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품절


나는 김규항이 옹호하며 재단언하고자 하는 '80년대 정신'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의 오류를 제거한, 순수하게 진보적인 '80년대 정신'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그 정신의 윤곽과 아직 '참호' 안에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소수의 전사들, 그리고 대다수 '패잔병들'뿐이다. 때문에, "80년대, 그 위엄'을 한편으론 되찾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런 게 아직 없으므로 만들어내야 한다.-106쪽

책임질 수 없는 구호들만을 남발하는 걸로 자신의 정의(근본적인 변화)에 편에 서 있다고 믿는 건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그건 자신들이 '물적 토대(힘)'를 갖고 있기에 곧 정의롭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것이다. 자신의 말(구호)에 책임지고, 그 말에 '물적 토대(힘)'를 부여함으로써, 말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 때만이 정의는 반격/경멸을 받지 않게 된다.-111쪽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흐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빡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130쪽

'하이틴 로맨스'를 거의 읽어본 게 없어서 여기선 장르의 시학을 구성할 수 없지만, 내식으로 말하면 '로맨스'는 셋이 나오고, '포르노'는 둘이 나온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138쪽

흔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일컬으며 축복하지만, 그건 기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거야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이며 최소한 신의 아들이 아닌가? 벼룩이 뜀뛰기를 잘하는 게 기적이 아니듯이, '특별한 존재'가 기적을 연출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기적은 다른데 있다.(중략)진정한 기적은 바로 그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음'이다. 그걸 나는 '기적 없는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159쪽

여기서 음미해볼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바로 '몰락하는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규정. 책세상판의 번역을 옮기면,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22쪽

"여인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라!"고 큰소리친 걸로 돼 있는 니체지만(그마저도 늙은 여인이 일러준 말이었다!), 오히려 길들여진 건 여인들이 아니라 니체다(그는 채찍을 들고 가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를 길들여주세요!"). 해서, 내 생각에 그가 말하는 '위버맨쉬'란 오직 남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남자들이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223쪽

즉 권위의 신비한 토대는 '관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법에 대한 상당히 래디컬한 관점이다. 거기에 견주면, 관습법(불문법)과 성문법을 구분하는 상식(적인 관습!)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사실 '관습법'이란 말은 이러한 관점을 가로막는 알리바이는 아닐까? 마치 관습으로서의 법 말고 다른 법이 또 있다는 듯이 암시하는? 비유컨대, 관습법과 성문법의 관계는 니체에게서 은유와 개념의 관계와 같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 아니다.-232쪽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235쪽

"여성을 위한 첫걸음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부당하고 굴욕적인 것으로, 자신의 수동성을 행위에의 실패로서 경험하는 것이다"-294쪽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296쪽

즉 상품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순환하지만, 인간들의 순환은 점점 통제되는 것이 그 진실이다. 물론 이런 건 대한민국도 만찬가지다. 문제는 '지나친' 세계화가 아니라 '모자란' 세계화다.-296쪽

"레닌의 독특한 의견이 처음으로 명백히 소개된 저술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 저술은 필요한 타협을 통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실용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가능한 타협을 무시하고 명료한 급진적 관점-우리의 개입이 해당 상황을 변개시킬 수 있는 방식에서만 개입이 가능한-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레닌의 무조건적 상황 개입 의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변개시킨다'는 'change'의 번역이고, '해당 상황'은 '상황의 좌표들'을 가르킨다. 그리고 '모든 가능한 타협'은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레닌의 관점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개입을 통해서 현실의 좌표들을 변화시키고 이론을 관철시킨다는 것이겠다.-314쪽

진정한 레닌주의자와 정치적 보수주의자 간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유주의적 좌파의 '무책임성'을 거부한다는 사실이다.-315쪽

"전 지구적 자본주의-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전일성을 침식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획은 억압된 지린의 관점에서 현재의 전 지구적 상황에 개입하면서 스스로가 진리의 대변자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단언할 것이다."-317쪽

"그것들은 이제 기성 질서와 체계를 위협하는 반란과 탈주가 아니라 오히려 기성 질서 자체가 허락하고 용인한 한도 내에서의 반란과 탈주라는 느낌이 더 짙다." 즉 펑크는 분명 기성의 질서나 체계에 시위하고 반항하지만, 그러한 시위/반항 자체가 오히려 체계의 정상성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는 것이다.-330쪽

오늘날 진정한 사상의 자유란 게 있다면 그것은 지배적은 자유민주주의적, 탈이데올로기적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나갔다,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최상의 이념이고 체제다. 같은 통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고, 그러한 의문에 저는 전략적으로 '레닌'과 '레닌주의'란 기표를 부여하고자 합니다.-336쪽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체제 아래 놓여 있었지만 20세기의 문화적 발전이란 것이 저는 산업적 근대성이 대중에게 행복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공통적인 유토피아적 꿈의 변주라고 생각해요.-339쪽

그래, 경제가 핵심이야. 전투는 거기서 결정될 거고, 우리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마법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합니다.-343쪽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족하는 것입니다. 덧붙여, '레닌'은 무엇보다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사고 금지'의 상황을 중단시킬 강력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레닌'이란 기표는 우리가 다시금 사유하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347쪽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409쪽

다만, 시오랑에 기대어 말하자면, "우유부단 하다는 것은 정직하다는 표시이고, 무언가에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사기의 표시이다"-409쪽

"우리는 모두 어릿광대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으니까"-412쪽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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