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나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결코요. 나는 조국 프랑스에 대해 아무런 의무나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결코요. (중략)어짜피 우리는 그저 지구에 잠시 체류하는 것 아니던가요. 나는 이 점을 현재 완벽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뿌리도 내리지 못했고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요컨대 우리의 존재방식은 나무들의 존재방식과는 다릅니다. (중략) 우리는 오히려 공중으로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그 돌멩이만큼이나 우리도 자유롭습니다. 좋은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의 모습은 어느 정도 혜성들과 닮았을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내가 방금 한 말이 조금은 서글프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불행히도 살아가면서 어느 정도는 내가 호텔에 머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방을 비울 것'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엘벡의 편지)-146쪽
한 번 본 적도 없는데 마치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을 상대하기라도 하는 양 서로에게 달려드는 이 사람들을 보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우엘벡의 편지 : 사랑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언급)-185쪽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리스적 사유,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유는 자유의지에 대한 성찰에 대단한 효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신컨대 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빚었다는, 따라서 인간은 침범할 수 없는 존재라는 아주 대담한 기독교적 가정이 없었다면 아마 인권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레비의 편지)-203쪽
나는 항상 철학적 불확실성이라는 같은 지점에 다시 서곤 합니다. 그럼 요약해보겠습니다. 인간의 권리, 인간의 존엄성, 정치의 기반, 이 모든 것을 나는 내동댕이쳤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요구들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도 없습니다. 어떠한 장치도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명확하게 판별한 '연민'이라고 하는 사실상 유일한 것이 말입니다. 이 개념은 쇼펜하우어로부터는 정당한 찬양르 받았지만, 니체에게서는 모든 도덕의 근원으로 조롱당했습니다. 나는 당연히 쇼펜하우어의 편입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이 개념을 바탕으로 결코 성도덕을 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됩니다.
(우엘벡의 편지)-213쪽
친애하는 베르나르 앙리, 앞의 편지에서 당신은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 불만스럽다고 했죠.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질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유머를 구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실질적인 감정을 느끼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일종의 '힘의 묘기', 절망이나 분노 가운데 하나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우아한 모습을 한 노예가 벌이는 재주겠죠. 그렇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오늘날 유머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엘벡의 편지)-286쪽
내가 기억하는 한, 어쨌든 청소년 시절 이후로 기억하는 한, 인생에 있어서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은 딱 두개였습니다. 세 개도, 네 개도 아니고, 딱 두개 말입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랑, 여자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또하나는 '글쓰기'입니다. 언어를 다루는 작업대에서 언어를 반죽하고, 그것에 형식을 부여하고, 작은 기호들의 기둥들을 세우면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낮을 보내고, 또 많은 밤을 지새우는 것을 말하죠.
(레비의 편지)-299쪽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유라는 것, 그러니까 사유와 진리의 재료라는 면에서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언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철학자란 '자, 보아라, 나는 사유한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만 남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보면, 대부분은 그 반대입니다. 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언어이지, 개념이 언어를 끌어내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정확한 사유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언어의 작업이 이루어지는 틈새, 빈터, 빛의 화살 속입니다!
(레비의 편지)-301쪽
나는 1998년 9월에 유명해졌습니다. 인세가 들어오면서 나는 1999년 5월에 부자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넉넉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것이 부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이점입니다.
(우엘벡의 편지 : 소립자가 출간된 이후의 일을 말하면서)-321쪽
(전략)유럽에서 포르투갈 공산당과 더불어 최악의 당이었던 자신의 당, 곧 프랑스 공산당에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아라공과 같은 지식인을 앞에 두고 말입니다. 나는 아라공에게 그처럼 추했던 충성심에 대해 따져 물었습니다. 당원들을 실망시켰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아라공은 나에게 전혀 예기치 않았던 답, 하지만 아주 멋지고 기이한 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자기가 프랑스 공산당에서 기대했던 것은 '명예로운 퇴조'였다고 말입니다.
(레비의 편지)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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