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 2006, Spring VOL.1 창간호
마이조 오타로 외 지음 / 학산문화사(잡지)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파우스트>하고 거창한 제목을 달았는데, 괴테와는 전혀 무관한 일본 문예잡지의 이름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발행하는 잡지로 알고 있는데, 국내 출판사와 합의해 한국판을 낸 것 같다. 문예잡지라고 해서 난해하고 뜬구름 잡는 순문학 잡지는 아니고, 현재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라이트 노벨이라는 장르를 주로 소개하고 있다. 라이트노벨을 영어로 쓰면 Light Novel인데 말 그대로 가벼운 소설이라는 뜻인 듯.

 

사실 명색이 라이트노벨을 다루는 잡지인데, 국내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니만큼 첫 호에서 라이트노벨의 개관과 역사를 소개하려 노력하고 있다. 라이트노벨 소설가인 니시오 이신, 타키모토 타츠히코 등과 대담을 하기도 하며, 전문가가 쓴 '라이트노벨의 역사와 파우스트'라는 꼭지도 있었다. 꼼꼼하게 다 읽어봤지만 역시 라이트노벨의 개념에 대해 잘 모르겠다. 사실 자기네들도 잘 모르는 것 같더라. 다만 일본에서는 그 역사가 꽤 길고,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 게임, 신본격 미스터리 등에 영향을 받은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작품을 쓰고 일러스트를 첨가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재미있는 건 초창기 라이트노벨의 유행을 몰고 온 대표적인 작가로 책에서는 교고쿠 나츠히코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지목하고 있다는 것. 이 두 사람은 대표적인 추리소설가인데...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 -_-;; 아무튼 <공의 경계>라는 작품이 라이트노벨의 히트작이라고 하더라. 국내에도 나왔으니 한번 읽어보련다.

 

아무튼 <파우스트>에는 어떻게든 라이트노벨을 소개하기 위한 눈물겹고도 다양한 특집기사가 수록되어 있으며,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마이조 오타로라는 작가는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을 내기도 하는 등 꽤 잘 나가는 작가인 듯했다. 이 사람의 단편 <드릴 홀 인 마이 브레인>은 나중에 제대로 읽어보려고 미뤘다. 그외 니시오 이신의 <신본격 마법소녀 리스카>는 초등학생 여자 마법사와 <불야성>의 류젠이를 방불케하는 협잡꾼 초등학생 남자애가 팀을 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단편이다. 우습게도 마법이 등장하지만 사건을 그래도 '논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이뻤다. 사토 유야의 <붉은 색 모스크뮬>은 엽기의 끝을 달리는 작품이다. 잔인하기만 하지 솔직히 별다른 재능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외 강병융의 <있거나 혹은 없어도>, 이이노 켄지의 <로스타임>은 보는 동안 한두 번쯤 웃겨주는 그야말로 '가벼운' 소설들로 있거나 혹은 없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시간 때우는 용도로 보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작품들이다. 아마 2호가 나와도 구입할 것 같다. 가장 재미있는 기사는 <철학자의 밀실>을 쓴 추리소설가 가사이 기요시와 <공의 경계>의 나스 기노코 작가들의 대담. 가사이 기요시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르고, 나스 기노코의 납짝 엎드린 처세가 일품이었다. 가사이 기요시가 당신 작품 중 이런 점이 좋더군, 하면 나스 기노코는 바로 선생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가사이 기요시, 허허 그랬나. 뭐 이런 흐름으로 전개되더라.

 

아무튼 가사이 기요시의 촌평이 인상적이었는데, 라이트노벨 미스터리계 작가들은 일본 추리소설의 두 전통 '논리적인 해명'과 '람포, 세이시 풍의 비정상적인 배경' 중에서 후자만을 승계 받은 것 같다고 느낀단다. 그중 <클락성 살인사건>의 키타야마 타케쿠니가 비교적 전자에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며, 니시오 이신도 그렇단다. 오츠 이치는 라이트노벨계 작가지만 본격 미스터리도 굉장히 잘 쓴다며 후하게 평가를 내려 '주시고' ㅋㅋ 또 가사이 기요시가 나스 기노코에게 신본격을 한번 써보라고 조언하자, 나스가 바로 제까짓게 어떻게 하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뭐 신본격은 자기에게 종교라나,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나..^^  어쩌면 신본격이나 본격 추리소설가들이 라이트노벨계 추리소설가들을 너무 짓밟아 기가 꺾였나, 뭐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기죽지들 말고 열심히 쓰기 바란다. 뭘 써야 걸작도 나오는 법 아니겠는가 ^^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예고 몇 편. <파우스트>를 낸 학산 출판사에서 미스터리 라이트노벨을 몇 편 낼 예정이란다.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마이조 오타로의 <연기, 흙 혹은 희생물>. 제19회 메피스토 수상작인데, 평이 좋았던 걸로 알고 있다. 외과의사가 연쇄주부구타생매장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이 자신이 어머니인 걸 알고 고향으로 내려와 사건을 추리하는 내용이란다. 그리고 니시오 이신의 <잘린머리 사이클> 제23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다. 절해고도, 거대 밀실에서 연쇄 살인이 벌어지자 모여 있던 천재들이 치열한 두뇌싸움을 펼치며 범인을 잡는단다. 내용은 좋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사토 유야의 <플리커 스타일>. 아마 이 작품도 메피스토 수상작일 거다. 여동생의 유괴 살인으로 폭주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단다. 뭐 전부 재미있을 것 같은 작품들 뿐이니 기다렸다가 꼭 읽어보련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7-1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으로가 확 눈길을 사로잡았다구요^^

상복의랑데뷰 2006-07-1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읽으셨군요 ^^

jedai2000 2006-07-1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곧 나온다니 기다려보세요. ^^

상복의 랑데뷰님...예. 한가할 때 한 편씩 다 봤습니다. ^^
 
사신 치바 이사카 코타로 사신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복싱팬이 아니더라도 이름 한번쯤은 모두들 들어보셨을 선수가 있으니, 그 이름 마이크 타이슨이다. 요즘이야 강간, 복역, 파산 등으로 인해 오점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는 그야말로 복싱의 신이었다. 대부분의 시합을 KO로 장식하며 '핵주먹'의 성가를 드높인 그는 나를 비롯한 초등학생들에게 강함의 대명사였다. 그런 그가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건 2002년,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던 레녹스 루이스와의 대전이었다. 우연히 본 그 시합에서 내 어린 시절의 절대강자는 어찌나 맞았는지 매트에 누워 피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복싱팬은 아니지만 당시 마음이 꽤 아팠었다. 추억의 한 부분이 날아가는 것이므로...

 

책과는 전혀 무관한 서두가 좀 길었는데, 이사카 고타로의 2005년작 <사신 치바>를 보고난 후 느낌이 마치 타이슨의 패배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아, 얘도 무적은 아니구나. 불사신은 아니구나. 완벽하지는 않구나...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이사카 고타로는 신선하고 경쾌한 플롯과 퍼즐적인 구성, 재치와 유머, 기법 면에서의 재기발랄함 등이 어우러져 일본 청춘소설의 일약 희망으로 떠올랐다. 2000년 본격적인 데뷔 이후 매년 거의 2편에 가까운 작품을 모두 히트시키며 현재 전성기 중이다. 작년쯤에 우연히 <칠드런>이라는 작품을 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다. 이렇게 독특한 재미를 주면서, 비 거친 뒤의 햇살을 걷는 듯한 청명한 느낌을 아울러 주는 작품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넓게 보면 미스터리 소설의 범주로도 손색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뒤로 늘 그의 작품을 더 보기만 바라왔는데 올해 한 달 사이에 무려 3편이나 출간됐다. <러시 라이프> <중력 삐에로> <사신 치바>가 그것이다. 유래없는 출간 러시인데, 2002년의 <러시 라이프> 2003년의 <중력 삐에로>보다 최근작인 <사신 치바>가 가장 떨어진다는 사실은 뼈아프다. 작가로서 정체되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지. 이런 식으로 발전없이 전매특허인 신선함과 경쾌함만을 내세워 매년 2권씩 발간한다면 점점 인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빛나는 재능이 빨리 소진될까 두려운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에서의 상황은 더욱 끔찍하다. 비록 '찻잔 속의 태풍'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붐을 타고 있으니,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한 달에 3권은 애교다. 이런저런 통로로 확인된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이 올해 5권 더 나올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팬으로써야 물론 기쁘지만 작가의 앞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한 해에 같은 작가의 작품 8권을 보고 물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더구나 원체 가벼운 스타일로 재기발랄하게 펜을 휘두르는 사람이니 그 스타일에 질리면 약도 없다. 이사카 고타로 같은 작가는 충분히 더 키워서 잡아먹을 수 있는 거위인데, 왜 배를 가르려고 안달인지 모르겠다. 과열 열기로 작가 하나 잡을 것 같다는 우려가 기우였으면 좋겠다.

 

<사신 치바>는 사고나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될 예정인 인간과 8일을 같이 보내며 최종적으로 그 인간을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신 치바'의 여섯 개의 에피소드를 담는 연작 단편집이다.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연애소설, 로드무비 등의 여섯 개 장르를 넘나드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의 아니게 악평을 한 꼴이 됐는데, 사실 형편없는 작품집은 아니고 재미있다. 다만 전작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타일은 <러시 라이프>보다, 주제의식이나 무게감에서는 <중력 삐에로>보다, 읽고나서의 시원함과 재미는 <칠드런>만 못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연작 단편집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칠드런>에서 멋지게 해낸 작가의 실력을 보면 그건 아닌 것같다.

 

만약 이 작품으로 처음 이사카 고타로를 접한 사람이면 분명히 만족하실테고, 출간순서별로 꾸준히 읽어보신 분이라면 내 생각으로는 실망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약간씩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를 그나마 여섯번째 이야기인 '사신 vs 노파'에서 작가의 장기인 퍼즐적 구성으로 상당 부분 상쇄한다. 2006년 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처럼 선방했지만 웬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 그런 작품이라고나 할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6-07-0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간 전작에 비해 그렇지만 나름 이 작가의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7-0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지를 못해서... ^^ 일단 칠드런부터 읽어봐야겠네요.

jedai2000 2006-07-09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TA반대물만두님...저도 FTA반대자입니다. ^^ 이사카 고타로의 재능이야 뭐 어디가겠습니까. 다만 <사신 치바>는 작가의 작품 중에 중하위권에 위치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올테니 기대해보자구요. ^^

상복의 랑데뷰님...출간 순서대로 읽으셔도 좋구요. <칠드런>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입니다. 읽고나서 가장 상쾌했거든요. ^^
 



본격적으로 한여름에 접어드는 시기가 왔다. 개인적으로는 더위에 강해 뭐 그다지 걱정은 없다. 더구나 회사에 있으면 에어컨이 빵빵해 그리 덥지도 않다. 집에 올 때는 지하철에서 추울 정도로 냉방을 해주니 이거야 완전 더위는 물렀거라,다. 회사 윗분들께서 정말 고맙게도 나 집에서 더위에 건강 상하지 말고, 회사 나와서 시원하게 있으라고 휴가를 1일 밖에 안 주셨다. 눈물이 그냥 절로 난다. 이렇게 생각해주는 윗분들이 있으니 정말 일할 맛이 난다. 그런데 왜 눈물이 자꾸 나지...나 이러면 안 되는데...이제 안 울라고 했는데...T.T

 

하기야 일한 지 이제 반달 됐는데 휴가를 몇일씩 다녀오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고. 하루에 만족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조직 사회의 부속품일 뿐인데...언제든지 대체가능한. (점점 시니컬해진다.) 아무튼 하루라도 최대한 보람되게 쓰려고 제현절 뒤에 붙여 4일 연휴를 만드는 등 생쇼를 하고 있다. 이제 어떻게 4일 연휴가 되긴 했는데 또 무엇을 할지가 문제다.

 

작년에도 3일내내 집에만 있었고, 별로 할 것도 없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이리 빙글, 저리 빙글, 퍽퍽(뒹굴다 벽에 부딪쳤음). 이랬는데 올해도 재현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친구들을 모아놓고 휴가 계획을 짜고 있으려니 한 녀석이 말을 꺼낸다. 이 친구는 현재 평택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제앞잡이'다(우리끼리 놀리려고 하는 말이지 일체의 정치적 의미는 없다.본인 그런 거 무지 싫어한다). 암튼 인천 토박이 녀석이 평택가서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평택 자기네 자취방으로 놀러오라고 성화다.

 

황금같은 휴가를 냄새나는 친구 자취방에서 보내라고. 이건 정말 그리섬이 활약하는 라스베가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그래도 그냥 거절하기 좀 미안해서, 거기 가야만 하는 이유를 대라고 시켰다. 논리적으로 말이다. 그러자 그 녀석이 한다는 말!

"야, 너 우리 집에 놀러오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냉면하고 불고기."

"맨날 먹는 게 냉면하고 고긴데 뭘."

내가 시큰둥하자 어떻게든 꼬셔보겠다는 일념으로 녀석은 계속 주절댄다.

"야, 너 오면 내가 미군부대 '타코 벨'에서 타코 사다줄게. 너 타코가 어떤건지 알아? 너같은 애는 평생 가도 못 먹는거야. 평생."

 

평생, 평생...그 녀석이 보기에 내가 죽을 때까지 미국에 못 가볼 놈으로 보였나보다. 설마 죽을 때까지 그 잘난 타코 하나 못 먹어볼까.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마치 옛날 시골 초등학교에서 그나마 잘 사는 아이 하나가 파인애플을 들고와 자랑하며 '너는 평생 가도 이런 거 못 먹는다'하는 거랑 똑같지 않은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대명천지에 타코 하나 갖고...암튼 상처받았다.

 

그런데 정말 속상한 게 실제로 타코를 먹어보지 못했다. 이거 도대체 무슨 맛이야? 뭘로 어떻게 만들길래 이렇게들 난리인 것이야. 혹시 먹어보신 분들 있음 맛 좀 설명해주시길...그리고 혹시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가르쳐주시길...^^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6-07-04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태원에 TACO 라는 타코집. ^^ 우리나라에 멕시칸레스토랑이 별로 없는 편이지요?

oldhand 2006-07-0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택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제다이 님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_-;;

jedai2000 2006-07-0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이태원에도 있었군요. 그런데 물어보니 다들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한국 사람 취향에는 별로일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네요. 그래도 궁금한데...나중에 함 먹어볼래요. ^^

올드핸드님...제대로 보셨습니다. 올 여름은 평택에서! -_-;;
 
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두번째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의 상권이다. 상권에 9개의 단편, 하권에 12개가 각각 수록되어 있고, 두 권 합쳐 10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단편집이다. 미국에서 85년에 나온 작품집이지만 국내에 정식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란다. 그의 작품들은 전세계적으로 3억부를 팔았을 만큼 초대형 히트작이지만, 국내에서는 썩 높지 않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80~90년대를 거치면서 정식 계약을 맺지 않은 비양심적인 출판사가 조악한 만듦새로 그의 책을 마구잡이로 낸 게 그 이유가 아닐까 한다. 공포소설의 범주에 속해 있으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높은 문학성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들이 유독 한국에서는 '쌈마이 오락소설'로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슬프다. 다행히 정식 계약을 통해 속속 그의 작품들이 나오고 있으니 제대로 평가할 기회를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턱이 빠질만큼 하품 나오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스티븐 킹은 전형적인 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사실 공포소설에서 등장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면 뻔하다. 흡혈귀 아니면 좀비, 괴물, 사이코, 악령, 유령들린 집...대충 이런 정도가 아닐까. 스티븐 킹은 열거한 것들을 수도 없이 써먹었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한 마디로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무엇보다 문장력이 일품이다. 그의 문장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불길한 느낌이 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가슴 졸이는 부분은 사실 괴물이 출현해서 난도질하는 순간이 아닌, 괴물 출현 직전의 숨막힐 듯한 긴장감이다. 그는 독자들의 심장을 어떻게 하면 두 배 빨리 뛰게 하는지, 아예 멎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유머를 놓치지 않는다. 감각적이고, 지성적인 위트가 넘실댄다. 책을 읽는 내내 억눌린 듯한 공포감, 신경질적인 웃음, 깊은 감동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마침내 책장을 다 덮으면 이제 끝났다, 하는 해방감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의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결국 살아남게 됐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 비슷하다. 독자와 책 속 인물의 처지가 절묘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작중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겠다.

 

스티븐 킹이 잘쓰는 수법 중 개인적으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 예컨대 단편 중 <안개>에 나오는 장면이다.

"...스테파니는 우리 집 서쪽 끝에 있는 채소밭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장갑을 낀 한 손에는 커다란 전지가위가, 다른 한 손엔 제초 노루발이 들려 있었다. 헐렁한 모자 덕분인지 얼굴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보였다. 내가 경적을 두 번 가볍게 울리자 아내는 노루발을 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아내를 만나지 못했다."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끝문장 하나로 독자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버린다. 한 시퀀스 안에서 일종의 반전을 주는 것인데 절묘하다. 그리고 뒤에 전개될 이야기(아내가 죽는다는 것)를 살짝 암시하면서도, 김빠지게 하지 않고 오히려 뒷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다니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반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는 <안개>다. 이 작품만 봐도 사실 본전은 뽑는 셈이다. 메인 주에 허리케인이 찾아온 다음 날, 정체불명의 안개가 마을을 덮는다. 빌리라는 어린 아들을 둔 데이빗은 아들을 데리고 대형 마트로 향한다. 태풍 때문에 물자가 동나 생필품을 사러간 것이다. 쇼핑을 끝내려는 찰나, 안개 속에서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들이 나온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는 괴물들. 데이빗과 빌리, 부자(父子)는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마트 안에 고립된다. 평범한 데이빗의 이웃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공포감에 점점 미쳐간다. 밖에서는 정체불명의 사악한 괴물들이, 마트 안에는 괴물보다 두 배쯤 더 사악한 인간들이 부자를 노린다. 여러 가지 추측만 난무할 뿐, 끝까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괴물들의 묘사는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원래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 또한 마트라는 좁은 공간이 주는 폐소공포증의 느낌, 극한 상황에 몰리면서 정신의 균형을 잃어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이 작품을 잊을 수 없는 공포소설의 수작으로 만들어준다.

 

그외에도 원숭이 인형이 양손에 들고 있는 심벌즈를  울릴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원숭이>와 하이킹을 간 대학생들이 한 명씩 죽어나가는, 10대 슬래셔 영화같은 <뗏목>이 공포소설로는 발군이다. <안개><원숭이> 그리고 다른 작품이지만 <애완동물 공동묘지>등에서 주인공인 화자는 언제나 어린 아들을 둔 아버지이다. 그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없던 용기도 끌어내며,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분투한다. 어쩌면 스티븐 킹은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가정의 파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같다. 비록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미국의 중산층 가정이라는 편협한 세계지만, 그래도 킹의 주인공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대체로 성공하는 편이다.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깊은 몰입감의 정체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가족과 행복은 지켜야 한다는 것 말이다. 다소 미국적이고 뻔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에 언급했듯 스티븐 킹은 같은 이야기라도 재미있게 할 줄 안다. 그것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 2006-06-23 0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그래요. 똑같은 얘기도 재밌게 말할줄 알죠.
어떻게 하면 독자가 긴장감을 가지고 보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
가끔은 이런 노련함도 신선도 부족으로 잘 먹히지 않을때가 있지만요.^^;

jedai2000 2006-06-23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워낙 읽은 게 없어서요. 딱 세 권 읽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저에게 신선합니다. 모르죠. 많이 읽다보면 천편일률같이 느껴질 지도..^^ 아무튼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

물만두 2006-06-2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장 보고 접었어요 ㅠ.ㅠ 역시 스티븐 킹은 저랑 너무 안맞아요 ㅠ.ㅠ

jedai2000 2006-06-2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안개>는 그래도 저는 꽤 좋았어요. 하지만 취향이 안 맞으시면 누가 머래도 어쩔 수 있나요. ^^
 



아직 제목은 안 나왔지만, 요즘 작업하는 책은 교양과학 에세이류의 책이다. 오랫동안 독일에서 과학기자로 활동한 작가의 다양한 과학 상식과 현대 문명 비판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학창 시절 '제물포(제 때문에 물리 포기)'로 활동했고, 지금도 과학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 판국에, 상대성 이론, 물리학, 천문학, 심리학, 신경생리학 등의 온갖 잡학사전 같은 과학 이야기를 접하니 사실 정신이 좀 가출한 상태다. 그렇지만 작가가 알기 쉽게 일상 생활의 예를 사용해 조근조근 잘 설명하고 있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히는 이해하고 있다.

 

그중에서 소개드리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으니...그중 한 가지는 잠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 따르면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부족한 건 '피로를 푸는 능력'이라고 한다. 지난 100년 사이에 우리의 수면 시간은 적정 시간인 9시간에서 7시간 30분으로 줄었다고 한다. 솔직히 7시간 반 자는 분도 몇 명이나 있나. 본인은 6시간이 약간 안 된다. 사정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잠을 많이 자는 건 사치라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다.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한단다. 가공할 효율 지상주의라 아니할 수 없다. 잠을 많이 자는 게 왜 사치인가, 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의 몸은 항상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당장 잠을 줄인다고 쓰러지는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 댓가를 치룬다고 작가는 경고한다. 어느날 팍 쓰러진다거나 결국 자기 남은 생명을 깎아 먹는다는 거다. 충분한 수면으로 피로를 푸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생명체인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인 일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잠자는 시간을 통제할 수 없지만, 인간만은 그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잠의 양, 자는 시간, 깨는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란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씨앗인 셈이다. 잠을 통제하는 능력이 없다면 현대인의 만성 피로와 활력 부족, 건강 부진의 상당 부분이 개선되었을텐데 말이다.    

 

한마디로 건강을 생각하면 잠을 줄이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닌 것. 그런 이유로 적정 시간인 9시간 정도는 자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나같은 경우는 9시간을 자려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인 밤9시에 바로 자야 한다..-_-;;; 그나마 자는 시간이 아까워, 책읽고 웹서핑하고, 별짓을 다한다. 하루중 완벽하게 내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은 밤9시부터 밤12시까지 고작 3시간. 결국 책 한 페이지라도 더 읽으려면 잠을 줄일 수 밖에...우리 현대 직장인들 정말 너무 피곤하게 사는 것같다. 도대체 삶의 질이라는 건 어디로 갔을까? 건강까지 해쳐가며, 그 좋은 잠까지 버려가며 아둥바둥 살아봐야 끝이 다 좋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 이럴 때는 그냥 모든 걸 버리고 은거해버리고 싶다. 내가 좋은 곳도 봐뒀다. 전라남도 보성에 깊은 계곡이 있다. 작은 호수도 있고. 그곳에서 배를 띄우고 사랑하는 우리님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일평생을 사는 것이다.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래하겠소~" 맘 맞는 여자만 있으면 바로 은거 들어가련다. 사람들이 왜이리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_-

 

다음 한 가지는 '체벌'에 관한 것이다. 책에 따르면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와 유태인을 도와준 선량한 독일인들을 조사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어렸을 때 부모에게 자주 맞고 자란 아이가 학살자로 컸다. 간단히 말해, 부모에게 자꾸 맞으면 이 아이는 새로운 것을 능동적으로 시도하지 못한다고 한다. 혹시 잘못되면 맞을까봐 두려워서 말이다. 그래서 아이는 점점 수동적으로 변해가고, 또 폭력을 당연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남의 고통을 내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 동정심, 순수함 등이 모두 사라지고 폭력에 찌든 괴물이 된다는 것이다. 항간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영철 같은 연쇄살인범도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감정적으로 죄책감이나 고통 등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병이다. 보통 어렸을 때 체벌을 많이 당한 아이가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범죄가 아이 학대다. 솔직히 아이를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이가 고통받는 걸 지켜볼 수는 없다. 태생적으로 그건 안 된다. 농담처럼 노상 말하지만 아이를 위한 좋은 동화도 꼭 쓰고 싶다. 아이는 사랑받아야 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오늘 당신의 아이에게 매를 들었다고 하자. 20년이 지난 후,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손자를 때리며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도 맞고 컸지만 아무 일이 없었어. 그러니까 이 아이도 괜찮아.' 당신과 당신의 아이는 이미 괴물이다. 괴물만이 죄책감 없이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솔로 2006-06-22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잠도둑들>이라는 책이 있었죠.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면서부터 인류는 잠을 뺏기기 시작했다라는 흥미로운 과학서였는데, 그거와 일맥상통한 이야기군요.

jedai2000 2006-06-2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도둑>이라...에디슨만 아니었어도 인간들이 밝은 대낮에만 일을 할 수 있었겠죠? 한 5시쯤 퇴근할 수 있었을텐데..-_-;; 확실히 직장을 다니면 사람이 쫀쫀해지는 게 집에 1분이라도 빨리 가려고 갖은 수를 다 쓰게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