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엄마"라는 단어는 애증에 가깝다.
또래의 친구들이 엄마의 젖을 먹고 자랄 때 나는 백설기를 빻아 만든 가루를 우유 삼아 먹었고, 엄마 젖을 만지며 잠들고 응석부릴 때 나는.....그런 경험을 해본적도 없다. 어릴 적 친구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만지며 응석부리는 것이 부럽고 시기가 나서 등 돌려 나온 기억도 많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고 한이 되었던지 그런 일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몸살을 앓았다.
태어나서 삼칠일이 채 되기도 전에 엄마를 여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생모는 젖도 한번 물려 보지 못했다고 하니 핏덩이만을 남겨 놓고 어찌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삼칠일은 출산일로부터 21일이 되는 날까지를 말하며, 아기와 산모가 가장 조심스럽고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시기로 대문에 금줄을 매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게 하는 등 온갖 부정으로부터 아기와 산모를 보호하고자 하는 풍습이다.
내겐 여러 명의 엄마가 있다.
낳아 주신 엄마, 온갖 역경을 딛고 나를 키워 주신 할머니엄마, 자라면서 친엄마 못지않게 보살펴 주시는 지금의 엄마, 현재 옆에서 같이 살고 있는 옆지기 엄마 등 내가 부르는 엄마들이다. 엄마의 정과 보살핌을 마음 껏 누리며 자란 사람들과 엄마에 대한 감정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란 환경 탓이었을까 첫머리에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 째다." 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어떤 상황이었기에 엄마를 잃어 버렸으며, 어떻게 일주일이 지나도록 찾지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생일상을 받으러 아버지와 같이 상경한 엄마는 지하철 서울역 구내에서 동행하던 남편을 놓친 뒤, 길을 잃고 사라진 참담한 사건이 발생한다. 엄마를 잃어버리기 전에 엄마를 잊고 살아온 가족들이 "너", "그" 그리고 "당신"으로 호명되며 고해성사 형식으로 전개되고, 마지막에는 사라진 엄마가 일인칭 화자로 새라는 매개체로 환생한 가운데 등장하여 둘째 딸의 집, 평생 숨겨온 마음의 의지처인 곰소의 그 남자 집, 남편과 아이들 고모가 있는 고향집,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엄마"의 집을 차례로 돌며 세상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너"와 "그"를 통해 잃어버린 엄마를 찾기 위해 두아들과 두딸, 아버지가 모여 앉아 엄마의 사진을 찾아 전단지를 만들고 이곳 저곳 배포하지만 엄마를 찾을 수가 없다. 간혹 엄마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찾아가지만 그 곳은 과거 자식들과 관련이 있었던 곳이었고, 엄마를 본 시기는 몇주 전, 몇달 후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들에게서 전해 오는 엄마는 "발등에 상처가 심했다.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는 데 얼마나 걸었는 지 슬리퍼가 엄지 쪽 발등을 파고 들어갔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 패어 있었다. 고름이 밴 상처 부위에 자꾸 파리가 날아와 앉으니 귀찮은 지 손을 뻗어 쫓곤 했다." 라는 등 형색이 말이 아니었음을 전해 준다. 각각의 장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다음 책장을 넘기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목이 메었다.
"너"와 "그"를 계기로 만난 엄마는 유교사상에 근간한 전통적인 모습 그대로 였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아이들 낳고, 자식들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당신, 의지할 곳이라고는 남편 밖에 없지만 바람기가 있어 집안일은 팽개치고 밖으로만 떠도는 남편에게 사랑은 커녕 부부간의 정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당신,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람 삼아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챙기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신, 집안 곳곳의 꽃과 나무, 개와 닭을 비롯한 동물들 풀 한포기까지 당신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살뜰히 살아온 당신을 통해 우리들의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 우리의 평범한 삶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엄마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를 느끼지도 못했고 잊고 살았던 것이다. 가장 큰 고해성사여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통해 바라본 엄마는 고해성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라기 보다는 함께 살아온 아내에 대한 정을 깊은 반성을 통해 엿볼 수 있는 회한이었고 오히려 밖으로 떠돌며 제대로 된 사랑한번 주지 못했지만 아내의 속 깊은 살뜰함을 받기만 했던 뒤늦은 남편의 통곡을 접할 수 있다. 소설가의 딸이 있음을 자랑하고 싶었으면서도 마음 속에 간직하기만 했던 답답함, 글을 모르기에 남이 읽어 주는 딸의 소설을 탐독했던 아내이지만 그 녀가 가진 정겨움을 어린아이들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베풀었던 아내이기도 했다. 시동생 균을 잃어 버린 후 정신적 공황상태를 보듬어 주지 못한 죄책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구면서 무던하기만 했던 아내를 회생시켜 독자의 심금을 자극한다.
텅빈 고향집으로 내려가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늙은 아비에게 전단지를 들고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큰딸이 첫새벽에 전화를 걸고 마침내 터져나오는 울음.
"어~~어어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스러움과 뒤늦은 반성의 클라이막스를 슬픔 표출의 대명사인 겪한 흐느낌으로 대신한다.
"딸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수화기 줄을 타고 딸의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당신의 얼굴도 눈물 범벅이 되었다." 수화기 줄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간이라는 생명의 골짜기를 적셔 왔던 태초로부터의 눈물이기도 했다.
마지막 자유와 평온함을 암시하려는 듯 한마리의 새로 환생하여 가족들과 그의 곰소 남자와 이별을 알리는 엄마는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을 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 한 가족의 엄마로 힘겹게 살아온 세월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지만 가족들이 고해성사 한 부분에 대한 원망은 커녕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애틋하게 만든다. 그것이 엄마의 몫이라는 암시까지 준다.
또 하나 다른 어떤 것보다 부각시키고 싶은 것이 있다.
이 소설이 신파극이 아님을 더욱 절절하게 나타내 주는 것은 곰소아저씨에 대한 엄마의 로맨스였을 것이다. 아이의 사산으로 인해 잠깐 그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엄마의 독백으로 담담하게 전개되는 짠한 사랑이야기는 칙칙했던 엄마의 삶에 밝고 맑음을 줄 수 있어 따듯했다.
밀가루가 담긴 함지를 훔쳐 눈앞을 캄캄하게 하던 사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한 번 더 웃게 해 주고 싶었던 사람,
삼십년 동안 힘겨워서 찾아가면 위로가 되던 사람,
죄였고 행복이었던 당신 앞에 손목 한 번 못 잡게 해 기품있어 보이고 싶어 했던 여자의 마음,
어딘가를 함께 가보자고 하는 말에 철렁 내려앉던 가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기 시작하면 다시 가서 보고 싶은 사람.
헛헛하고 힘든 삶이었으나 엄마에게도 비밀스런 위로가 존재했음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아버지의 뒤늦은 후회가 그리 밉게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 소설은 엄마를 잃고 가족들의 고해성사와 엄마의 회한으로 슬프고 어두웠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곰소아저씨에 대한 로맨스가 있어 엄마의 삶이 그리 한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반전을 주기도 했다. 한없이 안쓰럽고 눈물나게 했던 엄마를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만날 수 있게 한 곰소아저씨가 있어 사랑스러운 소설이 되었다.
힘들 때 항상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엄마를 문학적 감동을 통해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해 준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