지요. 안양에서 일산으로 건너오는 고속도로에서 오래도록 떠올리지 못했던 가게 이름 하나가 떠오릅니다.

 

'아침이슬 꽃잎에'

 

그 당시를 기억해보면 인테리어를 근사하게 한 카페가 커피숍이나 다방보다 늘어나고, 입소문이 나는 카페는 단골들이 생기고, 특히 여대생들이 흡연장소로 많이 이용했던 곳이지요. 그 친구가 살던 아파트 앞 2층에 있던 카페 이름입니다.

 

그 카페에 앉아서, 수석으로 들어와서 1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 두겠다기에 그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했고, 많이 싸우기도 했고... 조그만 체구인데 주량이 만만치 않아서 그녀 집앞의 선술집에서 늦게까지 토론하다가, 그만 막차를 놓치고 홀로 공원 벤치에 신문지 깔고 덮고 모기회식을 시키기도 하고... 심한 숙취와 고열로 앓아누운 제 자취방 부엌에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기도 했던 기억. '그래, 네가 누나 맞다!'... 홧김에 '만약 우리가 고민하는 이 문제에 대해 네 생각보다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면, 00일 00시까지 청량리역 시계탑으로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 그 역 앞에서 세 시간을 홀로 기다리다가 돌아설 때 서있던 그녀(점점 신파조로 넘어갑니다). 그때 '삶과 죽음'이라는 뭐 거창한 주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돌맹이와 도서관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겨울산에서 찍은 그녀 사진이 제 앨범에 들어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 어머님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라고 배짱 부리기에는 대학교 1학년생은 너무 어렸겠지요.^^(제 아내가 이 글을 읽으면 화를 낼까요? 저 선수 또 가을 타고 있구나 라고 할까요^^)

 

그녀 눈가에 곱게 내린 잔주름을 보며, '곱게 나이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고, 미처 못한 이야기라고 문자메세지로 넣어 줄까 휴대폰을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었습니다.

그저 푸근한 기억으로 자리매김할 밖에요.


따뜻하고 커피향 같은 그런 글일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추억 하나가 그대들의 옛 추억을 떠올려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충분하겠지요.
이제부터는 또 서류를 만져야 할 시간입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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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9-11-13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 아이들도 이 글을 읽겠지요. 엄마한테 이를까. "엄마~ 아빠가 서재에 올린 이 글 읽어봤어?" 라고 말할까? 아니면 씩 웃으며 '그랬었군!'이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아내는 뭐라 할까. "여보, 정신 차려. 아무리 사내들이 나이 들면서는 추억 속에 빠진다고 하지만서도.."라고 할까? 아니면 토라질까. 궁금하다, 궁금해!

소나무집 2009-11-1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이들도 부인도 탓하기보다는 함께 공유하고 싶어할 것 같은데요.
저는 남편의 여자 친구나 제 남자 친구 이야기를 남편이랑 함께 수다꺼리로 삼는데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사실은 제가 더 많이 하긴 해요.
국문 84라는 단어에 무작정 공감대 형성, 저는 국문 86이기에.
아침이슬이라는 카페는 80년대 대학 근처라면 종종 있었는데
아침이슬 꽃잎에는 어디쯤일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저도 대학 졸업한 지 20여 년이 다 되어가니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문득 마음에 품고 강의실에 앉아 뒤통수만 무정하게 바라보았던 동기도 생각나고 그럽니다.
저는 여자라서 그런지 남자 동기들이 더 많이 생각나는군요.

달빛푸른고개 2009-11-22 16:42   좋아요 0 | URL
볼품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인신매매 넉달 ‘나타샤의 지옥’



확대 사진 보기 [한겨레] “공장 취직”이란 말에 한국행

“성매매” 강요 마사지 업소로

브로커에 번돈 뜯기고 빚까지

신고하자 위장결혼 혐의 입건

“평생 흘린 눈물보다 지난 4개월 동안 한국에서 쏟은 눈물이 더 많아요.”

우즈베키스탄 여성 나타샤(29·가명)에게 한국은 ‘눈물의 땅’이다. 최근 서울 신설동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에서 만난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온 한국.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지옥’이었다.

지난해 11월9일 그는 고려인 여성 김아무개씨와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휴대전화 조립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김씨의 말에, 17개월 된 딸을 고향 타슈켄트에 남겨둔 채였다. 하지만 입국하자마자 그가 간 곳은 서울의 한 휴게텔이었다. 김씨와 연결된 국내 브로커 조아무개씨는 “손님들을 마사지하고 성매매도 해야 한다”고 했다. 나타샤가 울면서 항변하자 김씨와 조씨 등은 그를 서울의 한 집창촌으로 끌고 간 뒤 “말을 듣지 않으면 이곳에 팔아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지난해 12월20일 나타샤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에 의해 경기 안산의 한 마사지 업소로 옮겨졌다. 그곳엔 몇몇 우즈베키스탄 여성들이 이미 ‘일’을 하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한국말을 잘하는 한 우즈베키스탄 여성에게 경찰에 신고해 줄 것을 부탁했고, 결국 같은달 30일 동료 6명과 함께 업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과 마음뿐이었다. 그가 업소에서 번 350여만원은 입국수속비란 명목으로 브로커가 모두 가져갔고, 그들은 여기에 더해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 하는 데 들어간 돈이 1500만원”이라며 갚기를 독촉했다. ‘돈 벌어 고향에 되돌아가 미용실을 차리겠다’던 나타샤의 꿈을 앗아간 브로커들은 여성 1명당 500만원씩을 받기로 하고 이들을 업소 등에 공급해 온 ‘인신매매범’들이었다. 브로커들은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종적을 감추었다.

안산단원경찰서는 지난 1월 중순 나타샤를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혐의로 입건했다. 한국 남성과 위장결혼을 해 공공문서를 거짓으로 기재했다는 것이다. 성매매는 ‘강요’에 따른 것이어서 혐의에 포함되지 않았다.

성매매 피해 여성을 돕는 두레방 관계자들은 나타샤의 입건이 적절하지 않다며, 지난 24일 안산단원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 박수미 두레방 상담실장은 “나타샤가 성 착취의 목적의 인신매매범들에게 속아 유인된 게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며 “경찰은 유엔이 정한 ‘인권과 인신매매에 대한 권고 원칙’에 따라 이들을 입건하지 말아야 했다”고 요구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국했다고 해도 인신매매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죄를 물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나타샤는 지금껏 귀향을 미루고 있다. 그는 “나 같은 피해자가 더 나오지 않기 위해 경찰이 브로커를 잡는 것을 두 눈으로 꼭 봐야겠다”고 했다.

안산/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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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작년 1인당 93병 마셨다
진로 12월 판매량 사상 최고

이성희 기자 summer@hk.co.kr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은 성인 1인당 93병의 소주를 마신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최대 소주업체 진로는 지난해 12월 한 달간 685만여 상자를 판매, 85년 역사상 최고 판매기록을 세웠다.

22일 대한주류공업협회에 따르면 불황이 짙어지면서 지난해 소주 판매량이 전년 동기대비 5.6% 증가한 1억1,613만9,000상자(360㎖ 30병입)에 달했다. 병으로 따지면 34억8,417만병이 팔려나갔다.

전체 국민 중 19세 이상인 음주 가능인구 3,750만 명을 기준으로 1인당 연간 93병을 소비한 셈이다. 1주일에 2병을 마신 꼴이다. 그러나 주류업체가 소매 유통업체에 판매한 양이 아직 모두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소비량은 이보다 다소 적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년 대비 소주 판매량 증가율은 2006년 6.7%에서 2007년 1.3%로 크게 둔화했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가시화한 불황과 맞물려 다시 큰 폭으로 뛰었다.

제조사별로는 진로가 전년 대비 8.7% 늘어난 5,973만4,000상자를 판매해 시장점유율 51.4%를 기록했고, 두산은 전년 대비 5.2% 증가한 1,285만3,000상자를 팔아 11.1%의 점유율을 보였다. 그 다음은 금복주, 무학, 대선, 보해, 선양, 하이트, 한라산 등의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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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설 선물은 '웃음'
온 가족 모여 사진 속 추억 더듬어봐요 



"엄마는 선본 지 한 달 만에 결혼하셨대요. 아빠가 좋긴 했지만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결혼하는 게 서운해서 신혼여행 가던 날 안 나가고 마구 우셨대요. 그 사이 동네 사람들은 새신랑 구경하자고 몰려들었다지요."

학원강사 이소라(여·24)씨는 22일 부모님 결혼 26주년을 앞두고 엄마가 보여준 사진을 들여다보며 엄마의 추억을 되짚었다. 택시 옆에 두루마기 입고 선 젊은 아버지 주변으로 구름 떼같이 모여든 마을 주민들의 흥분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씨는 "엄마 아빠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 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카메라는 특별한 날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귀한 기계였다. 깊고 흥미로운 아날로그 이야기가 옛 사진 속에 숨어 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설 연휴, 장롱 깊숙이 묵혀 놓았던 옛 사진이 진가(眞價)를 발휘할 찬스다. 묵은 앨범을 꺼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야깃거리를 찾아보자.

수학여행 기념사진 속 아빠, 가사 실습 중인 엄마 등 낡은 사진 속 '그분' 찾기 게임으로 옛 사진 탐색을 시작하는 게 이야기 보따리를 여는 비결이다. 고교생 권유진(17)양은 "아빠의 고등학교 소풍 사진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고 했다. 1975년 경복궁으로 놀러 간 사진 속에서 아빠는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까지 손에 든 모습이었다. "저 어릴 땐 '공중 도덕 지키라'며 잔디밭 들어가면 많이 혼내셨거든요. '아빠는 왜 그러셨느냐'고 했더니 머쓱하게 웃고 마시더라고요."

회사원 정현교(31)씨는 아내와 함께 옛 앨범을 뒤적이다 35년 전 아버지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을 발견했다. "대구 시내 한복판을 계란과 밀가루 뒤집어쓴 모습으로 당당히 걷는 아버지의 모습이란…. 밤 11시 넘어 들어갔다고 신발을 집어 던지시던 엄한 아버지와 매치가 되지 않더라고요. 아버지는 "만날 1등만 했는데 돈이 없어서 대학 못 갔다"는 한마디로 사진 속 '정황'을 설명하셨어요."

불안한 경기 탓에 뒤숭숭한 올해 설, 힘들었지만 꿋꿋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사진 속 옛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도 좋겠다. 훈장님이었던 아버지가 "여자는 공부하면 안 된다"며 책을 불태워 상경했던 엄마, 유원지에 데이트 가서 남의 스쿠터 빌려 포즈 취하는 연인들…. 부자(富者)가 아닌 게 확실한데도 어깨 펴고 까르르 웃는 사진 속 얼굴들이 명절에 웃음을 선물한다.

※사진이 소개된 분들께는 '한국후지필름 포토이즈'에서 사진을 인화해 액자에 담아 보내드립니다.



▲ 신혼여행 떠나기 직전, 엄마는 나가기 싫다고 집에서 울고 있고 훤칠한 아빠만‘새신랑 보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네요. 엄마 아빠는 22일 결혼 26주년을 맞으셨어요. 이소라(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 1970년 엄마의 운동회 사진입니다. 엄마는 지나간 젊음이 서글프다3며 옛 사진을 멀리 하시지만 저에겐 엄마가 김연아보다 아름답답니다. 그 런데 엄마! 옷이 좀 야한 거 아니우? 백소영(경기 평택시 합정동)




▲ 1975년 아빠의 고등학교 시절 경복궁 소풍 사진입니다. 사진 찍자마자 경비원 아저씨에게 걸려 혼이 단단히 났다고 하네요. 권유진(서울 노원구 중계 1동)




▲ 요즘은‘함 사세요’하는 소리 듣기 힘들어진 것 같아요. 1990년 12월 ‘함진아비’가 신부 집 문 앞에서 버티고 있네요. 뒤에서 미는 신부 친 척들의 웃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장경환(서울 은평구 구산동)




▲ 1960년대 대구 시내에서 찍은 아버지의 뒷모습. 아버지도 졸업식 날은 계란세례 받고 밀가루 범벅이 되어서 거리를 활보하셨네요.“ 고등학교 땐 1등만 했다”던 아버지의 말, 믿어도 될까요? 정현교(경남 거제시 신현읍)




▲ 오빠는 운전사3, 나는 사모님3? 두 살 터울인 사촌오빠와‘새나라 택시’ 를 사이 좋게 타고 찍었어요. 1960년대에는 이런 모형 택시나 꽃마차를 들고 다니며 사진 찍어주는 사진사가 있었죠. 김동숙(서울 노원구 중계동)




▲ 엄마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장 나가 일할 때 만난 또래 친구들 이래요. 맨 왼쪽이 저희 엄마고요, 뒤에서 짓궂게 장난치는 분은 같은 동네 살던 동생이래요. 최예지(서울 도봉구 방학3동)




▲ 1969년 연애 중이던 부모님이 송추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바 이크는 현장에서 미인계(?)를 이용해 빌려 타고 찍으셨답니다. 40 년전 모습이지만 지금 봐도 멋쟁이시죠? 송윤태(서울 서초구 서초동)




▲ 제일 가운데서 신나게‘돌리고’계신 분이 저희 아빠세요. 저 옷은 아마도 교복인 듯한데, 정말 즐거워 보이네요. 아빠에게도‘전성 시대’가 있었나 봅니다. 김승연(서울 서초구 서초동)

김신영 기자
박효재 인턴기자·고려대 사회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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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상 2011-10-0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 사진은 교련복입니다. 1994년도에 교련 수업이 없어지면서 사라졌지만 한 동안 교련복 입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94년 졸업이라 기억이 나네요..유일하게 '수' 받던 교련수업 ㅋㅋㅋ

최원석 2011-10-2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마지막사진 님의 아버지께서 입고계신옷은 교련복이라는 옷입니다. 1990년도 초순까지는 남녀를 구분하지않고 고등학교 정규과목중에 교련이라고하는 군사교육시간이 일주일에 2시간간정도 배정이 되어있었지요. 교련시간에 군복처럼 입어야만했던 군사교육복장입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남학생들은 학교밖에서도 간편하게 많이들 입었지요.
 

어제 아침, 서울로 현지출근하다가 강변북로 양화대교부터 꽉 막혔다는 소식에 신수동 뒷길로 해서 마포로 돌았더니, 역시 공덕사거리도 꽉 막혀서 모처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그 시간 얼마전 용산로 일대가 완전차단된 상태에서 특공대 진압작전이 있었단다. 무려 여섯 명이 불에 타고 물에 젖은 싸늘한 시체로 돌변한 사실을 빠져나와서야 알았다. 차 막힌 것을 푸념하는 내 옹졸함이란...

다시 돌아오는 공안정국,  

이러한 결과를 예상치 못했던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도대체 이 정부는 국민들을 어떻게 보는건지 새삼 이를 앙다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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