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ZOO]라는 다채롭고 독특한 단편들이 수록된 모음집으로 화제가 된 오츠 이치의 데뷔작입니다. 1996년에 공모전에서 대상을 탄 이 작품을 썼을 때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열일곱 살입니다. 제가 그 나이 때는 낙서나 하고 놀았는데 번듯하게 소설을 완성해 수상까지 하고 화려하게 데뷔하다니, 하늘은 역시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 술 생각이 절로 나는군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표제작과 더불어 <유코>라는 단편이 보너스로 더 실려 있습니다만, 페이지 수가 무척 벙벙한 편집으로 220페이지라 어쩔 수 없이 본전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전혀 아깝지가 않군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한 여름 무더위 속에서 시작됩니다. 제법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아홉 살 소녀, 야요이와 사쓰키.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려보고 싶을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하지만 곧 평화는 깨집니다. 서로 좋아하는 남자애의 이름을 고백하기로 한 두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똑같이 켄이라는 열한 살 소년. 하지만 켄은 야요이의 친오빠라 맺어질 수 없습니다. 야요이는 마음놓고 켄 오빠를 좋아할 수 있는 사쓰키의 위치에 화가 나 무심결에 떠밀어버리고, 그렇게 나무 위에서 떨어진 사스키는 땅바닥 위의 바위에 부딪칩니다. 그리고 사쓰키는 죽어버렸습니다.

 

야요이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릅니다만 곧 언제나 믿음직한 켄 오빠가 나타나죠. 일단 엄마에게 알리자는 켄에게 야요이는 매달립니다. 이 사실을 엄마가 알면 분명히 슬퍼할 거라고. 켄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지만 역시나 듬직한 얼굴로 동생을 위로하며 자기가 뒷처리를 맡겠다고 나섭니다. 이제 평균연령 열 살인 남매의 대모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시체를 어디에 감추어야 동생이 의심받지 않을까, 머리 좋은 켄은 지금 나이 먹은 우리가 보면 약간 어설프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머리를 짜냅니다.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두 남매가 사쓰키의 사체를 처리하는 과정들을 지켜보면 가슴이 콩닥콩닥 정신없이 뛰어놉니다. 열일곱 살이 쓴 소설에 이렇게 몰입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죽은 사쓰키가 화자가 되어 남매를 관찰하는 시점도 무척 독특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켄 남매가 적당한 장소에 시체를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안심하면, 곧 어른들이 의심을 해서든 우연히든 그 장소를 뒤지려 나서고, 당황한 아이들은 어떻게든 위기 상황을 모면해 또 다른 곳에 옮기고, 비슷한 일이 또 반복되고...이 절체절명의 순간들의 연속에서 나오는 긴장감은 읽는이로 하여금 잠시도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정도랍니다.

 

오츠 이치의 탁월함은 친구를 죽이고 그 시체를 숨기는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추억들을 환기시킨다는 데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엄마에게 혼날 게 두려워 그 얕은 머리를 마구 굴려 어떻게든 벌을 모면하려 굴었잖아요. 예를 들어 전 벽지에 낙서를 해놓고는 잠시 뒤 혼날 게 두려워 책가방을 벽에 딱 붙여논 적이 있었습니다. 책가방만 치우면 낙서가 드러나지만 어린 제 눈에는 제게 보이지 않으면 엄마에게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죠. 오츠 이치의 남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얘들은 정말 대담하게도 시체를 자기들 방 벽장에 넣어놓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듣자니 엽기나 다름없는 무척이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죠. 하지만 그런 일을 벌인 주모자들이 단순히 벌을 피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으로 이렇게저렇게 노력하는 아이들이라니, 마치 동화를 보는 듯한 포근함까지 느껴지게 되는 것이랍니다.

 

친구에게 죽임을 당한 사쓰키가 아니라 시체를 숨기려 노력하는 남매들의 편을 들며 보게 만드는 책이라 도덕적으로는 매우 모호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나쁜 짓을 한 아이들을 응원하게끔 만드는 오츠 이치의 역량만은 인정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결말에서 의외의 반전과 그 반전이 앞의 복선을 통해 충분히 공감 가게 설명된다는 것도 훌륭하고요.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이 정도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니 그야말로 대단합니다. 저는 오츠 이치를 수식하는 천재 작가라는 말에 조금의 반대도 하지 못하겠어요.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심사했던 심사위원들(아마 작가들이 많았겠죠?)은 분명히 심사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갔을 겁니다. 이제 내 시대는 갔구나, 새로운 피가 나왔구나 하면서 좌절했겠죠. 저도 비슷한 심정으로 지금 맥주 캔을 땄습니다.

 

p.s/ <유코>도 흠잡을 데 없는 단편이지만 발견의 기쁨을 누리시라는 의미에서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ZOO] 역시 전체적으로 아주 우수한 작품집이니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pple 2007-09-06 0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얇은데비해 가격은 참 불친절하지요..-_-;;흣...
저도 오늘 도착했어요. 빨랑 봐야지~~~~~~>ㅅ<

하이드 2007-09-06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일곱이라는걸 감안하지 않고 봐도 훌륭한가요?

jedai2000 2007-09-06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가격이 초큼 눈물나지요 ㅎㅎ 하지만 결과적으로 가격대비 만족스러웠어요^^

하이드님...만족도야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탁월합니다. 나이를 감안하지 않아도 구성이나 여러 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아마 읽어보시면 제 말씀에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

bongbong 2008-05-2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상적인 데뷔작이죠..

jedai2000 2008-05-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까지 대표작인 <고쓰>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