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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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학창시절에 누구나 가장 꿈꾸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 예쁜 교생 선생님과 연애를 해보고 싶다거나, 교내 농구대회에서 역전의 3점슛으로 스타가 되는 것도 있을 테고, 전교 1등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다양한 꿈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짜릿한 건 역시 시험 전날 남들은 다 어렵게 공부하는데 몰래 답안지를 훔쳐내어 간단히 100점을 맞는 것일게다. 솔직히 이런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도 시험 전날 외워도 외워도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물리 공식이나 국사 연대기 등에 혼절 직전의 상태가 되어 아, 시험지 훔치고 싶다 하는 공상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런 멋진(?) 계획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세 명의 악동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생님들도 포기한 문제아 기타, 조지로, 다치바나였다. 어차피 대학도 포기했고, 성적 잘 받아봐야 써먹을 데도 없지만 얄미운 선생님들도 골려주고 졸업 직전 마지막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그 이름도 멋진 '루팡 작전'을 짜낸다. 시험지가 어디 잠들어 있는지는 이미 파악됐다. 교장실 안에 있는 육중한 철제금고에 있다. 세 악동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침투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무사히 잠입해, 보아둔 열쇠로 금고를 열고 시험지를 사뿐하게 가져가려는데, 글쎄 금고 안에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살펴보니 영어를 담당하는 글래머 선생님이다. 그들은 시험지고 뭐고 그냥 금고를 닿고 도망쳐 나오는데,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시체는 옥상 밑 화단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어 의혹은 깊어져가지만,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사건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풍화되고 만다. 그런데 15년 후 어느 날 시효를 하루 앞두고 경찰 측에 의문의 제보가 들어간다. 여선생님은 사실 살해됐고, 비밀은 루팡 작전 안에 있다고.

 

이미 3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처녀작이다. 사실은 미스터리 소설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지만 책으로 나오지는 못한 작품을 유명작가가 되고 나서 개작한 것이라 하는데, 요코야마 팬들에게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환상의 처녀작'을 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어 제법 화제가 됐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요코야마 히데오는 초반부, 중반부까지는 신필이지만, 결말에서 작위적인 감동을 강조하는 신파극으로 돌변하는 약점만이 크게 부각되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요코야마 히데오 열성팬의 입장에서 이런 세평이 약간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만약 <클라이머즈 하이>의 종반부에서까지 앞부분의 박력과 재미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일본 미스터리 올타임 베스트 1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루팡의 소식>은 그런 약점을 상당히 뛰어넘고 있어 누가 봐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간략히 소개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마도 요코야마 히데오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루팡의 소식>을 준비할 때, 기존에 유행했던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을 참조한 듯 기본적으로 본격 미스터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금고에 있던 시체가 화단 아래로 이동한다는 플롯 자체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15년 전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현재 관계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특유의 작풍-개작할 때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강했을 듯-도 여전하여, 시효를 하루로 설정해 24시간 안에 사건을 풀어야 한다는 긴박감이 출중하며,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은 때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부대끼는가 하면, 상대의 실력에 감복하고 우정을 확인하는 등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조직 사회의 진면목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요코야마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청춘소설의 분위기도 있어, 세 악동들의 난장짓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스'나 무라카미 류의 <69>에 나오는 청춘들을 연상시킬 정도다. 15년의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세 악동의 현재의 모습은 꿈많았던 학창시절을 통과해 어느덧 세상의 때가 묻은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켜 이루 말할 수 없는 소회를 주며, 그 중 한 명인 다치바나가 세상과 손을 끊고 말을 잊은 채 노숙자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밝혀지는 결말부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미스터리의 면에서는 한 가지 이상 설명이 부족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고, 아마도 개작하면서 첨가되었을 거라 보이는 반전에서 사건의 진짜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이 좀 뜬금없고 그동안 유지되었던 작품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옥의 티가 되는 것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기준을 통과한 아주 우수한 미스터리 대중소설로 이 책이야말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가를 우리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데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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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코야마 히데오의 &quot;루팡의 소식&quot;
    from 맥, 기술, 영화, 도서 그리고 삶 2008-07-24 23:20 
    바티스타 수술팀의..을 읽고 감상문을 올렸더니.. happyseeker가 추천해준 책.. 미루고 미루다가.. 이번에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도서관에 가서 덥석 들고 와서 읽었다.. 루팡의 소식이라는 이름에서 루팡과 관계가 있나 싶었는데..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공소시효가 1일 남은 상황에서 (그것도 이미 끝나버렸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과거 자살로 처리된 사건이 살인사건이라는 제보를 받고 그 살인범을 밝힌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얼어붙은 송곳니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노나미 아사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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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미스터리는 여성이 대단하다는 것은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다카무라 가오루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작가 노나미 아사도 일본에서 상당히 평가받는 여성 미스터리 작가인데, 같은 작품으로 1996년에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데뷔도 1988년에 했으니 이미 중견 작가, 아니면 베테랑이라 불러야 할 듯. 작품 수도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대표작은 역시 <얼어붙은 송곳니>에 등장하는 여형사 오토미치 다카코가 등장하는 몇 편의 장편과 단편집이라 한다.

 

이 작품은 마음까지 얼어붙을 듯 추운 어느 겨울날, 심야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으로 시작된다. 한 남자 손님의 몸에서 갑자기 불이 솟구친 것, 결국 불은 건물을 거의 전소시킬 정도로 크게 번지고 만다. 수사에 착수한 형사들은 새까맣게 탄 남자의 몸에서 짐승의 이빨자국을 발견하고, 긴급히 수사반이 편성된다. '도마뱀'이라 불리는 오토바이 기동수사대 멤버 중 한 사람인 오토미치 역시 수사반에 차출되는데, 그의 파트너는 형사가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가진 중년의 꽉 막힌 다키자와 형사다. 별다른 단서가 없어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는 한편 도심 한복판에서는 연이어 짐승에 물려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대표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인체 자연발화와 흉포한 야수의 공격이라는 이중의 수수께끼가 제시되는 도입부가 아주 흥미로웠다. 그러나 작가 노나미 아사의 장기는 추리가 아니라 심리 묘사에 있다는 듯 작품은 주인공 오토미치의 심리를 세밀하게 쫓아가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특히 철저하게 남성 위주 사회인 경찰세계 속에서 그녀가 겪는 소외감이나 고독, 절망 등의 심리가 너무도 정교하게 그려져 있고, 파트너로 어쩔 수 없이 함께 다녀야 하는 '황제펭귄' 다키자와와의 신경전은 서로에 대한 적의와 무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파고들어 짜증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이렇듯 초반부에는 오토미치가 느끼는 좌절감과 쉽게 진전되지 않는 수사 과정의 막막함이 맞물려 독자들은 깊은 못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예전부터 노나미 아사가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명쾌하고 논리적인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오토미치, 다키자와 콤비가 사건의 해결에 크게 기여하거나 톱니바퀴같이 단단하고 체계적인 경찰 조직이 범인을 압박해 들어가 스스로 꼬리를 노출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우연이나, 범행이 계속 저질러지면서 피해자들의 관계에서 접점이 생기고, 혹은 범인들 내부의 분열에 의해서 단서가 발생하는 식이라 약간 섭섭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 경찰소설에 가깝고, 또 실제 경찰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도 누구 한 사람의 절묘한 아이디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난한 기다림 속에서 범인의 결정적인 실수나 새로운 단서 등이 발견되면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어쩌면 더 사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을 순수하게 경찰소설 측면에서 바라보면 수사진 편성과 실제적인 수사의 양상, 때로 반목하고 때로 화합하는 수사원들 사이의 관계 등이 대단히 현실적이며, 사실상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 관련된 사건에 치중하느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을 잃게 되는 수사원들의 애환은 무척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얼어붙은 송곳니>의 백미는 마지막 100페이지의 추격전에 있다. 처음부터 작가는 오토미치가 오토바이를 능수능란하게 탄다는 걸 암시하고 기동수사대장의 입을 통해 범인을 압박할 때 그녀의 오토바이가 쓰일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을 슬쩍 제시함으로써 밑밥을 깔아둔다. 결국 그녀는 오토바이를 이용해 범인을 추적하는데 수십 페이지 가량 이어지는 추격전의 쾌감은 정말 대단하다. 그토록 억눌려 있었기에 오토바이로 질주하며 도시를 마음껏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해방감마저 제공한다. 더구나 그녀가 상대하는 범인 역시 사실은 고결한 품성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를 인정하며 한계를 초월해 함께 달리는 장면에서는 웅장한 박력과 역동적인 에너지는 물론 책장을 덮어도 쉬이 잊혀지지 않는 깊은 감동까지 느껴질 정도다. 아마도 작가는 제일 먼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토바이로 도시를 질풍처럼 달리는 여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집필에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생생하게 잘 쓴 장면이다.

 

두 파트너는 남녀를 떠나 서로에게 어느 정도 탄복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순진하게 그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다키자와는 사건이 끝나고 다시 남자 파트너와 일하게 되자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고, 오토미치 역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쁜 파트너는 아니었지만 또 같이 일하기는 싫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사실적인 결말인가(그런데 후속작에서 다키자와가 다시 등장한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풀릴지 몹시 궁금하다). 아주 솔직히 말해 초반부 남녀 주인공의 기나긴 대립은 읽기 불편했고, 지나친 심리 묘사는 약간 지루할 정도였다. 저절로 풀리는 사건의 진상은 슬쩍 허무하다. 하지만 마지막 100페이지가 모든 걸 보상해준다. 감정이 고조되어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최후 추격전의 임팩트만으로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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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8-05-26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등장한 개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나네요..어휴..기특한것..마지막100페이지!!!
확실히 보상해 주죠^^ 노나미 아사 담책나오면 무조건 읽을거예요^^

jedai2000 2008-05-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풍'이죠 ^^ 노나미 아사의 오토미치 시리즈는 4편인가가 더 있는데 다른 작품들은 상업성이 떨어져 출간을 현재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네요. 흔치 않은 노나미 아사 팬이시라니 반갑습니다 ^^
 
스코틀랜드야드 게임
노지마 신지 지음, 금정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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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 국민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였던 2002년 여름, 방학 중이었던 나는 당시도 솔로라 누구 만날 사람이 있기를 하나, 어디 놀러갈 데가 있기를 하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무지막지한 썰렁한 나날을 보내던 중 심심타파를 위해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국내 최초로 신촌에 보드게임방이 문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거 재미있겠다 싶어 비슷한 처지의 연애 낙오자들 몇 명을 모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고 말았다. 그날 점심 때쯤 가서 차 끊길 때까지 놀았다. 어찌나 재미있었는지 개강을 하고 나서도 보드게임방에 상주하며 물경 수백 만원의 돈을 쓰고 배운 게임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보드게임 마니아가 된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스코틀랜드야드 게임>도 사실은 유명한 보드게임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원래 5명이 하는 게임으로 1명이 범인이 되어 지하철, 택시, 버스 등의 교통 수단을 이용해 도망치고, 나머지 4명이 형사 팀을 짜서 같은 교통 수단으로 정해진 턴 안에 범인을 잡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당연히 범인이 불리하니까 여러 가지 특전이 있는데, 워낙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다니는 범인의 역량에 게임의 재미가 좌우되므로 서로 내가 범인하겠다고 다투던 생각이 난다. 아무튼 무척 재미있는 보드게임이므로 5명 정족수가 맞으면 꼭 해보시기 바란다.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은 이 게임의 기본 규칙-정해진 24턴 안에 범인을 잡는다는-에서 착안해 순박한 한 남자가 생기발랄하면서도 아픔을 간직한 여자의 마음을 24일 동안의 만남 안에 사로잡는다는 내용으로 이끌어간다. 줄을 잘못 서서 출세가도에서 밀려난 회사 상사와 유일하게 술을 마셔줄 정도로 착한, 어쩌면 실속 하나 못 차리는 남자 주인공은 결국 차가 끊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하는 수 없이 24시간 만화카페에 들어가 밤을 새우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혼자 울고 웃고 하여튼 소란스럽게 만화를 보는 여자와 트러블이 생긴다. 그런데 옛 말에 싸우다가 정든다고 느낌이 그리 싫지는 않다.

 

며칠 후 우연히 병원에 가게 된 주인공은 그녀를 다시 보게 되는데, 그녀는 생명 수호의 최전선인 병원 응급실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사였다. 환자에 대한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반해버린 주인공은 외롭던 차에 어떻게 잘 꼬득여서 여자친구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하는데, 이게 웬 걸. 그녀는 애인이 있다는 게 아닌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쉽게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라지만. 그래도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골키퍼도 자리를 비운 상태 아닌가. 용기를 내보려던 찰나에 알게 된 사실 하나. 그녀의 애인은 몇 년 전에 이미 죽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쉽사리 서로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가 아니라 아예 볼 수 없는 원거리 연애인 셈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걸작 만화 <터치>에서도 보듯이 연적 가운데 최고는 역시 죽은 사람과의 대결. 남아 있는 사람의 가슴 속에서 한없이 예쁘고 멋지게만 미화되는 영영 떠나간 이는 더 이상 이미지가 훼손될 염려도 없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좋았던 그 모습 그대로만 남기 때문에 곁에서 때로 실망도 주고 잦은 만남에 질리게도 만드는 산 사람이 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야드 게임>의 주인공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불가능에 도전하려 한다. 비록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무엇보다도 단 24일이라는 강력한 제약이 있긴 하지만(왜 꼭 24일이냐고? 독서의 재미를 위해 밝힐 수 없지만 약간은 초자연적인 이유가 끼어든다).

 

작가인 노지마 신지는 내겐 낯선 인물이었지만 '101번째 프로포즈', '고교교사' 같이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드라마들의 각본가로 명성이 높다는데, 과연 작품 분량의 거의 대부분이 주인공들이 핑퐁같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뤄져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다. 1988년에 데뷔한 작가면 이제는 중견 혹은 노장 축에 들어갈 작가일 텐데도 상대방 말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대사들이 귀엽기 짝이 없다. 아마도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 한 가지 흥미로운 건, 그간 자기가 썼던 드라마의 공식을 스스로 반성한다는 점이다.

 

드라마에서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굴곡없는 미적지근한 연애사를 그리면 누가 보겠는가. 필연적으로 남녀 주인공이 죽어 슬픔의 정서를 극한까지 증폭시키거나 요상한 출생의 비밀이 끼어들거나 하면서 과장하기 일쑤인데, 노지마 신지는 자기를 비롯한 작가들이 그런 드라마에서 죽음이 갈라놓아도 언제까지고 사별한 사람만을 그리워하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묘사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그릇된 신화를 만들낸 게 아닌가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현재의 사랑에 충실하자, 죽은 사람과의 추억도 소중하지만 지금 바로 내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도 못지않게 소중함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만다.

 

주인공의 사랑의 행방이 결정되는 결말 부분이 약간 급작스럽고 남자 작가가 남자의 시점에서 쓴 작품이라 여자 주인공의 심리가 약간 피상적인 것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그 사람의 숫자 만큼이나 제각각의 연애가 있기 마련이다. 그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 많은 연애들을 전문적으로 예쁘게 가공하고 포장해 성공을 거뒀던 작가이니만큼 몇몇 장면에서 주인공의 연애 심리에 대한 통찰이 특히 돋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할 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곁에서 지켜주고 기댈 수 있게 도와주는 오빠는 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비밀을 털어놓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 느끼지는 못할 거라는 걸. 그러면서도 결국 주인공은 힘들어하는 여자를 위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준다. 이 순간의 비통하고 헛헛한 마음은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지 않았을까? 역시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뜬구름잡는 공허한 이야기보다 이렇게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쪽에 마음이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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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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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ZOO]라는 다채롭고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모음집으로 화제가 된 오츠 이치의 데뷔작입니다. 1996년에 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이 작품을 썼을 때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열일곱 살입니다. 제가 그 나이 때는 낙서나 하고 놀았는데 번듯하게 소설을 완성해 수상까지 하고 화려하게 데뷔하다니, 하늘은 역시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 술 생각이 절로 나는군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표제작과 더불어 <유코>라는 단편이 보너스로 더 실려 있습니다만, 페이지 수가 무척 벙벙한 편집으로 220페이지라 어쩔 수 없이 본전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전혀 아깝지가 않군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 시작됩니다. 제법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아홉 살 소녀, 야요이와 사쓰키.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려보고 싶을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하지만 곧 평화는 깨집니다. 서로 좋아하는 남자애의 이름을 고백하기로 한 두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똑같이 켄이라는 열한 살 소년. 하지만 켄은 야요이의 친오빠라 맺어질 수 없습니다. 야요이는 마음놓고 켄 오빠를 좋아할 수 있는 사쓰키의 위치에 화가 나 무심결에 떠밀어버리고, 그렇게 나무 위에서 떨어진 사스키는 땅바닥 위의 바위에 부딪칩니다. 그리고 사쓰키는 죽어버렸습니다.

 

야요이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릅니다만 곧 언제나 믿음직한 켄 오빠가 나타나죠. 일단 엄마에게 알리자는 켄에게 야요이는 매달립니다. 이 사실을 엄마가 알면 분명히 슬퍼할 거라고. 켄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지만 역시나 듬직한 얼굴로 동생을 위로하며 자기가 뒷처리를 맡겠다고 나섭니다. 이제 평균연령 열 살인 남매의 대모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체를 어디에 감추어야 동생이 의심받지 않을까, 머리 좋은 켄은 지금 나이 먹은 우리가 보면 약간 어설프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머리를 짜냅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두 남매가 사쓰키의 사체를 처리하는 과정들을 지켜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정신없이 뛰어놉니다. 열일곱 살이 쓴 소설에 이렇게 몰입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죽은 사쓰키가 화자가 되어 남매를 관찰하는 시점도 무척 독특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켄 남매가 적당한 장소에 시체를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면, 곧 어른들이 의심을 해서든 우연히든 그 장소를 뒤지려 나서고, 당황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위기 상황을 모면해 또 다른 곳에 옮기고, 비슷한 일이 또 반복되고...이 절체절명의 순간들의 연속에서 나오는 긴장감은 읽는이로 하여금 잠시도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랍니다.

 

오츠 이치의 탁월함은 친구를 죽이고 그 시체를 숨기는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추억들을 환기시킨다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엄마에게 혼날 게 두려워 그 얕은 머리를 마구 굴려 어떻게든 벌을 모면하려 굴었잖아요. 예를 들어 전 벽지에 낙서를 해놓고는 잠시 뒤 혼날 게 두려워 책가방을 벽에 딱 붙여논 적이 있었습니다. 책가방만 치우면 낙서가 드러나지만 어린 제 눈에는 제게 보이지 않으면 엄마에게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죠. 오츠 이치의 남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얘들은 정말 대담하게도 시체를 자기들 방 벽장에 넣어놓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듣자니 엽기나 다름없는 무척이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죠. 하지만 그런 일을 벌인 주모자들이 단순히 벌을 피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으로 이렇게저렇게 노력하는 아이들이라니, 마치 동화를 보는 듯한 포근함까지 느껴지게 되는 것이랍니다.

 

친구에게 죽임을 당한 사쓰키가 아니라 시체를 숨기려 노력하는 남매들의 편을 들며 보게 만드는 책이라 도덕적으로는 매우 모호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쁜 짓을 한 아이들을 응원하게끔 만드는 오츠 이치의 역량만은 인정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결말에서 의외의 반전과 그 반전이 앞의 복선을 통해 충분히 공감 가게 설명된다는 것도 훌륭하고요.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이 정도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니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저는 오츠 이치를 수식하는 천재 작가라는 말에 조금의 반대도 하지 못하겠어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아마 작가들이 많았겠죠?)은 분명히 심사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갔을 겁니다. 이제 내 시대는 갔구나, 새로운 피가 나왔구나 하면서 좌절했겠죠. 저도 비슷한 심정으로 지금 맥주 캔을 땄습니다.

 

p.s/ <유코>도 흠잡을 데 없는 단편이지만 발견의 기쁨을 누리시라는 의미에서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ZOO] 역시 전체적으로 아주 우수한 작품집이니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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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7-09-06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얇은데비해 가격은 참 불친절하지요..-_-;;흣...
저도 오늘 도착했어요. 빨랑 봐야지~~~~~~>ㅅ<

하이드 2007-09-06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일곱이라는걸 감안하지 않고 봐도 훌륭한가요?

jedai2000 2007-09-0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가격이 초큼 눈물나지요 ㅎㅎ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격대비 만족스러웠어요^^

하이드님...만족도야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탁월합니다. 나이를 감안하지 않아도 구성이나 여러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아마 읽어보시면 제 말씀에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

bongbong 2008-05-2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인 데뷔작이죠..

jedai2000 2008-05-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까지 대표작인 <고쓰>가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페이퍼네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10,000히트를 얼마전 달성한 기념으로 씁니다. 자, 모두 축하의 박수. 짝짝짝짝 (혼자만 치고 있다 -_-;;)

살펴보니 알라딘에 처음 리뷰 올린 게 2005년 6월이니 어언 3년째인데 리뷰 수도 200개가 넘고 나름 충실하게 활동한 것 같네요. 서재의 많은 분들께서 찾아주셔서 오늘의 영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__)

그런데 이렇게 기쁜 순간에 이런 글 쓰게 되서 유감인데 알라딘 서재에서는 앞으로 업데이트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구요. 제가 이곳저곳 인터넷 미스터리 동호회에 글을 좀 남발하는 경향이 있어 다른 분들 보기도 그렇고 저도 좀 그래서요. 예전에는 서재에 글 올리면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서 그 이점이 컸는데, 서재 2.0으로 개편되고 나서는 그런 것도 없어졌고, 제가 네이버에 운영하는 메인 블로그와 별 차이가 없어져 굳이 두 번 올릴 필요가 있나 싶어지더라구요.

척박한 한국의 미스터리 토양에서 미스터리 소설을 융성시키자,는 아무도 맡기지 않은 일을 혼자만 신나서 주먹 불끈 쥐고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한 분에게라도 더 미스터리 소설의 맛을 소개시켜드리기 위해 꾸준히 리뷰를 써오긴 했습니다만 요즘은 워낙 이쪽 장르가 활황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됐다, 싶기도 하구요 ^^

그렇다고 아예 닫는 건 아니고, 기존에 썼던 글은 남기겠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업데이트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그래도 정말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책이나 필요한 경우(이벤트 같은 거요)에는 간혹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리뷰를 그만 쓰려는 건 절대 아니구요. 미스터리계의 구도자로 꾸준히 열심히 쓰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가끔 궁금하시거나 그러시면 제 네이버 블로그 '그냥 그런 이야기'로 와주세요. 주소는 http://blog.naver.com/jedai3000 랍니다 (홍보해주는 센스 ㅎㅎ)

보통 하루에 10분 미만 들러주셨는데 요즘 같은 경우는 30분 정도로 늘어서 사실 섭섭한 마음이 크지만 그래도 다른 이웃님 서재는 자주 들르겠습니다.

그동안 제 서재에 한번이라도 찾아오셔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사드리구요. 미스터리 사랑 변하시면 안 되요 ^^ 그럼 자주 뵙겠습니다. 행복한 가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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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7-08-2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쉽습니다!!!!(...라고 말해도 다른 곳에서 또 뵙겠네요..^^흐흣...)

라로 2007-08-24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짝짝짝...새내기로서..ㅎㅎ
제다이시군요~.ㅎㅎ
그래도 가끔 알라딘에서도 읽게 해주실거죵?

Mephistopheles 2007-08-24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 박수치다가...다음글 읽고 안돼! 해버렸습니다.^^
어찌되었던 다른 곳 주소도 공개하셨으니 아쉬우면 그쪽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마늘빵 2007-08-2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

보석 2007-08-2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네요..

레몬향기 2007-08-24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다이님이 알라딘을 떠나시면.. ㅠㅠ
이제 블로그로 찾아가야하겠군요~

jedai2000 2007-08-2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그러게요 ^^ 여러 곳에서 자주 뵙겠죠. 그래서 저도 고민입니다. 이제 블로그만 꾸리고 싶은데 여러 군데 발 걸쳐놓은 곳이 많아서 말이죠 ^^

나비님...예, 반갑습니다. 새내기시지만 저처럼 3년 걸려서 1만 히트 만들지 마시구, 3개월 만에 만드시길 ^^ 예, 물론입니다. 가끔 글 올릴게요 ^^

메피스토펠레스님...아, 감사합니다. 박수도 쳐주시고, 안돼!도 해주셔서요 ^^ 예전부터 자주 메피님 서재를 몰래 드나들었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나누고, 정리할 때 되서야 인사드려 섭섭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고맙습니다 (__)

jedai2000 2007-08-24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엄..청 잘 됐다, 뭐 이런 건 아니죠 ^^ 자주 찾아주셔서 감사했어요. ^^

보석님...저도 무척 아쉽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가뵐게요, 보석님 ^^

적님...그렇죠, 제 블로그에 자주자주 놀러오세요. 부산 아직도 덥죠? 남친과 함께 즐거운 방학 마감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