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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학창시절에 누구나 가장 꿈꾸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 예쁜 교생 선생님과 연애를 해보고 싶다거나, 교내 농구대회에서 역전의 3점슛으로 스타가 되는 것도 있을 테고, 전교 1등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상을 받는다거나 하는 다양한 꿈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통쾌하고 짜릿한 건 역시 시험 전날 남들은 다 어렵게 공부하는데 몰래 답안지를 훔쳐내어 간단히 100점을 맞는 것일게다. 솔직히 이런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도 시험 전날 외워도 외워도 머릿속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물리 공식이나 국사 연대기 등에 혼절 직전의 상태가 되어 아, 시험지 훔치고 싶다 하는 공상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이런 멋진(?) 계획을 실제로 실행에 옮긴 세 명의 악동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생님들도 포기한 문제아 기타, 조지로, 다치바나였다. 어차피 대학도 포기했고, 성적 잘 받아봐야 써먹을 데도 없지만 얄미운 선생님들도 골려주고 졸업 직전 마지막 추억을 만든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그 이름도 멋진 '루팡 작전'을 짜낸다. 시험지가 어디 잠들어 있는지는 이미 파악됐다. 교장실 안에 있는 육중한 철제금고에 있다. 세 악동은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 침투 계획을 세우고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무사히 잠입해, 보아둔 열쇠로 금고를 열고 시험지를 사뿐하게 가져가려는데, 글쎄 금고 안에 시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살펴보니 영어를 담당하는 글래머 선생님이다. 그들은 시험지고 뭐고 그냥 금고를 닿고 도망쳐 나오는데,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시체는 옥상 밑 화단에서 발견된 것이 아닌가.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어 의혹은 깊어져가지만,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흘러 사건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풍화되고 만다. 그런데 15년 후 어느 날 시효를 하루 앞두고 경찰 측에 의문의 제보가 들어간다. 여선생님은 사실 살해됐고, 비밀은 루팡 작전 안에 있다고.
이미 3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요코야마 히데오의 처녀작이다. 사실은 미스터리 소설 공모전에서 가작을 수상했지만 책으로 나오지는 못한 작품을 유명작가가 되고 나서 개작한 것이라 하는데, 요코야마 팬들에게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환상의 처녀작'을 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어 제법 화제가 됐다 한다. 우리나라에서 요코야마 히데오는 초반부, 중반부까지는 신필이지만, 결말에서 작위적인 감동을 강조하는 신파극으로 돌변하는 약점만이 크게 부각되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요코야마 히데오 열성팬의 입장에서 이런 세평이 약간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도 생각한다(만약 <클라이머즈 하이>의 종반부에서까지 앞부분의 박력과 재미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일본 미스터리 올타임 베스트 1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루팡의 소식>은 그런 약점을 상당히 뛰어넘고 있어 누가 봐도 만족스러울 것이다.
간략히 소개한 줄거리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아마도 요코야마 히데오는 미스터리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루팡의 소식>을 준비할 때, 기존에 유행했던 본격 미스터리 작품들을 참조한 듯 기본적으로 본격 미스터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금고에 있던 시체가 화단 아래로 이동한다는 플롯 자체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 15년 전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현재 관계자들의 진술을 통해 하나씩 퍼즐이 맞춰져가는 짜릿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특유의 작풍-개작할 때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강했을 듯-도 여전하여, 시효를 하루로 설정해 24시간 안에 사건을 풀어야 한다는 긴박감이 출중하며,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들은 때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며 부대끼는가 하면, 상대의 실력에 감복하고 우정을 확인하는 등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조직 사회의 진면목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요코야마 작품에서 볼 수 없는 청춘소설의 분위기도 있어, 세 악동들의 난장짓은 가네시로 가즈키의 '좀비스'나 무라카미 류의 <69>에 나오는 청춘들을 연상시킬 정도다. 15년의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세 악동의 현재의 모습은 꿈많았던 학창시절을 통과해 어느덧 세상의 때가 묻은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켜 이루 말할 수 없는 소회를 주며, 그 중 한 명인 다치바나가 세상과 손을 끊고 말을 잊은 채 노숙자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밝혀지는 결말부에서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런데 미스터리의 면에서는 한 가지 이상 설명이 부족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고, 아마도 개작하면서 첨가되었을 거라 보이는 반전에서 사건의 진짜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이 좀 뜬금없고 그동안 유지되었던 작품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옥의 티가 되는 것같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모든 기준을 통과한 아주 우수한 미스터리 대중소설로 이 책이야말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진가를 우리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는데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