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습니까. “아들 딸 구별 없이 낳아 모두 아들처럼 키울 겁니다.”(웃음)
초등학교 때 ‘홍당무’라는 어린이극을 보고 감동을 받아 연극 대본을 쓰기 시작한 소년은 이제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 대해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올 봄 극장가에는 ‘아들’ ‘눈부신 날에’ ‘날아라 허동구’ 등 아버지와 아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잇따라 개봉됐는데, 왜 매년 겹치기 현상이 반복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충무로의 미스터리예요. 영화의 기획기간도 다르고, 촬영기간도 다른데 이상하게 매년 반복됩니다. 제가 ‘간첩 리철진’을 만들었을 때는 ‘이중간첩’이 나왔고, 소방영화 ‘사이렌’과 ‘리베라메’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됐습니다. 참 이상하죠?”
점점 감독의 연령층이 낮아지는 충무로의 현실 때문에 고참 대열로 향하고 있는 장 감독은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한 김종학 감독의 권유로 영화감독이 됐다. 1995년 대학로 소극장에서 장씨의 연극을 본 김종학 감독이 배우와 스태프에게 저녁을 사주었고 그 자리에서 장씨에게 “영화 해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이후 김 감독의 연출부에 들어간 그는 열흘 동안 밤을 새워 ‘기막힌 사내들’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이를 읽어본 김 감독은 무조건적으로 장씨에게 감독권을 줬다. 연출부를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돼 감독 데뷔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막힌 사내들’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두 번째 연출작 ‘간첩 리철진’도 평단에선 칭찬을 받았지만 흥행은 실패에 가까웠다.
“마치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감독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수다와 독서를 원천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게 됐고 결국 감독으로 살아남았네요.”
장 감독은 1999년 만든 문화창작집단 ‘수다’를 모태로 2003년 3월 ‘필름있수다’라는 영화제작사를 설립했다. 그 동안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정재영, 신하균 등과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정재영, 신하균 등이 소위 ‘장진사단’이라고 불리는데, 왜 아버지 역을 차승원에게 맡겼습니까. “송광호, 최민식, 한석규 등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차승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보자마자 ‘좋다’는 말을 연발했습니다. 그는 ‘애들이 크니까 나도 이제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하고 싶다’면서 출연료를 반으로 낮추는 등 배역에 큰 애착을 보였습니다. 촬영할 때 차승원은 자신이 만족할 수 없으면 계속 한 번 더 찍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게 ‘선택하세요’라고 말하죠. 감독 입장에서는 너무 고마운 배우입니다.”
‘필름있수다’라는 영화제작사를 그대로 운영하면서 강우석 감독과 ‘K&J’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강우석 감독과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습니까. “1998년 부산영화제 때였습니다. 제 작품 ‘기막힌 사내들’을 본 강 감독님이 ‘한 번 만나자’며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이후 강 감독님이 기획한 ‘간첩 리철진’의 연출을 제가 맡았습니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등 제 영화 대부분을 강 감독님이 투자나 제작을 맡아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강 감독님을 ‘오야붕’(보스를 가리키는 은어)이라고 부르죠.”
당신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없거나 비중이 적은데. “강 감독님이나 저나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여자 관객들은 강 감독님 영화보다 제 영화를 좋아하죠.”(웃음)
강우석 감독은 최근 저와 인터뷰에서 올해 한국 영화의 옥석이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요즘 한국 영화가 위기에 처했다고도 하는데, 이 같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위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영화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상향조정되는 기회라고 봅니다. 영화로 오지 말아야 할 돈까지 들어왔던 그런 시대는 빨리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줄이 조금씩 말라 힘든 시기를 거치겠지만 결국 옥석은 가려질 것입니다.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제작진의 작품 업그레이드가 필요하겠죠.”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상업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상업용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반드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돈으로 상업영화를 만들어야지 예술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 대중의 눈이 너무 높아졌어요. 대중에게 좀더 재미있고 나은 상업영화를 보여주려면 끊임없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감독을 제외하고는 첫 영화가 유작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감독이 수백 명인데 말입니다.”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쓰지만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영화와 연극은 모두 시장에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도 그게 좋지만은 않아요. 대학 다닐 때는 철저하게 예술을 하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니까 시장의 평가에 의해서 내가 예술을 할 수 있나 없나가 결정됐습니다. 장래에는 정말로 시장과 상관없는 글을 제 마음대로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독특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흥행에서 꼭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상업영화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이 강하게 표출된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대한 타협만 한 거죠. 일단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관객이 만족할 것같아도 그렇게 못 찍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못하죠.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그 사이가 줄어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래전부터 ‘필름있수다’를 만들어서 운영해 왔는데 ‘웰컴 투 동막골’ 제작할 때는 직원들 월급을 못 줄 정도로 쪼들렸습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이 대박을 터뜨려 한번에 해결됐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영화 만들기’는 ‘카지노에서 잭팟 기다리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두세 편이 망하더라도 네 번째 영화가 흥하면 확 일어섭니다. 이게 바로 도박 아닙니까.”
‘웰컴 투 동막골’은 반미영화라는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반미영화라기보다 반전영화라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 같습니다. 동막골에 모인 미군, 북한군, 한국군이 친구가 되지 않습니까.”
열 살 어린 예비신부(서울여대 디자인대학원 졸업)와 결혼 준비는 잘 하고 있습니까. “신부 측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4년 전 대형서점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다가 작년 말부터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가 라식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 같아요.”(웃음)
앞으로 계획은. “군인영화, 팩션영화, 하이틴영화 등 4편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 감독은 인터뷰를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같은 건물에 있는 시사회장으로 들어갔다. 박수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다. 장 감독을 따라 들어가 객석 맨 앞 줄에 앉았다. 무대 위의 장 감독은 실물보다 크게 보였다. 역시 대중예술인은 관객의 박수와 사랑을 먹고 사나 보다. 팬들의 에너지를 받으니 그가 거인처럼 보였다. ▒
생년월일 1971년 2월 24일
경력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1994년 ‘허탕’으로 예장문학상 희곡부문 당선
1995년 ‘천호동 구사거리’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현재 ‘필름있수다’ 대표
수상 2000년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간첩 리철진), 2005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상(웰컴 투 동막골)
주요 작품 방송-SBS ‘전파왕국’ ‘좋은 친구들’, 영화-1995년 ‘개 같은 날의 오후’ 각색, 1998년 ‘기막힌 사내들’ 연출, 1999년 ‘간첩 리철진’ 연출, 2004년 ‘아는 여자’ 연출, 2005년 ‘박수칠 때 떠나라’ 연출, ‘웰컴 투 동막골’ 각본, 2006년 ‘거룩한 계보’ 연출, 2007년 ‘아들’ 연출
희곡 1994년 ‘허탕’, 1995년 ‘천호동 구사거리’ ‘서툰사람들’ ‘허탕-네 팔로 가는 사람들’ ‘들통-보편적 상상력에 관한 저항’, 1997년 ‘택시 드리벌’
희곡집 1996년 ‘덕배랑 달수랑’
연극 1998년 ‘매직타임’, 1999년 ‘허탕’, 1999년 ‘아름다운 사인’
악극 1995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서일호 기자 ihseo@chosun.com 나해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