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달을 쫓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4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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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리쿠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는 작가다.
특히 일상의 풍경 속에서 특이하거나 생경한 풍경들을 뽑아낼 줄 알고,
(달밤의 으스스함과 은밀함 처럼)
가까운 사람 사이의 미묘한 균열이나 감정의 교류를 세밀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런데 이 작가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뭐?
아무것도 없다.

내가 읽은 작가의 다섯번째 작품인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아 이제 그만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너무 익숙해진 작가의 분위기, 끊임없는 자기복제(잘 알다싶이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간략이 소개되었던 주제로 다음 작품을 쓰는 걸 즐긴다.), 허무감이 밀려든다. 

이 책은 온다리쿠가 쓴 나라 지방의 여행 홍보기쯤 된다.
지방의 분위기와 관광지를 온다리쿠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로 잘 뽑아내었다.
딱 그만큼.
내 느낌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밤의 피크닉이나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미치지 못한다. 

<책 속의 몇 구절>

p16
아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자유는 꽤 괴롭다. 

p28
차창 밖으로 건물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는 늘 신선한 놀라움을 느낀다. 사실은 자기 쪽이 움직이는데도 세계가 움직이는 듯 보인다는 사실에. 과거에 왜 달님이 늘 내 뒤를 따라오는 걸까, 하고 몇 번씩 하늘을 올려다보던 생각이 났다.

지그재그로 잘린 오피스가의 하늘은 포근하게 개어 있었다. 

p47
"분명히 혜어지는 이유를 확인하겠지"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좋아하게 되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지만 헤어지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거든. 아니면 끝낼 수 없잖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너무나도 지당한 의견이었다. 

p93
나는 평소에 늘 그런 여자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 여자. 회사 탈의실에서 돌려 보는 통신판매 카달로그에서는 어김없이 세상 대다수 여자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고르고, 레슨 선생님에게 얼마를 드려야 할지 넌지시 의논할 수 있는, 느낌이 좋고 손톱 손질을 잘하는 여자들을.

p159
이렇게 보면 헤어진 그와의 사이에는 드라마가 없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지도, 책략을 쓰지도, 수라장을 벌이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리 드라마를 철저하게 연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에 전혀 맞지 않았다. 자기들 인생에서조차 주역이 되기를 겁냈다. 

p203~204
"와타베 말로는 동화랑 민화는 거의 대부분이 '상실'이 테마래"
(중략)
"백설공주도 그렇지, 빨간 두건도 그렇지, 일단 죽어 목숨을 잃었다가 그 뒤에 재생돼서 부활하잖아. 잃고, 찾아, 되찾는다. 그게 인간이 만드는 이야기의 주된 테마래."
(중략)
"산다는 게 뭔가를 잃는다는 거니까요."
(중략)
"아니, 그보다 현실적으로 잃어버린 걸 조금씩 돈으로 치환시켜 가는 거겠죠. 시력이 감퇴되면 안경을 사고, 체력이 감퇴되면 돈내고 차를 타요.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시간이랑 노력까지 돈으로 사게 되고요. 그런 식으로 잃은 걸 벌충하게 되는 거예요." 

p269
남자의 등을 보는 것은 싫지 않았다. 등을 보면 늘 왜 그런지 아아, 이 사람은 남자구나, 하는 당연한 사실이 실감나곤 했다. 

p338~339
어느 바람이 쌩쌩 불고 추운 날 밤, 절벽 동굴 안에서 한 촛불이 떨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초였습니다. 다른 초들은 벌써 끝까지 다 타버렸거나 바람이 불어들어 꺼졌기 때문에 작은 초는 외톨이였습니다. 여기서 자기가 다 타버렸다가는 사방이 캄캄해지고 추위에 얼어버릴 것입니다. 초는 먼저 꺼져버린 친구를 그리워하고 원망하며 열심히 어둠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몹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들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불꽃을 흔들어 바람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아침 햇살을 보고 바깥 경치를 보고 싶다. 초는 오직 그것만을 바라며 긴긴 밤을 견뎠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지나고 마침내 아침이 되었습니다. 동굴 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밝은 세계가 있었습니다. 작은 초는 환한 아침 햇살 속에 날아다니는 새와 밝은 색으로 움트는 숲을 보았습니다. 초는 문득 먼저 간 친구들의 촛농이 동궁안에서 썩어버린 짐승의 뼈를 덮어 자기 주위에 작은 벽을 만들어 준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 타버린 그들이 작은 초를 바람으로부터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초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아아'하고 부르짖고는 다 타버렸습니다.
아침의 동굴에 환한 햇살이 눈부시게 비쳐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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