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이 읽고픈 날이다.
신앙을, 신념을 이야기하는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골랐다.
우습게도 나 스스로의 신앙은 늘 불편했다.
예수와 마지막을 함께한 강도는(아마도 현재의 테러리스트같은 사상범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순간 회개를 하고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 된다.
이런 넉넉한 용서가 불편하다.
주말 예배당에 들어가 한판 굿판을 벌이고 털어버린 것들엔 평생 마주해야할 과오가 얼마든지 있을게 아닌가.
가끔 영화 밀양을 생각한다. 자식을 죽인 범인을 종교의 힘으로 용서하러 어미는 교도소로 간다. 그런데 이 범인은 이미 자신은 회개하여 신앞에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 어미의 용서따위는 필요치않다. 어미는 자식을 잃고 지옥같은 삶을 견디는데 살인범은 신의 은총으로 평온한 눈으로 그녀를 본다. 제기랄.
첫번째 이야기속 사내는 아내와 아이를 잃고 뒤로 걷는다. 운명에 대한 반발로 뒤로 걷는다. 그것밖에 할 수 없으니까. 차로 한아이를 치어죽인 끝에 엉망으로 망가진 그는 도와달라며 신부를 부른다. 두번째 이야기속 사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엉망으로 망가져있다. 그러나 그가 알지못할뿐 흐느끼는 그의 바로 문밖에 그의 동료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 세번째 그도 사랑하는 자를 잃고 우연히 만난 유인원과 함께 지내기 위해 부모님의 고향인 먼 이국의 촌락에 머문다. 그들은 함께 일상을 나누고 아름다운 것들을 본다.
밀양 속 그녀가 이야기 속 그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그저 곁에 있어주는 소소한 존재들이다. 마지막 순간 잡아준 손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 군중에 의해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자기 옆 죄수의 평온을 기려줬다는 예수를, 누군가의 곁에 있어줄 별볼일 없는 우리 속에서 나는 본다.
그러다보니 온갖 종교적 냉소를 즐기면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여전히 신앙인으로 남았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 - 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158-9쪽‘
한해동안 함께여서 버틸만 했어요.
모두 무탈한 새해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