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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ㅣ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평점 :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두번째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의 상권이다. 상권에 9개의 단편, 하권에 12개가 각각 수록되어 있고, 두 권 합쳐 10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단편집이다. 미국에서 85년에 나온 작품집이지만 국내에 정식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그의 작품들은 전세계적으로 3억부를 팔았을 만큼 초대형 히트작이지만, 국내에서는 썩 높지 않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비양심적인 출판사가 조악한 만듦새로 그의 책을 마구잡이로 낸 게 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공포소설의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높은 문학성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 유독 한국에서는 '쌈마이 오락소설'로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슬프다. 다행히 정식 계약을 통해 속속 그의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제대로 평가할 기회를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턱이 빠질만큼 하품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스티븐 킹은 전형적인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사실 공포소설에서 등장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면 뻔하다. 흡혈귀 아니면 좀비, 괴물, 사이코, 악령, 유령들린 집...대충 이런 정도가 아닐까. 스티븐 킹은 열거한 것들을 수도 없이 써먹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한 마디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무엇보다 문장력이 일품이다. 그의 문장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불길한 느낌이 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가슴 졸이는 부분은 사실 괴물이 출현해서 난도질하는 순간이 아닌, 괴물 출현 직전의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다. 그는 독자들의 심장을 어떻게 하면 두 배 빨리 뛰게 하는지, 아예 멎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위트가 넘실댄다. 책을 읽는 내내 억눌린 듯한 공포감, 신경질적인 웃음, 깊은 감동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마침내 책장을 다 덮으면 이제 끝났다, 하는 해방감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살아남게 됐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비슷하다. 독자와 책 속 인물의 처지가 절묘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작중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스티븐 킹이 잘쓰는 수법 중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 예컨대 단편 중 <안개>에 나오는 장면이다.
"...스테파니는 우리 집 서쪽 끝에 있는 채소밭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장갑을 낀 한 손에는 커다란 전지가위가, 다른 한 손엔 제초 노루발이 들려 있었다. 헐렁한 모자 덕분인지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보였다. 내가 경적을 두 번 가볍게 울리자 아내는 노루발을 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끝문장 하나로 독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버린다. 한 시퀀스 안에서 일종의 반전을 주는 것인데 절묘하다. 그리고 뒤에 전개될 이야기(아내가 죽는다는 것)를 살짝 암시하면서도, 김빠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다니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반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안개>다. 이 작품만 봐도 사실 본전은 뽑는 셈이다. 메인 주에 허리케인이 찾아온 다음 날, 정체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덮는다. 빌리라는 어린 아들을 둔 데이빗은 아들을 데리고 대형 마트로 향한다. 태풍 때문에 물자가 동나 생필품을 사러간 것이다. 쇼핑을 끝내려는 찰나, 안개 속에서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들이 나온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는 괴물들. 데이빗과 빌리, 부자(父子)는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트 안에 고립된다. 평범한 데이빗의 이웃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감에 점점 미쳐간다. 밖에서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괴물들이, 마트 안에는 괴물보다 두 배쯤 더 사악한 인간들이 부자를 노린다. 여러 가지 추측만 난무할 뿐, 끝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괴물들의 묘사는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원래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 또한 마트라는 좁은 공간이 주는 폐소공포증의 느낌, 극한 상황에 몰리면서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이 작품을 잊을 수 없는 공포소설의 수작으로 만들어준다.
그외에도 원숭이 인형이 양손에 들고 있는 심벌즈를 울릴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원숭이>와 하이킹을 간 대학생들이 한 명씩 죽어나가는, 10대 슬래셔 영화같은 <뗏목>이 공포소설로는 발군이다. <안개>와 <원숭이> 그리고 다른 작품이지만 <애완동물 공동묘지>등에서 주인공인 화자는 언제나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그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없던 용기도 끌어내며,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분투한다. 어쩌면 스티븐 킹은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가정의 파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같다. 비록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라는 편협한 세계지만, 그래도 킹의 주인공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대체로 성공하는 편이다.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깊은 몰입감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족과 행복은 지켜야 한다는 것 말이다. 다소 미국적이고 뻔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에 언급했듯 스티븐 킹은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할 줄 안다. 그것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