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챈스일병의 귀환 이라는 영화를 티브이로 본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이라크에서 죽은 챈스 일병의 유해를 부모에게 보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웅적으로 살았다는 챈스일병의 생애, 전장에서 남의 가장을 죽이는 것이 영웅이고, 그것이 정의라는 것은 늘 슬프다. 그저 가족 곁에 머무는 것이, 이웃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정의일 수는 없는가.
오후에는 자기 동생과 자기 자식까지 죽였다는 마녀 메데이아의 신화를 새롭게 쓴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을 홍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창가자리에 앉아 에딩거 생맥에 치즈 한조각을 곁들여 읽는다. 해가 질때까지 바람이 잘 통하는 그 곳은 내집보다 몇 배 나은 독서의 장소다.
메데이아, 동정심 많고 아름답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그녀는 어떻게 마녀가 되었을까? 남자만이 생각을 할 수 있는 세상에 '여자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뛰어난 지도력을 가졌다는 것은 충분히 제거 되어야 할 일이다.
황금의 욕망에 미친 도시에서 '왕이 국가의 보물인 우리의 황금을 상업을 진흥시키고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고를 덜어 주는데 사용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는 그 무엇보다 위험하다. 우리 사회에도 23살 간첩은 살인죄인 보다 큰 죄로 삼십여년을 깜빵에서 보내야 하고, 제자를 성추행한 스승은 한달 견책인데 민주노동당에 겨우 만원을 후원한 교사는 파면이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메데이야는 마녀로 몰려야 하고, 첸스 일병은 목숨을 잃어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적을 만들어 내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내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게 한다. 살인 죄인의 공모자로 입을 다물고 우리에겐 죄가 없는 척 한다. 이 공모는 끊임없는 미묘한 공포 속으로 서로를 몰아가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없게 한다.
어찌 보면 이성도 그 무엇도 아닌 벗어날 수 없는 법칙 속에 돌아가는 듯한 이 놈의 세상, 어찌하면 이 남자들을 그들의 여자곁에 머물게 할 것인가.
그가 나의 전 재산을 앗아 갔다.
나의 웃음, 나의 애정,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
나의 동정심, 도와줄 수 있는 마음, 동물적인 본능,
밝은 미소, 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말살시켜서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프란차-단상]에서 (메데이아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