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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 대한 고백


복효근


때 절은 몸빼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가
뼈 속 절절히 아름다웠다고 느낀 것은
내가 내 딸에게
아저씨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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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눈썹 밑 그 깊은 빛

                                                             안도현(시인)

복효근 시인을 생각하면 한 가지 꼭 찔리는 게 있다. 나는 복효근 앞에 서면, 천년만년 살고 지고 어쩌고 하면서 손가락 걸고 맹세하던 언약을 팽개치고 돌아앉은 사내의 심정이 된다. 복효근은 지금도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있는데, 나는 귀를 틀어막고 혼자 학교 바깥으로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배신을 '때린' 것이다.

10년 전쯤, 일찍이 우리에게 시를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땅의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정체가 드러나 학교에서 쫓겨난 해직 교사였고, 복효근은 정체를 숨기고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하던 현직 교사였다. 1989년 여름에 천오백명이 넘는 교사가 해직을 당했을 때, '잘린' 선생님들과 현직에 남아 있던 선생님들의 관계는 아주 미묘했다. 그것은 밥그릇을 빼앗긴 해직 교사들의 현실적인 아픔보다는 현장에 남아 있던 교사들의 상실감과 자괴감이 훨씬 더 농도가 짙었기 때문이다. 웃통을 벗어제치고 싸움을 하는 사람과 장갑 속에 주먹을 숨기고 싸움을 해야 하는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치 비밀 결사대와도 같은 비장한 자세로 만나곤 했다. 누군가는 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시선을 모았고, 누군가는 시급한 문예운동의 방향과 구체적인 일거리를 제시했고, 또 누군가는 밤을 새워가며 토론에 열을 올렸고, 그리고 새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술을 마셨다.

인천에서 왔다는, 구레나룻의 인상적인 선생님이 그때 있었다. 복효근이었다. 그는 내 시를 많이 읽었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무렵에 '시'보다는 '삶' 쪽에 더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있었다. 시는 그저 남루하고 허약해 보일 뿐이었다. 좀더 나은 삶,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하는 삶이 더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했다. 시와 삶의 일치를 꿈꾸는 일은 우리들의 숙원 같은 것이었으나, 그것도 다만 꿈일 뿐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복효근의 세 번째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은 일상적 삶에 의문부호를 던짐으로 해서 반성적 성찰에 이르는 시들이 그득히 들어 있다. 시가 반성의 양식이라는 고전적 명제에 충실히 응답하면서 독자를 또다른 깨달음의 공간으로 데려가는 기법이 이번 시집에서는 유난히 돋보인다. "제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비누에 대한 비유」) 비누를 보면서 온전한 사랑을 떠올리는 시인은 얼마나 성실하고 진지한가? 새로 이사간 아파트의 변기에 앉아 "나의 천장은 또 누구의 바닥이었구나"(「소리 세례」)하고 이마를 치는 시인은 얼마나 착한가?

이렇듯 내가 아는 복효근은 성실하고 진지하고 착한 시인이다. 한 시인을 성실하고 진지하고 착하다는 형용으로 표현하는 일이 썩 합당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부정정신의 소유자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이 세계와의 한판 대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게으르고,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삐딱하기도 해야 하는 사람이 시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성실하고 진지하고 착한 시인이라고 말해야겠다. 그것을 뭉뚱그려 진정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면, 복효근의 진정성은 자신의 과오까지 드러낼 줄 아는 솔직함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때 절은 몸빼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어머니에 대한 고백」)은 시인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복효근 시인이 부친상을 당했을 때 남원 대산면에 있는 그의 고향집에 간 적이 있다. 나는 거기 가서 문상도 문상이지만 그의 고향집 흙담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든 그 야트막한 흙담이 한 시인의 영혼을 오랫동안 껴안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흙담을 두른 고향집이 없는 내 영혼이 불쌍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다음과 같은 시에는 고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세계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전문

토란잎과 그 위에서 구르는 물방울의 관계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 놓은 시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토란잎도 둥글고 물방울도 둥글다. 너도 둥글고 나도 둥글다. 서로 둥글다는 것은 둘 사이에 갈등의 요소가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갈등이 없다고 처음부터 긴장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내가 너의 몸에 가 박혀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되기 전에 나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물방울 같은 존재다. 내가 머물렀던 그 자취를 굳이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면 안되나? 여기에서 자취라는 말은 그 형상이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아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무형의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형상과 무형 사이의 아슬아슬한 거리가 이 시를 빼어난 연애시로 끌어올린다.

「탱자나무 생울타리 지날 때」라는 시에서 "탱자나무 생울타리 그것은/ 아주 안 보여주지는 않고/ 다 보여주지도 않아서."와 같은 범상치 않은 발견도 그 아슬아슬한 거리의 긴장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 예라 할 수 있겠다.

복효근의 세 번째 시집을 읽은 주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복효근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나도 동감이다. 이전의 작품들은 시의 숙성의 편차가 좀 심했던 게 사실이다. 너무 익어버린 시와 풋것 그대로의 시가 한 솥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새에 대한 반성문』은 그런 우려를 말끔히 벗어던진 좋은 시집이다. 시인은 생태학적 상상력과 불교적 사유를 배경으로 시적 자아의 보폭과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세속을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세속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자아가 부단히 자기 성찰을 행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빛나는 시들을 낳는다.

짐작컨대 앞으로 복효근 시인은 종교의 신성함과 문학의 '건달끼' 사이에서 또 다른 방황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상당수의 시편들이 불교 용어를 차용하고 있는 점, 반성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종교로 귀결된다는 점을 여기쯤서 한 번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나는 복효근을 좀 안다. 그는 친구 같은 아내 김연경 선생과 절집을 자주 찾아 가기는 하지만 "네 속눈썹 밑/ 그 깊은 빛 몇 천리"도 사랑할 줄 아는 시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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