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그녀의 완벽한 하루
그녀의 완벽한 하루
채민 글.그림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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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2 최영미

다음역은 신림 新林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옳은 쪽입니다.
다음 역은...
안내방송이 이바구하는데 문득 나는
굳게 다문 왼쪽 입口로 나가고 싶어졌다

한번 그렇게 생각을 만드니
생각이 어설픈 욕망으로
욕망이 확실한 신념으로
휙휙 건너뛰는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아가는 고개, 되돌리려는 아침

지각 10분 전, 5분 전, 아아 1분 전,
얼굴 없는 시간에 쫓겨
헤어무쓰 땀내 방귀 정액의 끈끈한
주소 없는 냄새들에 떠밀려
이리 흔들 저리 뒤뚱
그래도 악! 생각할 한뼘 공간 찾아
두 눈 흡뜨고 아둥바둥 무게 잡는

나 혼자만 유배된 게 아닐까
지상에서 지하로
지옥철로 외로이 밀려난 게 아닐까
이런 의심 날마다 출근하듯 밥 먹듯 가볍게 해치우며
가볍게 잊어버리며

철커덕,

다음 역은 신림 新林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옳은 쪽입니다
다음 역은......-79쪽

삼십세 최승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내 꿈은 말이야, 위장에서 암세포가 싹트고
장가가는 거야, 간장에서 독이 반짝 눈뜬다.
두 눈구멍에 죽음의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피는 젤리 손톱은 톱밥 머리칼은 철사
끝없는 광물질의 안개를 뚫고
몸뚱어리 없는 그림자가 나아가고
이제 새로 꿀 꿈이 없는 새들은
추억의 골고다로 날아가 뼈를 묻고
흰 손수건이 떨어뜨려지고
부릅뜬 흰자위가 감긴다.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95쪽

세상을 빠져나가기에 가장 행복한 때 신현림

나는 어떻게 될까
내년이면 내후년 십년 후면... 살아 있을까
결혼과 아이라는 참호 속에 기쁘게 처박혔을까
우주의 그 단순한 요구를 따르기엔
그것이 진정 희망이 되기엔
미래가 너무 암담하다 빙벽의 의식은 깨지지 않고
휴식도 혁명도 없이 나날의 영구차에 실려
나의 나, 나의 당신은 붕괴되고 있다
우리가 기댄 의자가 썩어가고
동판처럼 빛나던 당신 얼굴이 두려움으로 부식되고 있다
영화[그날 이후]처럼 종말이 오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는 종말감에 감염되고
잔혹한 희망은 우리의 피를 비워버린다

(중략)

바다의 수술실을 떠나는 기차표가 밥보다 고마운 때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
세상을 빠져나가기에 가장 행복한 때다-151쪽

28년을 가난하게 살아왔다
한번도 풍족하게 뭔가를 누려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하늘을 원망하거나 부모를 미워해본 적도 없다.

난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 익숙하고, 그런 삶을 사는 나에게 익숙했다.
다만 예측하지 못한 것은...
가난한 나의 삶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작년보다 올해가 나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쁘다.
매일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뭣보다 가장 나쁜 것은...
빚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보다 빚을 갚고 난 뒤의 삶에도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또다른 가난... 또다른 빚...
죽을 때까지 끝없을 비참함.

단지 살아 있기 위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버둥거려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끝없는 비참함보다 비참한 끝을 보는 편이 낫다.
이제 그만, 여기까지.
-157~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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