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람의 그림자 2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
|
|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1권, p9)
|
|
|
|
 |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시작된다. 잊혀진 책들의 묘지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 나왔던 살아 움직이던 서고를 떠올리게 했다. 독서가라면 누구나 수만권의 책들로 채워진 나만의 서고를 꿈꾸고, 수백권도 되지 않는 내 소박한 서재에서도 운명처럼 내게 흔적을 남기는 책을 재발견하곤 한다. 이 서고를 시작으로 책의 배경인 바르셀로나 곳곳이 마치 마술 속 세계처럼 희뿌옅게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의 중고책 서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바람의 그림자라는 책에 얽힌 사연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파헤치는 한편, 2차 세계대전 후의 어수선한 사회속에서 성장해 가는 한 소년의 모습이 메비우스의 띠처럼 유연하게 연결되어 흘러간다.
 |
|
|
|
"사실 남자란,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가서 은유법을 사용하자면, 백열등처럼 달아오르지. 한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훅 바람이 불면 차가워지지. 반면, 여자는, 이건 과학적으로 확실한 건데, 다리미처럼 달아올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조금씩조금씩, 약한 불로 말야. 맛있는 크리스마스 스튜를 만들 때처럼. 그러나 열 받았다 하면, 그걸 막을 길이 없지. 비스카야의 용광로 같단 말야."
(1권, p213)
"여자의 마음은 속임수를 쓰는 남자의 버릇없는 정신에 도전하는 섬세한 미로지. 만일 네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여자처럼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얻는 게 우선이지. 나머지 것들, 즉 사람으로 하여금 감각과 미덕을 잃게 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장은 보너스로 오는 거야." (중략)
"나 베르나르다를 여자로 만들어줄 거야. 정직한 여자로 만들지 못하지만 -벌써 그러니까 말야- 적어도 행복한 여자로는 만들어 줄 거야"
(1권, p214)
|
|
|
|
 |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이야기이다. 글 속에는 온갖 종류의 통속적이고 시시껄렁한 우리가 아는 여자와 남자에 대한 은유들이 등장한다. 훌리안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우리가 흔히 보는 티브이 연속극의 그것이지만, 삶의 진리들은 통속적이고 시시껄렁한 가운데 있고, 매번 그것에 마음이 흔들리고 눈물짓게 된다.
 |
|
|
|
"토마스는 네가 그렇게 뻔뻔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었는데"
"약간 있는 뻔뻔함을 모두 너를 위해 비축해두었지."
"왜?"
너는 나를 겁나게 하니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1권, p284)
|
|
|
|
 |
이야기의 다른 줄기는 앞서도 말했지만 성장소설이다. 청춘은 늘 미숙하고 두렵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 상처받는 것이 모두 두렵고 두렵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나이듬이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의 마음에도 무감해지는 것이 아닐까? 눈물짓는 일도 웃음을 지을 일도 자꾸만 사라져간다. 그래도 과거와 현재의 질풍노도의 사랑에 나는 설랜다.
 |
|
|
|
"그래, 때때로 이런 명문 학교들은 정원사나 구두닦이의 아이들에게 한두 개의 장학금을 제공한단다. 단지 자기들의 훌륭한 정신과 기독교적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야."
"가난한 이들이 자기들을 해코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부자들을 본받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지. 그것이 자본주의가 지가고 있는 독인데..."
(1권, p319) |
|
|
|
 |
 |
|
|
|
이 삶은 서너 가지 이유로 인해 살 만하고 나머지는 들판의 비료 같은 거야. 난 이미 바보 같은 짓거리들을 많이 저질러왔어. 그런데 지금 내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베르나르다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고 언젠가 그녀의 품에서 죽는 거라는 걸 알고 있지. 다시 꽤 괜찮은 남자가 되고 싶어, 알겠니? 나를 위해서가 아냐 - 우리가 인류라고 부르는 원숭이 합창단의 존경은 내게 안중에도 없거든 -, 그녀를 위해서지. 왜냐하면 베르나르다는 그런 것들을 믿거든. 그녀는 라디오 연속극도 믿고, 사제들도 믿고, 누군가에 대한 존경도 루르드의 성녀도 믿는단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고 난 그녀의 그런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단다. 그녀의 턱 끝에 달린 털 하나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난 그녀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1권, p 299~300)
|
|
|
|
 |
이 글 전반에 흐르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온갖 냉소들 사이사이에도 작가는 끝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버리지 못했다. 청소년물을 오래 집필해온 탓일까? 그의 빈정거림은 공허하지 않은 따스함이 베어나온다.
 |
|
|
|
"일하는 동안에는 인생을 똑바로 보지 않아도 되거든요"
(2권, p201)
|
|
|
|
 |
젊음을 다룬 글에서 나는 매일매일의 습관적인 생활에서 우리가 살고자 했던 삶을 다시 기억해 낸다. 그것은 젊은 날의 가슴아팠던 순간을 다시 끄집에 내기에 고통스럽고, 그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더욱 쓸쓸하게 한다.
그때까지 그것이 외로운 사람의 이야기이며 부재와 상실의 이야기였다는 걸 알지 못했다고, 그 때문에 그 이야기와 내 자신의 삶이 혼동될 때까지 나는 그 이야기 속에 피신해 있었다고, 사랑해야 할 이들이 단지 이방인의 영혼에 살고 있는 그림자일 뿐일 것 같아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했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1권, p287)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떻게 인생이 조금씩조금씩 무너져 내리는가를 보는 불행 혹은 행운을 가졌지. 훌리안에게는 그 분명한 사실이 한순간에 몰려왔지만 말야.
(2권, p288)
그래, 이 책은 어른이 되면서 우리가 잃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풋사랑, 친구, 부모님과의 따뜻한 대화, 꿈.. 이 글의 주인공 훌리안의 불행은 돌이켜보면 누구나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단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이 말솜씨 좋은 작가는 이렇게 흥미롭게 슬픈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가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를 끝도 없이 들어보고 싶다.
참, 나도 결혼할 때 주례대신 파블로 네루다의 사랑의 소네트 한구절을 나누며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오호 이 소설 속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괜스레 흐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