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질문합니다.
사람이 왜 사람을 왜 죽이면 안되나요?
마약하는 게 뭐가 나빠요?
인간이 지금 건설한 사회도 약육강식이지 않나요?
일전에 읽은 [은하철도의 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신사과 두아이가 철도에 오릅니다. 이 철도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철도입니다. 신사가 두 아이와 함께 이 철도에 오르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합니다. 배가 좌초됩니다. 아이 부모에게 아이를 데려다 주기 위해 배를 탄 신사는 아이들이라도 구조보트에 태워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청년의 앞에 무수한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태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수라장이지요. 신사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아이들을 태우기보다 기독교인답게 기도하며 아이들과 하늘나라로 가기로 합니다.
이 이야기가 종교의 기능에 대한 답하나를 제게 주었습니다. 종교란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해 긴 시간 연구해 내놓은 답중 하나구나. 이걸 가지면 인생이 주는 많은 난제에 즉각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답하나를 가지겠구나.
진흙탕 속에 평생 살아야하는 사람에게 저 하늘의 별이 있다는 걸 아는게, 살면서 때로 하늘의 별을 보는게 행복일까요? 루쉰이 물었습니다. 냄비속 개구리에게 우리가 냄비속에 있고 탈출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없다'고 말해주는게 낫을까요? 아니면 그대로 두고 남은 시간이남아 편안히 살게 하는게 좋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오늘 이 새벽에 문득 명확하게 떠올랐습니다. 하늘의 별이 있음을 아는 것, 매우 적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이루지못할 꿈이라도 가슴에 품고 사는 것도 그런 꿈조차 가지지 못한 것보다 무척 행복한 것이라고. 오늘 내가 건네는 말한마디, 하나의 결정, 하나의 깨달음이 나의 삶의 태도고 삶의 의미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우 속에, 티브이 속에 그 무수한 '외롭다'는 외침을 봅니다. [아리랑]의 김산이 그 허무해 보이는 삶이, 꽃같은 목숨을 그저 놓아버리는 이 땅의 젊음에게 말을 하는 듯 합니다. 무수한 손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나역시 무모한 꿈을 품은 한사람으로 닿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기 외로운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봅니다.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라 - 안토니오 그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