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승자독식 사회서 밀려난 ‘절망의 대명사’
입력: 2007년 12월 03일 18:45:52
 
한국의 비정규직 861만명 가운데 29세 미만의 비정규직은 225만명. 전체 비정규직의 26%가 20대라는 의미이다. 당연히 20대 임금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많다. 통계청이 지난 8월 실시한 ‘경제활동인구 부가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임금노동자 367만명 중 비정규직은 53%인 192만9000명이다. 특히 20대 초반(20~24세)의 비정규직 비율은 무려 67%에 달했다. 10대 임금노동자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98%로 일찍 취업전선에 나온 10대의 경우 안정적인 일자리 구하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3일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주유소 ‘알바’를 용돈벌이용이 아닌 고정직업으로 삼는 20대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문석기자
20대 비정규직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에 따르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월평균 임금총액은 2006년 51.3%에서 2007년 50.1%로 격차가 더 벌어졌다. 또한 법정 초과근로 한도인 주 56시간을 초과하는 장시간 노동자 비중은 비정규직(21.0%)이 정규직(11.1%)보다 많고, 주 36시간 미만 단시간 노동도 비정규직(14.4%)이 정규직(0.1%)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청년층이 작업상에서 상대적 약자임을 고려할 때 20대 비정규직의 노동복지는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청년들은 정규직을 바라고 있지만 양질의 일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02년에서 2006년 동안 일자리가 많이 늘어난 직업은 청소원(24만3000명), 경비직(13만8000명), 학원강사(13만1000명), 웨이터(12만9000명) 같은 비정규직이었다.

88만원 세대들은 고용 없는 성장과 양극화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잃어가고 있다. 재학중에는 취업 공부로 날을 지새우고, 졸업 이후는 구인 시장을 헤맨다. 그런 노력 끝에 얻는 일자리는 ‘임시직’이나 ‘아르바이트(알바)’. 그것은 더 이상 여가시간을 활용하는 용돈벌기가 아니다.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로 전전하는 악순환의 시작이다. 알바는 본업이 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 ‘88만원 세대’들은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다. 특히 여성 ‘88만원 세대’에게는 성희롱·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한다. 인물들 프로필 그래픽 항목은 차례대로 (1)최종학력 (2)현재직업 (3)월수입 (4)지지후보 (5)독립여부 (6)이력


▲디자인 전공 대졸 여성 이수연씨


이수연씨(26·여)는 지난해 2월 졸업했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6개월 동안 직장을 구하다 학과 교수의 소개로 공공디자인업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갔다. 주 6일 일하고 60만원을 받았다. 회사측은 식비 10만원은 미리 떼고 50만원을 줬다.

오전 9시~오후 7시 근무였지만, 보통 10시까지 일했다. 회사가 제한 식비는 점심값이 아니라 저녁값이었다. 야간 근무를 강제하기 위한 편법이었다. 점심은 알아서 사먹어야 했다. 4대 보험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사장은 “그거 하려면 50만원에서 떼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불만은 있었지만 잘릴까봐 아무 얘기를 못했다”고 말했다.

사장은 지방 출장갈 때면 이씨를 데리고 갔다고 한다. 어느 출장 길에 사장은 여관에 방 하나를 잡아 놓았다. 이씨는 “황당했지만 잘리면 안된다는 생각에 같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치려 해 바로 도망쳐나와 집으로 왔다”고 말했다. 입사한 지 3개월쯤이었다. 이씨는 “주변에도 성희롱이나 성폭력 때문에 회사를 관둔 애들이 몇 명 있다. 소규모 업체일수록 꼼짝을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 첫 직장은 그렇게 날아갔다”고 말했다.

또다시 ‘백수’로 지내다 올 봄 한 액세서리 업체에 들어갔다. 월급은 75만원, 출근 시간은 있어도 퇴근 시간은 없었다. 밤 12시 퇴근을 밥 먹듯했다. 휴일이 없고 임금은 체불됐다. 이씨는 “이쪽 업계 사장들은 대부분 30~40대다. 사람을 어떻게 쓰고 버려야 하는지 아주 잘 안다”고 말했다. 초보에게 디자인의 기획·제작·납품까지 다 시키면서 허점을 찾아낸다고 한다. 월급을 올려주지 않기 위한 수법이라고 이씨는 설명했다.

이씨는 “쥐꼬리만한 월급에 액세서리 재료비를 나보고 사라고 해 한달에 50만원까지 쓴 적이 있다”며 “다시 잘려 경력을 쌓지 못할까봐 아무 말도 못했다”고 말했다. 디자인 업계는 ‘경력’이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월급이 두달 이상 체불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체납 월급과 대납 재료비 150만원은 아직도 못받고 있다.

이씨는 지금 커피숍에서 주 6일 하루 7시간가량 일하며 월 80만~90만원을 번다. “칼 퇴근에 일요일도 쉬고 일을 오래하면 시급도 오르고, 더 편하게 더 적게 일하며 더 많이 벌어요. 대학에서 4년 간 열심히 배운 것 써먹는 일보다 단순 노동이 더 보수가 좋은 거죠.” 그가 반문했다. “웃기지 않나요.”

▲주유원 아르바이트 고졸 이재진씨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이 주로 하는 ‘알바’는 노동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대표 직종이다.

이재진씨(19·가명)는 주유소를 전전하고 있다. 검정고시를 마쳤지만 대학 진학을 못했다. 지금은 서울의 한 주유소에서 일한다. 얼마 전 ‘해고’된 뒤 새로 구한 곳이다. 전 주유소에서 이유를 통보받지 못한 채 해고됐다. 이씨는 “한 두달가량 일했는데 사장이 어느날 갑자기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그랬다. 왜 그런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일하다가 차가 없을 때 중간중간 앉아 있었는데, 아마 사장이 보기엔 내가 잔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전했다. “사장이 멀리서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잘랐다. 나는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씨는 하루 7시간 일하고 60만~70만원을 받는다. 이씨는 “세차를 2대 정도 하면 힘들어서 5분 정도 쉬는데, 앉을 수는 없다”며 “사장님은 손님들이 보면 안 좋아한다며 탁 트인 공간에서는 절대 앉아 있지 말라고 그랬다”고 전했다.

‘노동기본권’은 없다. “근로계약서를 구경한 적도, 써 본 적도 없다”고 이씨는 말했다. 밥값과 차비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보건권’도 먼나라 이야기다. 주유소에서 일한 지 7개월. 일을 마친 뒤 친구들과 만날 때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들으면 ‘주유 총’에서 나오는 꺼림칙한 냄새가 떠오른다. 자영업자에게 고용된 ‘알바’들에게는 특히 4대 보험 가입은 언감생심이다.

이씨는 대신 혼유보험을 들었다. “경유와 휘발유를 혼동해 잘못 기름을 넣어서 수리비가 240만원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이전에 사장이 하라고 해 혼유보험을 든 상태였다”며 “보험사에서 돈을 내줬는데, 사장이 나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 30만원을 내라고 해서 월급에서 제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월급에서 까는 것’은 ‘알바’와 ‘비정규직’ ‘계약직’들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조건이다.

▲하청업 비정규직 고졸 유재영씨


공장에서 일하는 ‘88만원 세대’들은 1980년대보다 더 힘든 노동의 조건에 처해 있다. 유재영씨(26·가명)는 인천 부평의 한 대기업 공장 노상에서 천막농성을 벌인 지 석달째다. 지난 29일 만난 유씨는 까칠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유씨는 서울의 한 공고를 졸업하고 방직 공장을 다녔다. “방직 공장에서도 고졸 학력은 학력도 아니었어요.” 유씨는 한 기술대학에 진학했지만 한두 학기를 다니고 휴학했다. 에어컨 설치 일을 보조하다 전차 정비병으로 입대했다. 2004년 제대 뒤 지엠대우의 하청업체에 입사한다. 공장에 자재를 보급하는 일이었다. 기본급 60만원. 4대 보험은 없었다. 연장 근무를 하면 80만~90만원을 받았다.

2005년 2월, 이 업체는 다른 하청업체에 인수된다. 급여는 조금 올랐지만 정규직 2명이 할 일을 해내야만 했다. “생산량은 늘어났는데 오히려 인원은 빠졌다. 인건비를 낮추려는 수작이었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에 대한 불신이 더 고통스러웠다. “병원에 간다고 하면 소견서를 떼 오라고 그러고, 상가에 간다고 하면 부고장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비정규직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요.”

지난 9월, 유씨는 사내에 결성된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해 투쟁에 들어갔다. 원청회사가 하청업체의 외주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씨는 “1차 하청에서 2차 하청으로 가면 고용 보장은 더 어려워진다”며 “회사에 요구했던 것은 고용 보장을 해달라는 것뿐이다. 그런데 원청 노무팀 구사대들이 나와 조합원들을 때리면서 폭력적으로 탄압했다”고 말했다.

원청회사는 업체 평가를 이유로 유씨가 소속된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내년 4월이 결혼인데, 해고를 당하고 말았어요. 해고된 걸 집에서는 아직 모릅니다.” 그는 “여자 친구는 결혼하기 전에 상황이 안 풀리면 그만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불안한 계약직 스트레스 구영희씨


취업 전선 위에 불안하게, 위태롭게 서 있는 ‘88만원 세대’들은 지독한 스트레스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구영희씨(26·여)는 증시 사이트 회사에서 프로젝트 업무를 돕고 있다. 단기 계약직이다.

금융업계에서 PB 일을 하고 싶었다. 2005년 겨울부터 취업 스터디를 계속 해오고 있다. “열심히만 하면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에 들어갈 줄 알았어요.” 취업 스트레스가 왔다. 밤만 되면 두통에 온몸에 열이나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지금 다니는 증시 사이트 회사에는 친척 소개로 들어갔다. 구씨는 “아무래도 불안한 미래가 가장 힘들어요. 지금 회사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요. 나같은 계약직은 필요한 일만 쓰고 버릴 거예요.” 그는 “그래서 구직 활동에 매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소망을 물었다. 구씨는 “중견 이상의 기업체나 대기업 같은 곳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서울 중위권 대학을 나온 친구 중에 학점, 토익 점수도 높고 자격증도 많지만 최종 면접에서 항상 떨어진다. 학교서열, 여성 때문인 것 같다”며 “그런 구조적인 문제들 때문에 노력한다고 해서 내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회 구조를 순응해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구씨는 “비정규직을 다 없앨 수는 없다고 본다”면서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으로 들어가 경험을 쌓으며 정규직을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구씨는 또 “노동 시장에도 유연성이 필요하고, 그래야 20대 태반이 백수인 이태백 사회에서 우리 20대에게도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배틀로열(Battle Royale)

무인도에 고립된 중학생들이 벌이는 생존 게임을 다룬 일본 영화다. 살기 위해 같은 반 친구를 죽인다는 무한 살육의 비극을 그렸다. 구직자들이 무한 경쟁의 취업 시장을 이 말에 빗대 쓰고 있다.

▶88만원 세대

한국의 20대 중 5%만이 대기업·공기업·5급 공무원 등 안정적인 직장을 가질 수 있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으로 붙은 세대 명칭이다. ‘88만원’은 비정규직 평균 임금인 119만원에 20대가 받는 평균 급여 비율 74%를 곱하면 세전 소득이 88만원이 된다는 데서 얻은 상징적 수치다. 우석훈·박권일 공저 ‘88만원 세대’가 원전이다.

▶스펙

구직자들의 학력과 학점, 토익 점수, 자격증, 연수 경험 등 취업 조건을 말한다. 명세서(specification)에서 따온 말이다. 과도한 취업자격을 요구하는 시대에 통용되는 젊은 세대의 언어이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김종목 강병한 김보미 오동근 유정인 유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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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장진 감독, “좋아하는 수다 떨듯 영화 만들죠”
“뇌경색으로 아이가 돼버린 아버지 보면서 가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돼
한국서 영화 제작은 잭팟 기다리는 것과 비슷 위기가 한국 영화 옥석 가려낼 것”
일단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관객이 만족할 것같아도 그렇게 못 찍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못하죠.

장진(36) 감독이 변했다. 영화 ‘기막힌 사내들’(1998),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 ‘아는 여자’(2004), ‘박수칠 때 떠나라’(2005), ‘거룩한 계보’(2006) 등으로 항상 집 밖에서만 맴돌던 장 감독이 영화 ‘아들’(5월 1일 개봉)을 통해 가정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특별외박을 나온 무기수(차승원 분)가 고등학생 아들(류덕환 분)과 함께 보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았다. 15년 만에 다시 만난 것으로 설정된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거리를 달리며 사우나도 한다. 영화 후반부에 놀라운 반전(反轉)이 기다리고는 있지만 부자지간의 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이처럼 장 감독이 가족의 이야기로 돌아오게 된 데는 아버지의 투병과 자신의 결혼(5월 23일)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6년 전부터 뇌경색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이번 작품에 카메오(깜짝출연)로 등장했다.


지난 4월 24일 저녁 서울 강남 시티극장 6층에 있는 와인바 ‘바인 시티’에서 장 감독을 만났다. 1년 반 만에 다시 만난 것이지만 서로 낯설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안부부터 물었다. 결혼을 앞둔 장 감독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예전에는 평생 혼자 살면서 글 쓰고 영화만 만들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신혼을 준비하면서 ‘달콤한 피로’에 젖어 있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 영화 '아들'

영화 ‘아들’을 통해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不在)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혹은 아들이 항상 곁에 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소홀해질 수 있고 대화가 단절되기까지 합니다. 아버지 혹은 아들을 곁에 두지 못한 사람에게는 간절히 만나고 싶은 상대인데 말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늘 부를 수 있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죽을 때까지 숨막히도록 불러보고 싶은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극 중 아버지 역을 맡은 차승원은 하루 동안만 존재하려고 자신의 집에 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가정에는 이미 없는 존재입니다. 이 같은 상황을 통해 우리가 그냥 무심코 흘려 보내는 가족과의 하루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영화 ‘아들’에 말 못하는 무기수로 당신의 아버지도 출연했는데. “아버지는 1992년부터 간질환으로 5년 동안 고생하셨고, 지금은 뇌경색으로 투병 중이십니다. 언어구사는 잘 안 되지만 사람 얼굴은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촬영하면서 제가 손뼉을 두드리며 ‘자, 아빠, 나 봐, 여기’를 반복해서 외쳤죠. 그래도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보니 아버지가 연기를 제일 잘한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도 몇 장 없어서 늘 아쉬웠고, 제 영화에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담고 싶었기에 이번에 출연시켜 드렸습니다.”


장 감독에게 아버지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는 매우 가부장적인 분이었습니다. 남성의 권위로서 가정을 통치하는 전형적인 한국 가장(家長)이었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돼버렸습니다. 제게 가족이라는 애틋한 단어의 의미와 인생 자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셨습니다.”

건강했을 때 장 감독의 아버지는 택시운전사였다.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작인 ‘천호동 구사거리’, 연극 ‘택시 드리벌’ 등 장 감독의 작품에 택시운전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남 중 막내인 장 감독은 현재 부모와 한 집에 살고 있다.


아버지와의 추억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제가 포진(疱疹)을 앓게 됐는데, 그거 앓으면 옷도 못 입고 잠도 잘 못 자거든요. 너무 아파서 힘들어하니까 아버지는 당신이 알고 있는 민간요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 줄 아세요? 생쌀을 씹어서 제 환부에 붙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효과가 없었죠. 하지만 제가 나을 거라고 기대하며 생쌀을 씹어 붙여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장 감독의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도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어머니는 너무 평범하세요. 평생 아버지와 저희들 뒷바라지만 하셨습니다. 문학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셔서 책도 많이 읽으시고 글도 많이 쓰십니다.”
장 감독의 풍부한 감수성과 상상력은 어머니를 닮은 듯하다. ‘충무로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장 감독은 항상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잘 조화시킨다. 영화 ‘아들’에서도 처음에는 리얼리즘을 강조하다가 점차 장진 특유의 유머가 구사되고, 판타지(사우나를 함께 하던 부자가 탕 속으로 잠수를 하며 각종 수중생물을 만난다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된 기러기들이 말을 하며 옥신각신하는 장면)가 적절하게 배합된다. 


“저는 기질적으로 관습적인 양식을 따라하기 싫어합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으면 하는 스타일이죠. 남들이 만든 영화도 잘 안 보는 편입니다. 어느 해에는 세 편밖에 안 본 적도 있어요. 대신 책을 많이 읽고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편입니다.”
장 감독은 원래 왼손잡이다. 담배를 물거나 컵을 손에 쥘 때도 왼손을 사용했다. 성장하면서 여러 번 오른손잡이가 되기를 강요 당했을 테지만 장 감독은 결국 양손잡이가 됐다.

아버지가 된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습니까. “아들 딸 구별 없이 낳아 모두 아들처럼 키울 겁니다.”(웃음)
초등학교 때 ‘홍당무’라는 어린이극을 보고 감동을 받아 연극 대본을 쓰기 시작한 소년은 이제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 대해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올 봄 극장가에는 ‘아들’ ‘눈부신 날에’ ‘날아라 허동구’ 등 아버지와 아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잇따라 개봉됐는데, 왜 매년 겹치기 현상이 반복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충무로의 미스터리예요. 영화의 기획기간도 다르고, 촬영기간도 다른데 이상하게 매년 반복됩니다. 제가 ‘간첩 리철진’을 만들었을 때는 ‘이중간첩’이 나왔고, 소방영화 ‘사이렌’과 ‘리베라메’도 비슷한 시기에 개봉됐습니다. 참 이상하죠?”

점점 감독의 연령층이 낮아지는 충무로의 현실 때문에 고참 대열로 향하고 있는 장 감독은 드라마 ‘모래시계’로 유명한 김종학 감독의 권유로 영화감독이 됐다. 1995년 대학로 소극장에서 장씨의 연극을 본 김종학 감독이 배우와 스태프에게 저녁을 사주었고 그 자리에서 장씨에게 “영화 해볼 생각 없냐?”고 물었다. 이후 김 감독의 연출부에 들어간 그는 열흘 동안 밤을 새워 ‘기막힌 사내들’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이를 읽어본 김 감독은 무조건적으로 장씨에게 감독권을 줬다. 연출부를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돼 감독 데뷔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막힌 사내들’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두 번째 연출작 ‘간첩 리철진’도 평단에선 칭찬을 받았지만 흥행은 실패에 가까웠다.


“마치 난도질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감독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수다와 독서를 원천으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 수 있게 됐고 결국 감독으로 살아남았네요.”
장 감독은 1999년 만든 문화창작집단 ‘수다’를 모태로 2003년 3월 ‘필름있수다’라는 영화제작사를 설립했다. 그 동안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정재영, 신하균 등과는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정재영, 신하균 등이 소위 ‘장진사단’이라고 불리는데, 왜 아버지 역을 차승원에게 맡겼습니까. “송광호, 최민식, 한석규 등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차승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보자마자 ‘좋다’는 말을 연발했습니다. 그는 ‘애들이 크니까 나도 이제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영화를 하고 싶다’면서 출연료를 반으로 낮추는 등 배역에 큰 애착을 보였습니다. 촬영할 때 차승원은 자신이 만족할 수 없으면 계속 한 번 더 찍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게 ‘선택하세요’라고 말하죠. 감독 입장에서는 너무 고마운 배우입니다.”


‘필름있수다’라는 영화제작사를 그대로 운영하면서 강우석 감독과 ‘K&J’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강우석 감독과 인연은 어떻게 맺어졌습니까. “1998년 부산영화제 때였습니다. 제 작품 ‘기막힌 사내들’을 본 강 감독님이 ‘한 번 만나자’며 연락을 해오셨습니다. 이후 강 감독님이 기획한 ‘간첩 리철진’의 연출을 제가 맡았습니다.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등 제 영화 대부분을 강 감독님이 투자나 제작을 맡아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강 감독님을 ‘오야붕’(보스를 가리키는 은어)이라고 부르죠.”

당신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 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없거나 비중이 적은데. “강 감독님이나 저나 여자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여자 관객들은 강 감독님 영화보다 제 영화를 좋아하죠.”(웃음)


강우석 감독은 최근 저와 인터뷰에서 올해 한국 영화의 옥석이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요즘 한국 영화가 위기에 처했다고도 하는데, 이 같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위기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영화의 퀄리티와 완성도가 상향조정되는 기회라고 봅니다. 영화로 오지 말아야 할 돈까지 들어왔던 그런 시대는 빨리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줄이 조금씩 말라 힘든 시기를 거치겠지만 결국 옥석은 가려질 것입니다.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제작진의 작품 업그레이드가 필요하겠죠.”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충무로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상업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감독이나 제작자가 상업용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면 반드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돈으로 상업영화를 만들어야지 예술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요즘 대중의 눈이 너무 높아졌어요. 대중에게 좀더 재미있고 나은 상업영화를 보여주려면 끊임없이 공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몇몇 감독을 제외하고는 첫 영화가 유작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의 감독이 수백 명인데 말입니다.”


직업란에 영화감독이라고 쓰지만 궁극적으로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영화와 연극은 모두 시장에서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도 그게 좋지만은 않아요. 대학 다닐 때는 철저하게 예술을 하고 싶었는데,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니까 시장의 평가에 의해서 내가 예술을 할 수 있나 없나가 결정됐습니다. 장래에는 정말로 시장과 상관없는 글을 제 마음대로 쓰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독특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흥행에서 꼭 성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상업영화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이 강하게 표출된 영화를 만들었는데. “최대한 타협만 한 거죠. 일단 저한테 재미가 없으면 관객이 만족할 것같아도 그렇게 못 찍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못하죠. 단지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그 사이가 줄어들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는. “지나고 나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래전부터 ‘필름있수다’를 만들어서 운영해 왔는데 ‘웰컴 투 동막골’ 제작할 때는 직원들 월급을 못 줄 정도로 쪼들렸습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웰컴 투 동막골’이 대박을 터뜨려 한번에 해결됐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영화 만들기’는 ‘카지노에서 잭팟 기다리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두세 편이 망하더라도 네 번째 영화가 흥하면 확 일어섭니다. 이게 바로 도박 아닙니까.” 


‘웰컴 투 동막골’은 반미영화라는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반미영화라기보다 반전영화라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 같습니다. 동막골에 모인 미군, 북한군, 한국군이 친구가 되지 않습니까.”


열 살 어린 예비신부(서울여대 디자인대학원 졸업)와 결혼 준비는 잘 하고 있습니까. “신부 측에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4년 전 대형서점에 갔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다가 작년 말부터 정식으로 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가 라식수술을 하고 나서부터 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 같아요.”(웃음)


앞으로 계획은.  “군인영화, 팩션영화, 하이틴영화 등 4편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 감독은 인터뷰를 마치고 ‘관객과의 대화’를 나누기 위해 같은 건물에 있는 시사회장으로 들어갔다. 박수와 함께 함성이 쏟아졌다. 장 감독을 따라 들어가 객석 맨 앞 줄에 앉았다. 무대 위의 장 감독은 실물보다 크게 보였다. 역시 대중예술인은 관객의 박수와 사랑을 먹고 사나 보다. 팬들의 에너지를 받으니 그가 거인처럼 보였다. ▒



생년월일  1971년 2월 24일
경력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1994년 ‘허탕’으로 예장문학상 희곡부문 당선
 1995년 ‘천호동 구사거리’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
 현재 ‘필름있수다’ 대표
수상  2000년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시나리오상(간첩 리철진), 2005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각본상(웰컴 투 동막골)
주요 작품  방송-SBS ‘전파왕국’ ‘좋은 친구들’, 영화-1995년 ‘개 같은 날의 오후’ 각색, 1998년 ‘기막힌 사내들’ 연출, 1999년 ‘간첩 리철진’ 연출, 2004년 ‘아는 여자’ 연출, 2005년 ‘박수칠 때 떠나라’ 연출, ‘웰컴 투 동막골’ 각본, 2006년 ‘거룩한 계보’ 연출, 2007년 ‘아들’ 연출
희곡  1994년 ‘허탕’, 1995년 ‘천호동 구사거리’ ‘서툰사람들’ ‘허탕-네 팔로 가는 사람들’ ‘들통-보편적 상상력에 관한 저항’, 1997년 ‘택시 드리벌’
희곡집  1996년 ‘덕배랑 달수랑’
연극  1998년 ‘매직타임’, 1999년 ‘허탕’, 1999년 ‘아름다운 사인’
악극  1995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서일호 기자 ihseo@chosun.com 나해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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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비극적 혁명가의 슬픈 연인
소설가 홍석중과 장윤현 감독이 해석한 그녀는...
텍스트만보기   홍성식(poet6) 기자   
▲ 영화 <황진이>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먼저 1980년대 민중주의자들 사이에서 떠돌던 농담 같은 이야기 한 토막. <춘향전>의 결말에 관한 것이다.

"이 도령이 과거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올라 옛 연인 춘향이를 구한다는 설정은 부르주아들의 환상유포에 불과해. 진정 핍진성 있는 대중소설이 되려면 변학도의 학정에 시달려온 기층민중이 낫과 곡괭이를 들어 관아를 깨부수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는 걸로 이야기가 결말나야해. 물론, 이 도령은 이 민중봉기의 중심에 서야할 테고."

이 드라마틱하고도 흥미로운 전복적 상상력을 '황진이 이야기'에 대입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004년 남한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가 주관하는 만해문학상을 북한 작가가 수상하는 보기 드문 일이 발생했다. 수상자가 월북한 작가 벽초의 손자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그해 만해문학상은 이런저런 화제를 낳았다. 수상작은 <황진이>. 남한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소재요, 인물이다.

바로 그 소설이 <접속>과 <텔 미 썸딩>의 감독 장윤현에 의해 영사막 위로 옮겨졌다. 주연배우는 유지태와 송혜교. 이전 영화들 속에서 묘사된 교태와 재기 넘치는 매력적인 기생 황진이가 아닌 혁명가의 연인으로 재탄생한 황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북한 작가와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고 제작된 첫 남한 영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도 재미있다.

북한 작가와 정식 저작권 계약을 맺고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북한과의 교류를 위해 설립된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이사장 국회의원 임종석). 재단의 신동호 이사는 보다 대중적인 남북교류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 영화를 생각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 <황진이>. '저 작품을 남한에서 영화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지만, 영화 제작이란 적어도 수십억원의 자본이 필요한 일. 제작자를 찾는 일이 급했다.
그때 신 이사가 떠올린 사람이 1980년대 학생운동 동료였던 씨즈엔터테인먼트(<마리 이야기> 제작사) 조성원 대표. 둘은 수 차례 북한을 오가며 홍석중을 직접 만났고, <황진이>의 판권을 10만 달러(9500만원)에 사게된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본 홍석중은 만족감을 표시했고, "상업영화이니 만치 약간의 러브신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설명에도 "그 정도는 나도 이해할 수 있다"며 동의를 표했다고 한다.
곧 열릴 금강산에서의 시사회에 그가 참석해 영화화된 자신의 소설을 접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 의적들의 우두머리 '놈이'로 분한 유지태.
ⓒ 시네마서비스
교태 넘치는 기생이 아닌, 혁명가의 연인 황진이

여하튼 만만찮은 우여곡절 끝에 뚜껑은 열렸다. 홍석중 원작·장윤현 연출의 <황진이> 기자시사회가 23일 열린 것.

사실 우리에게 '황진이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기구한 사연에서부터 위선적 선비 벽계수를 희롱한 일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바탕으로 '이선기후론(理先氣後論)'의 퇴계와 학문적 자웅을 겨루던 화담 서경덕과 주고받은 고담준론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식상하지 않게 만드는 건 새로운 변주다. 하여, 장윤현 선택한 변주법은 앞서 언급한 민중주의적 방식. 교태 넘치는 웃음과 기가 막힌 거문고 연주, 거기에 더해진 타고난 아름다움으로 사내들을 홀리는 황진이가 아닌 혁명가의 연인 황진이를 탄생시킨 것이다.

새로운 변주법과 함께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황진이 역을 맡은 송혜교와 불합리한 반상(班常)의 질서를 거부한 의적들의 우두머리 '놈이'로 분한 유지태의 연기다.

연인에 대한 개인적 사랑의 감정에서부터 궁핍의 삶을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민초들에 대한 연민까지를 눈빛으로 보여주긴 쉽지 않은 일. 하지만, 두 사람은 이 난제를 피해가지 않고 어렵잖게 소화해낸다. 주연과 함께 호흡한 조연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호연은 영화의 사실감과 감동지수를 높인다.

영화가 절정을 향해 내달릴 무렵. 놈이가 황진이를 향해 토해내는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난 사람들과 함께 섬으로 갈 겁니다. 양반과 상놈이 없고, 착취도 없는 곳. 모든 사람이 서
로를 아끼며 평등하게 사는 섬으로 말입니다."

영화의 핵심메시지가 담긴 이 대사에서 만적 혹은, 임꺽정과 장길산의 그림자를 본 것은 비단 기자 만이었을까?

평생을 한 여자만 사랑해온 남자. 그 남자 외에 다른 사내에겐 몸을 줬을 뿐, 마음을 준 적이 없는 여자. 세상이 강제한 규범과 허위의 틀 탓에 단 한번도 서로에게 품은 애틋한 심사
를 고백하지 못했던 놈이와 황진이는 '섬'으로 갈 수 있었을까? 거기서 평등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었을까?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영화관에서 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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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T가 자동차를 만났을 때 운전자는 웃는다 ^^
  • 130개 넘는 음악·정보채널의 ‘위성라디오’ 벤츠에 장착
    운전자와 대화하는 광고판엔 무선인식 전자태그 기술 적용
  • 김종호 기자 tellme@chosun.com
    입력 : 2007.05.03 22:29
    • 자동차와 전자·정보통신 기술의 결합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센서와 컴퓨터를 이용한 성능향상뿐만 아니라 위성방송 수신, 운전자와 대화하는 광고판, 졸음운전 방지 등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메르세데스 벤츠는 내년까지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종의 90%에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를 장착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는 미국의 양대 위성 라디오 방송 중 하나로, 130개가 넘는 채널을 통해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다.

      광고가 없는 음악 채널 69개, 스포츠·뉴스·토크쇼·오락·교통·날씨 등 생활정보 채널 65개를 운영 중이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미식축구와 자동차 경주(NASCAR), 프로농구(NBA) 등 경기도 실시간 중계한다.

      벤츠 미국법인은 연말까지 미국에서 판매하는 벤츠 차량의 80%에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를 장착할 예정이다. 내년에는 이 비율을 9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를 장착하는 차종도 확대, S클래스와 CLS클래스에 기본 품목으로 장착할 계획이다. 현재 벤츠 미국법인은 벤츠 SL클래스, CL클래스, AMG 등에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를 기본 품목으로 장착, 판매하고 있다.

    • ▲BMW 미니가 미국에서 시험 운영하고 있는‘운전자와 대화하는 광고판’. 미니를 탄 운전자가 광고판 근처에 접근하면 인사말(사진 윗부분)이 나온다. /BMW 제공

    • 벤츠 미국법인이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 장착을 확대키로 한 것은 운전자들의 요구 때문. 위성 라디오는 CD 수준의 음질을 제공한다. 미국 전역이 단일 주파수를 사용하기 때문에 지역을 이동해도 방송국 주파수를 다시 맞출 필요가 없다. 벤츠 관계자는 “미국은 며칠씩 차를 타고 장거리 이동을 하는 운전자들이 많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깨끗한 음질로 들을 수 있는 위성 라디오가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 요금은 월 12달러95센트(약 1만2000원)이다. 개인적으로 위성 라디오를 들으려면 별도 수신기가 있어야 한다.

      위성 라디오가 수요가 늘어나면서 벤츠·BMW·아우디·폭스바겐·포드·크라이슬러·도요타 등 대부분 자동차 업체도 차량에 위성 라디오를 장착, 판매하고 있다. 기아차는 내년에 판매하는 2009년형 모델이 시리우스 위성라디오를 장착할 계획이다. 현대차는 작년부터 미국에서 출시하는 차종에 ‘XM 위성 라디오’를 장착하고 있다. XM 위성 라디오는 시리우스와 별도의 미국 위성 라디오 방송이다. 두 회사는 올 2월 합병계획을 발표하고 절차를 진행 중이다.

      BMW가 생산하는 ‘미니(MINI)’는 요즘 미국에서 ‘운전자와 대화하는 광고판’을 시험 운영 중이다. 이 광고판이 설치된 지역으로 미니 운전자가 차를 몰고 가면 “안녕 수전, 생일 축하해요” “안녕 마이크, 오늘은 오픈카를 타기에 참 좋은 날이죠”와 같은 인사말이 나온다. 이 광고판은 미국 시카고·마이애미·뉴욕·샌프란시스코 등 4개 도시에 설치됐다.

    • ▲볼보의‘시티 세이프티’장치. 교통량이 많은 도심에서 저속으로 차를 운전할 때 앞차와 충돌할 것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작동해 차를 멈춘다. /볼보 제공

    • 이 서비스를 받으려면 ‘미니’ 운전자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접속해 본인과 차량의 이름이나 별명 등 간단한 신상정보를 입력하고,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 놓으면 된다. 이 정보를 토대로 미니 미국법인은 지역과 시간에 맞춰 각각의 운전자에게 어울리는 문장을 광고판에 올려준다.

      현재까지 ‘대화하는 광고판’에 등록한 미니 운전자 수가 4000명이 넘는다. 미니 미국법인은 “미니 소비자의 상당수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이어서 ‘대화하는 광고판’ 아이디어를 냈다”면서, “1년간 시험 운영한 다음, 미니 운전자들에게 개인별로 보다 많은 ‘맞춤형 정보’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운전자와 대화하는 광고판’에는 주파수를 이용한 무선인식 전자태그(RFID) 기술이 적용됐다. 전자태그 칩은 미니 자동차의 열쇠에 장착돼 있다. 차량이 광고판의 150m 거리까지 접근하거나, 운전자가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광고판 근처를 걸어가면 인사말이 나온다.

    •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의 모습. 메르세데스 벤츠는 내년까지 미국에서 판매하는 차량의 90%에 이 라디오를 장착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리우스 위성라디오 제공

    • 운전자의 안전과 관련된 정보통신 기술도 잇따라 개발, 자동차에 장착되고 있다. 폭스바겐의 ‘졸음운전 방지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이 시스템은 운전자가 눈꺼풀을 움직이는 빈도와 속도를 계속 체크해 운전자가 졸고 있는지 파악한다.

      운전자가 맑은 정신으로 운전을 할 때에는 눈꺼풀을 움직이는 회수가 적고 움직이는 속도도 빠르다. 반면 졸음이 오면 눈꺼풀을 자주 움직이고, 속도도 느려진다. 자동차 내부의 카메라는 운전자의 눈꺼풀을 계속 체크해 졸음운전을 할 경우 경고와 함께 잠시 쉴 것을 제안하고 내비게이션을 통해 가장 가까운 휴게소의 위치를 알려준다. 폭스바겐은 “자동차 사망사고의 25%가 운전자의 졸음 운전으로 발생한다는 통계에 따라 졸음운전 방지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폭스바겐의 ‘차로 이탈 경고 시스템’은 차량에 장착된 카메라로 도로 위에서의 차량 위치를 감지, 차량이 원래 가고자 했던 차로에서 심하게 이탈할 경우 경고음을 통해 운전자에게 알려준다. 도로에서 차량 위치를 감지하기 위해 센서 카메라가 도로 경계선의 상태, 차체와 좌우 차선과의 거리, 차로의 넓이, 차체의 속도 등을 자동으로 조사한다.

      폭스바겐의 ‘자동 비상 브레이크 시스템’는 안전장치의 완결판이다. 이 시스템은 레이저 센서를 이용, 전방 120m, 16도 이내의 물체 정보를 확인한다. 이어 운전자의 힘으로 충돌을 막을 수 없을 때 자동 브레이크 시스템이 작동, 차를 멈춘다.

      볼보는 최근 첨단 충돌 방지장치 ‘시티 세이프티 (City Safety)’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교통량이 많은 도심에서 저속으로 차를 운전할 때 앞차와 충돌할 것이 감지되면 자동으로 차량속도를 줄이거나, 브레이크를 작동해 차를 멈추는 장치다.

      볼보는 자동차 충돌 사고의 75% 이상이 시속 30㎞이하 속도에서 발생한다는 교통사고 통계에 따라 ‘시티 세이프티’ 장치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장치는 차량 앞 유리 상단에 달린 광학 레이더를 통해 전방 6m 이내의 차량을 1초에 50번 체크해 브레이크를 작동시킨다. 극심한 도시 교통정체 및 느리게 움직이는 교통 상황에서 흔히 일어나는 저속 충돌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이다.

      볼보는 이 장치를 향후 2년 안에 생산차량에 장착할 계획이다. 볼보 안전센터의 잉그리드 스콕스모 이사는 “시티 세이프티가 작동하면 상대방 차량이 내 차에 충돌하는 경우에도 그 강도를 최소화해 탑승자 부상과 차량 파손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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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심 속 대형서점, 잔잔한 문화가 숨 쉬는 곳
  • 컬쳐&산보
  • 조선일보
    입력 : 2007.05.09 17:25
    •  

    • “형, 어디 계세요?”

      “교보로 가는 중이에요. 간만에 책도 둘러보고, 수업에 쓸 DVD도 구해야 해서…”

      “저녁에 별 다른 일 없으시죠? 그럼 조금 있다가 거기서 봬요.”

      출판평론가 표정훈과의 통화를 마치고 ‘거기’로 간다. 강의에 필요한 ‘축제’(임권택 감독) DVD를 사고 인문사회 코너에서 책 구경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될 것이다. 사람 기다리는 일처럼 지루한 일도 없는데, 서점에서는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서울의 중심가에는 3개의 대형서점이 모여 있다. 이들은 모두 지하철역과 연계되어 있는데, 교보문고는 광화문역과 직접 통하고, 영풍문고와 반디앤루니스는 종각역과 이어져 있다. 교보문고의 특징은 책도 많고 사람도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책을 살 수 있는 도서관’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영풍문고는 언제나 시원하고 쾌적하다. 서가들이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책을 고르는 여유와 즐거움을 한껏 맛볼 수 있다. 2005년 밀레니엄 센터 지하에 자리를 잡은 반디앤루니스는 의자가 많이 배치되어 있고 책과 관련된 이벤트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자신의 기분이나 취향에 따라 서점의 분위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 또한 쏠쏠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서울의 중심가에 서점들이 있었던 것일까. 조선시대 이후로 종로가 상업의 중심지였으니 아마도 그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1880년부터 1년 9개월간 한국에 프랑스 대사관의 서기관으로 머물렀던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그의 저서 ‘한국서지’에서 종로 부근에 책 전문상점들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상품 가치가 있는 책들은 망건이나 담배와 함께 파는 법이 없었으며 “책점들은 모두 도심지 쪽으로 종각에서 출발하여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꾸부정하게 뻗어 있는 큰 길에 모여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월탄 박종화의 회고에 의하면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지송욱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구식 책사(冊肆)가 있었다고 한다. 책사는 출판사·인쇄소·도소매서점의 기능이 분화되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전면을 유리창으로 바꾸고 신구서림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이후에 신구서림에서 나온 책에 주소지가 봉래동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장사가 잘 돼서 독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1907년에 문을 열어 2002년에 폐업을 한 종로서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서적 중심가로서 종로의 역사성을 증언하는 상징이었을 것이고, 지상 5층의 건물에 분산 배치된 대형서점의 또다른 공간성을 맛볼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대형서점이 있는 종로의 역사성과 공간성을 생각하면 서재(書齋)와 카타콤(catacomb)이라는 두 단어가 떠오른다. 먼저, 서점이 있는 종로와 광화문거리는 ‘서울의 서재’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랑이 많은 삼청동, 전통공예품이 있는 인사동, 각종 문화예술행사가 벌어지는 세종문화회관을 함께 떠올려 보면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그림이 있고 실내장식이 있고 텔레비전 또는 축음기가 놓여있는 거실이 저절로 연상되지 않는가. 대형서점이 그 자체로 복합적인 문화공간을 지향하지만, 서점이 있는 주변공간들 역시 문화적인 다양성을 구축하고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순교자들의 지하묘지이면서 비밀스런 예배장소였던 카타콤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대형서점들이 지하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정한 종교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지하의 대형서점을 들어설 때마다 그 어떤 종교성을 느낀다. 지성, 교양, 취향이 각각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신(神)을 찾아서 예배를 올리고 지식의 순례를 떠나는 곳.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지식의 민주적인 소통을 통해서 보다 인간적이며 합리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 빠듯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마음껏 책을 사지는 못하지만 서가에 등을 기대고 눈을 반짝이며 마치 해면처럼 지식을 흡수했던 사람들 등등. 서점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도 대형서점에는 처음으로 글자를 익힌 어린이부터 돋보기 너머로 책을 보는 어르신들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전 세대가 모여서 문화를 만들어 간다. 엄마와 함께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 수험서를 고르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 잠시 교과서에서 벗어나 낭만적인 책읽기를 기대하는 학생들, 경영과 처세의 비전을 얻기 위해 책을 고르는 사람들 등등. 서가 뒤편에서는 상품으로서의 책을 다루기 위해서 쉴새없이 주판알이 튕겨지고 있겠지만, 그 문화적 향기에는 결코 자본의 논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는 것 같다. 책은 상품이고, 서점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운영된다. 하지만 책과 서점에는 상품과 자본의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aura·특유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각자의 ‘나’를 만나는 곳, 그리고 타인(저자)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곳. 시장이면서 밀실이고 또한 광장이기도 한 복합공간이 그곳에 있다.

      차가 막히나 보다. 표정훈 씨가 오면 광교 부근의 구 조흥은행 본점으로 가봐야겠다. 그 부근에는 1897년 고유상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 회동서관(匯東書館)이 있었던 곳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이 있다. 거기를 다녀오면 적당히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르지 않을까. 어떤 안주가 나오든 맥주가 맛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김동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

      사진=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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