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에 사로잡힘으로써 건전한 의미에서 우리는 미칠 수가 있다. 정신의 의식적인 노력으로써 행위와 행위의 결과에서 초연할 수가 있으며,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두 급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쳐가게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자연에 빠진 것은 아니다. 나는 냇물에 뜬 유목(流木)일 수도 있고, 하늘에서 그 유목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타라˚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나와 좀더 깊은 관계가 있는 실제 시건에는 감동받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인간적 실재로서, 다시 말해서 사상과 감정이 일어나는 장소로서만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타인에게서만큼이나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이중성을 느낀다. 경험이 아무리 강렬할 때라도 나는 마치 나의 일부가 아닌 듯한 관객의 존재를, 그 관객의 비판을 의식하고 있다. 그 관객은 함께 경험하지 않으면서 그 사건에 주목하는데,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타자인 것이다. 인생이라는 연극(그것은 비극이 될 수도 있다)이 끝나면 관객은 제 갈길로 간다. 그에게는 그 연극이 하나의 허구이며 상상에서 나온 작품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중성만으로도 우리는 쉽사리 형편없는 이웃이며 친구가 될 수 있다.
나는 보다 많은 시간을 혼자 지내는 일이 유익함을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상대라도 함께 있으면 이내 싫증이 나고 좋아하는 감정도 식게 마련이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고독만큼 상대하기 좋은 친구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대부분 방에 박혀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섞일 때 훨씬 외로움을 느낀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늘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독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하 생략)
인타라 - 우뢰나 비를 주관하는 베다교의 주신으로, 불교에서는 제석천에 해당됨.
(163~164쪽. 고독에서 부분 발췌.)
월든
- 작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출판
- 소담출판사
- 발매
- 200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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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을 함으로써 우리는 건전한 의미의 열광 속에 빠질 수 있다. 마음의 의식적인 노력으로 우리는 행위들과 그 결과들로부터 초연하게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만사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격류처럼 우리의 옆을 지나치게 된다.
우리는 자연 속에 전적으로 몰입되어 있지 않다. 나는 시냇물에 흘러가는 나무토막일 수도 있고, 또는 하늘에서 그 나무토막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드라 신°일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연극 공연에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나와 훨씬 더 이해 관계가 있을지 모르는 실제 사건에 그다지 감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인간적 실재로서만, 다시 말하면 여러 가지 사고와 감정의 장소로서만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 나 자신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끼고 있다.
나의 경험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나는 나의 일부분이면서 나의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나의 경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단지 방관자로서 메모를 하고 있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 부분은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제삼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인생의 연극(그것은 비극일 수도 있겠는데)이 끝나면 그 관객은 제 갈길을 가 버린다. 그 관객에 관한 한 그 인생극은 일종의 허구이며 상상의 작품일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종종 우리를 변변찮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심신에 좋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같이 있으면 곧 싫증이 나고 주의가 산만해진다. 나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방 안에 홀로 있을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닐 때 더 고독하다. 사색하는 사람이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지 항상 혼자이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의 동료들 사이에 놓인 거리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하 생략)
인드라 신_힌두교 신 중 하나로 공기,눈, 비, 바람과 천둥을 다스린다.
(193~194쪽. 고독에서 부분 발췌.)
월든
- 작가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출판
- 이레
- 발매
- 200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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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한자씩 키보드로 두드리다 보니 느낌이 다르다. 이것은 마치 필사를 하며 발견하는 놀라움과 비슷하다. 빠른 타수를 자랑하는 손놀림이 저절로 느려진다. 천천히 한자 한자 꾹꾹 눌러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시간은 한정적이고 내가 할 일은 많기에 옮겨 적는 시간이나마 줄이려고 자판 위로 손가락이 날아다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인정한다.
그리고 역시 두 출판사 비교는 아니지만 번역자에 따라 달라짐을 확연하게 느낀다. 간결하게 작가의 글을 번역해서 옮기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번역자들에게 박수를. 아울러 솔직히 말하자면 두 책도 이번 부분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다. 읽기에 말이다. 원서를 보지 않았기에 또 원서를 사더라도 이들보다 더 잘 할 자신도 없다.
우리가 읽는 모든 번역문학 아니 모든 모국어가 아닌 글은 이럴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취할 수 있는 게 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번역자들에게 빚지고 있으니 감사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