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절판


2세대 여성주의자는 인간 주체의 자주성이나 주권 같은 개념이 타자와의 관계 혹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한계를 갖는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은 억압적 주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주체와 다른, 여성성 혹은 타자성 안에 머물고자 했다. 그들은 인간 주체가 되어 타자를 억압하고 희생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여성적 타자성 혹은 타자 관련성 속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로 남는 것이 낫다고 보았다.-49쪽

여성은 자신의 노동의 수혜자인 가족이 실제로는 자신의 노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여성은 자신이 대타적이면서도 대자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이후에 여성은 타자가 요구하는 것을 자신도 요구하는 상호 인정을 원한다.-53쪽

즉 인간은 타인과 다른 욕망, 생각을 가지는 대자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타자에 의해 그러한 차이를 인정받고자 한다는 점에서 대타적인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3세대 여성주의자는 바로 이러한 상호 인정의 원리를 규범적 정체성을 위한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53~54쪽

철학적 전통 내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존중되고 인정된다. 잔다르크 역시 이러한 인간이 되고자 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한 채 무시당하는 여성이 아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치마를 벗고 바지를 입어야 했는가?-63쪽

함께 놀고 있는 네살배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놀이를 하기를 원한다. 여자 아이는 '옆집 이웃 놀이'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남자 아이는 '해적 놀이'를 하고 싶다고 한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이러한 딜레마의 상황에서 여자 아이는 "좋아, 그럼 너는 우리 옆집에 사는 해적이 되는 거야"라고 제안한다. 남자 아이는 놀이를 조합하는 여자 아이의 포괄적 해결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각각의 놀이를 일정한 시간 동안 차례로 하고 놀자는 공평한 해결방식을 제시한다.-88쪽

남자아이에 의해 수행되는 타자 존중이 타자와의 진정한 '상호 작용'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남자 아이는 동일한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오직 기존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뿐이다. (중략)자신과 타자의 동일성을 상호 인정하는 정의의 윤리 안에서 남자 아이는 자신과 동일한 여자 아이의 권리만 의무론적으로 인정할 뿐 자신과 다른 여자 아이의 욕구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공평한 태도 안에서 남자 아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 타자의 다름을 경험할 수 없다. 즉 정의의 주체는 타자성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있다.-90쪽

길리건에 따르면 남자 아이가 자신과 동일한 타자와의 정의롭고 의무론적인 인정관계를 중시한다면 여자 아이는 서로 다른 욕구를 갖는 개인들 간의 정서적인 상호 작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자아이에게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과 다른 타자의 다름을 느껴보고 생각해보는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봄이요 사랑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정체성의 변화 혹은 '옆집에 사는 해적 놀이' 같은 더욱 포괄적인 정체성의 형성을 이끈다.-91쪽

첫 번재 위험은 전통적 여성성을 보살핌의 윤리와 동일시 하는데서 발생한다. (중략)
보살핌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이 자칫 성적 위계화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두번째 단계의 보살핌이 여성적 미덕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경우 여성은 항상 타자를 배려하는 역할만을 하도록 강제될 수 있다.(중략)호글랜드는 전통 도덕에서 말하는 사회적 선이 자기희생과 동일시되는 경우, 그것은 결국 여성의 착취에 기여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비판적 여성이론가들은 여성주의적 윤리학이 여성을 자기희생으로 내모는 여성적 도덕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중략)
나는 길리건의 보살핌의 윤리가 여성에게만 한정된 인정의 윤리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보살핌의 윤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의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읽혀야 한다. 또한 보살핌의 윤리가 갖는 독특한 상호 인정의 내용은 더욱 부각되어야 한다. 보살핌의 윤리는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미덕이 아니다. 보살핌의 윤리는 자신과 타자를 모두 배려할 때 완성될 수 있으며 위계화의 위험, 대상화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93~94쪽

지금까지 논의를 요약해보자.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과 다른 성기와 욕망을 갖는다. 여성의 성기는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의 사랑은 자기애적이다. 그러나 자기애적이라는 것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은 자기 안에 이질적인 타자의 요소를 가지며 타자와 부단히 교류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은 타자에 익숙하다는 말과 같다. 이렇듯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여성은 하나가 아니다. 여성이 하나로서의 페니스를 갖고 싶어 한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여성은 타자인 자기, 자기인 타자와 가까이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타자와 자신을 교환하는 데서 쾌락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이리가레이가 꿈꾸는 여성의 모습이다.-107쪽

버틀러에게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육체나 자연은 상정되지 않는다. 오직 "육체적 스타일", "반복되는 연출" 또는 "스타일화된 행위의 반복" 만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사회 문화적 규범이나 미적 이상은 인간의 몸을 다르게 형성시켰다.-116쪽

현대 사회에서는 여성에게도 자유와 주권을 선사했다. 그러나 현대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과 달리 불행하다. 남성은 남성다워지기 위해 자유를 포기할 필요가 없지만 여성에게 자유의 실현은 여성다움을 방해하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가 정확하게 보았듯이 현대 여성은 여성다움과 자유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자신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생각하면서 동시에 여성으로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둘 중 어느것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현대 여성은 이중 플레이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안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경질적으로 살게 된다.-134쪽

자유주의적 여성주의는 모든 여성에게 자매에로 뭉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딘에 따르면 자매애는 이미 백인 여성의 특정한 규범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백인 여성은 자신의 규범을 보편화해 다른 유색인 여성 역시 백인 여성의 규범에 협동적으로 행위할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결과적으로 자매애를 토대로 하는 연대 안에서 유색인 여성은 자신의 욕망이나 가치관을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하게 된다. 자매애는 내부적 차이의 억압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백인 여성 자유주의자의 자매애는 실질적으로 유색인 여성의 욕망과 가치관을 소외시킬 수 있다.-151쪽

우선 반성적 연대의 구성원은 서로를 의사소통적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구성원은 서로를 의사소통 참여자로 인정하고 생각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협동적으로 노력한다. (중략) 이러한 의미에서 딘은 '질문'이 우리를 구성한다'고 말한다.-152쪽

나는 타자성에 대한 의사소통적 개방성을 여성주의적 연대의 특징으로 삼고자 한다. 즉 한 사람의 행위를 여성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기준은 그가 다른 여성주의자의 다른 목소리를 듣고 이에 반응하려는 협력의지를 갖고 있는가 여부다. 타자의 차이에 대한 존중이라는 원칙 위에서 서로의 다름을 묻고 이에 반응하는 과정에 협력할 때 여성주의자는 서로 연대하게 된다.-154쪽

그들은 의사소통적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다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주제화하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대하고 있다.-156쪽

반성적 연대 안에서 변화와 타자성은 극대화된다.
(중략)
반성적 연대 안에서 우리는 정서적, 관습적 연대에서와 같은 절대적 믿음이나 일치감 같은 것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159쪽

시끄러운 질문과 반론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며 더욱 친밀해질 수 있다.
(중략)
반성적 연대의 궁극적 지향점은 차이의 표명과 상호 작용이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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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0-1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onlineif.com/main/bbs/view.php?wuser_id=new_femlet_project&no=15534&u_no=14

최근 여성들의 학과 성적이 뛰어난 것에 대해,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아니 기실 이사회를 지비하고 있는) 능력제일주의 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약자인 여성이 필사적으로 학업에 매진한 결과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소수성에 기반한 다양한 차별들이 능력주의라는 거대한 프리즘을 통과해 그 빛깔을 낸다는 것이다. 평균을 갉아먹는 다수에 대한 것을 놓치지 않는 것이 여성주의자들이 간과해야 하지 않아야할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