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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파과학사 손영일 사장 |
전문출판은 한눈팔지 않고 계속 해나가기가 어렵다. 출판을 하다보면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없지만 상업적으로든, 내용적으로든 욕심이 나는 원고를 접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때 자신의 출판사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런 원고를 뿌리치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과학서적을 전문으로 펴내는 ‘전파과학사’는 1956년 7월 23일 세워져 올해로 50년째를 맞은 장수 출판사다. “올 7월에 기념행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형편이 좋지 않아서 그만뒀습니다.” 지난 1989년부터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손영일(孫永一·60) 사장의 말이다. 순수과학 책을 펴내고 있지만 정작 손 사장 본인은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지금까지 펴낸 책은 문고판을 포함해 850여종. “한때는 월간지까지 펴내서 직원이 24명에 이른 적도 있어요. IMF의 직격탄을 맞고 사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다가 3년 전쯤 마지막으로 있던 편집자도 아이 양육 문제로 그만뒀습니다.”
전파과학사의 창업자는 손영일 사장의 사촌 형인 손영수씨다. 군대에서 통신장교로 근무했던 손씨는 체신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국내에 통신 관련 서적이 전무하다시피 한 것을 보고 외국의 통신 관련 서적을 하나둘씩 들여오기 시작했다.
처음 펴낸 책들은 모스 부호, 전화교환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전파과학사’란 이름은 처음에 출판했던 책들의 성향에 따라 지었다. 이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TV가 출시되면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전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자 1970년대 초부터 전자 관련 책을 출간했다. 1960년대 말 을유문고, 삼성당문고 등을 중심으로 문고판 붐이 일자 1972년부터 ‘현대과학신서’라는 문고판을 펴내기 시작했다. 총 139권까지 발간된 현대과학신서는 전파과학사를 과학 전문 출판사로 자리매김해주었다.
손영일 사장은 1975년 “영업을 맡아달라”는 사촌형 영수씨의 부탁으로 전파과학사와 인연을 맺었다. 지난 1989년엔 정식으로 회사를 인수했다. 영업으로 출발한 손 사장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회사 인수 직후부터 영업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전문적인 책은 동네 서점엔 갖다놓을 데도 없어요. 그나마 대형서점에 갖다놔야 하는데 저희같이 몇 권 팔리지 않는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그다지 중요한 고객이 아니잖아요. 이 때문에 대형서점은 책을 납품받을 때 값을 할인받으려고 합니다. 몇 권 팔리지도 않는데 책값까지 깎아주면 어떻게 장사합니까? 그래서 대형서점에 있는 책들을 다 빼버렸죠.”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전파과학사의 책은 출판사들이 출자해 만든 유통기관인 한국출판협동조합을 통해 배포되는 것이 전부다. 보통 1000부를 찍으면 400부를 조합에 보내고 600부는 회사에 쌓아놓고 주문을 받아 판매한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사무실은 사무실이라기보다 창고에 가까웠다. 별도의 창고가 있지만 사무실 여기저기에도 책이 쌓여있었다. 사무실에 하나뿐인 손 사장의 책상 위엔 ‘WONDER GENES’라는 제목의 영문 원서가 놓여있었다. 미국의 맥스웰 멜먼(Maxwell J.Mehlman) 교수가 지은 이 책은 이달 말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이 책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핵심 쟁점이 고스란히 소개되어 있어요. 우리나라 제목은 ‘기적의 유전자’로 정했습니다. 조금만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처럼 이슈가 발생한 이후에 관련 책이 나올 때도 있지만 평소 손 사장의 경영철학은 ‘책이 팔리든지 말든지 과학책으로서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은 책은 가장 먼저 낸다’는 것이다. 손 사장은 “트렌드를 봐가며 책을 내는 게 아니라 한발 앞서 출간하다 보니 책은 잘 안팔리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지놈 프로젝트의 완성에 임박해 유전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증폭되자 처음으로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상 수상자가 된 제임스 왓슨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우리 사회에서는 1990년대 후반 들어서야 주목을 끌기 시작한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도 이미 전파과학사에서 1970년대 초에 발간했다. 애초 손바닥 크기만한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다가 현재는 일반 단행본 사이즈로 겉모습만 바뀌었다.
850여종 출간, 절반이 절판 안되고 꾸준히 팔려
현재 전파과학사의 직원은 손 사장을 제외하고 1명뿐. 그 1명도 편집자가 아닌 영업과 창고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다. 편집, 조판, 디자인 등은 모두 외주를 주고 있다. “출판사 문을 연 지가 50년이 되다보니 과학계에 있는 사람은 거의 다 알아요. 미국에 공부하러 간 사람들한테 전화가 와요. ‘나한테 좋은 책이 있는데 번역해서 내보면 어떻겠냐’는 식으로요. 따라다니면서 원고 달라고 할 필요가 없죠. 또 한국유전학회나 동물학회처럼 학회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책을 내자고 제안하는 경우도 있죠. 조판하는 쪽에서도 전파과학사 스타일을 아니까 교열 봐서 원고만 넘기면 알아서 해주니 손발이 척척 맞죠.”
이런 점은 50년 전통의 전문출판사가 갖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편집과 교정은 생물학 박사인 윤실씨가 담당하고 있다. 어린이 과학잡지 편집장 출신인 윤씨는 전파과학사에서 자신의 책을 출간한 것이 인연이 돼 현재 이같은 중책을 맡게 되었다. “IMF 이전엔 한때 편집자가 10명에 이른 적도 있어요. 편집자를 뽑을 때는 물리, 화학, 지질학 식으로 분야별로 겹치지 않게 1명씩 뽑았었죠.”
50년을 채워가는 기간 동안 다른 분야로 한눈판 적이 한번도 없을까? 손 사장은 “지금껏 딱 두 번 ‘외도’를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부인이 결혼부터 부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구술한 책이었고, 또 한번은 주요 대학 교수들이 모여서 만든 논술책이었습니다. 두 번 다 제가 나서서 한 건 아니고 번역자와 저자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부의 부인의 책은 화제가 되겠다 싶었는데 도무지 홍보가 안돼서 실패했어요. 논술 책은 출간 직후부터 반응이 대단했습니다. 초판 5000부를 찍은 지 얼마 안돼 3000부를 더 찍었는데 논술시험이 끝나면서 판매는 고사하고 반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시장 상황을 잘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혼쭐이 난 거죠. 그 뒤로는 과학 이외에는 눈을 돌린 적이 없습니다.”
과학책의 특성상 책의 수명이 길다는 것이 좋은 점이다. 베스트셀러도 몇 년만 지나면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전파과학사의 책은 지금까지 펴낸 850여종의 책 중 절반 정도인 400종 정도가 절판되지 않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책 같은 경우는 일반·특수 상대성이론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잖아요. 저희 책은 한번 만들면 오래 가서 지금 만든 책을 10년 뒤에 봐도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1~2년 있다 죽는 책은 없어요.” 지금도 매년 6~10권의 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손 사장은 “그 이상은 더 낼 능력도, 욕심도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 전날 저녁 손 사장은 학습지 회사에서 문제 출제위원 일을 하고 있는 딸과 산책을 하면서 오래간만에 후계자 논의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50년 동안 유지해온 출판사 아닙니까? 전통을 이어가야지요. 처음엔 ‘그거 하면 굶어죽는다’면서 반대했던 딸이 어제는 ‘그러면 아빠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내가 ‘칠십까지는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죠. 일단 물려받을 사람은 정해진 셈입니다.”
김재곤 주간조선 기자(trum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