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든가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곳은 내게 오로지 기억, 기억, 그렇게 속삭이는 장소가 되었다. 천천히 술을 마시다보면 홀연,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듯, 기억 속의 내가 뭣도 모르고 살아온 모양이 환등처럼 떠오른다.
(47쪽, 사랑을 믿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80쪽, 사랑을 믿다)
권여선의 단편집과 만났다. 첫 단편을 읽고 나서 드는 일차적 느낌은 아~ 인간이란 이다지도...
계속 읽으며 느낀 점은 묘한 작가로구나. 흡입력이나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운이 길구나 싶었다.
기억과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단편들이었다.
사랑을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에 포함된 기억과 관계의 끈을 그려보는 것이다.
삶에서 이 부분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이 작가 기억해두고 싶다.
기억에 아무 흔적도 남지기 않은 그 많은 시간 속에서, 아둔하고 자존감만 높았던 나는,
나만 모르는 장소에서 나만 모르는 얼마나 많은 수치스런 행위와 제멋대로의 오해를
반복했던 것일까. (…중략…)
무언가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118쪽, 내 정원의 붉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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