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클로 - [초특가판]
트란 안 홍 감독, 양조위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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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클로 - 죽은 시인의 사회에 바침

 

 

  트란 안 홍 감독의 "씨클로"...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선뜻 영화의 내용보다는 영화의 주제가였던 ‘Radio head’의 ‘Creep’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기억을 끄집어내면, 몇 가지 강렬한 이미지 정도... 그러하기에 사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내러티브(이야기 구조)의 범주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몇 프랑스의 누벨바그 계열의 영화들처럼 아예 내러티브가 파괴된 영화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이 영화 속에 리얼리즘은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럼에도 영화는 배경이 되는 어두운 이야기의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Creep’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있다. 그랬다. 분명히... 그래서 어쩌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늘 다시 보고 싶으면서도 망설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시금 마약에 흠뻑 젖어 취한 듯한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기가 선뜻 겁이 났기 때문이다.

 

 

  처음, 영화는 베트남의 한 가난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생 씨클로를 운전하다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어, 이제 가난이라는 삶의 현실과 맞부딪쳐야 할 세 남매 그리고 할아버지...

 

  이제 18세가 되는 소년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씨클로(인력거)를 운전한다. 그리고 이제 갓 10살이나 지났을까 싶은 어린 여동생은 식당에서 구두를 닦는 일을 하고, 누나는 살림을 도맡아 보면서, 시장에서 물을 기르는 일을 하고 있다. 또, 연세가 지극하여 이제 좀 일손을 놓아야 할 것 같은 할아버지는 아픈 어깨 때문에 진통제 약을 먹어가면서, 자전거 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지독한 가난함... 그렇지만 역시 가난함이라는 말에서 절로 배어 있는 때묻지 않음이 아직 여기까지는 이 가족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이라는 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기에, 필연적으로 이 가족에게는 세속에의 찌듦이라는 불행한 전조가 드리우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마치 자연주의 소설 계열이나 리얼리즘 영화에서와 같이, 지극히 사소하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우연으로부터 출발한다. 가령 예를 들어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에서처럼 아내가 하루 빌린 값비싼 목걸이를 잃어버려, 평생 그 빚을 갚기 위해 돈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이... 혹은 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 도둑'에서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자전거를 도둑맞게 되어, 자전거를 훔치게 되는 과장과 같이... 소년은 하루하루 임대 받았던 씨클로를 도둑맞게 된다. 그러하기에 씨클로를 도둑맞은 소년은 원래 씨클로의 주인인 마님이라 불리는 한 여자에게로 간다. 한 30대 후반쯤... 소년의 나이 18세와 동갑인 정신지체아 아들을 품에 끼고서 애지중지 하고 있는 여자이자 범죄조직의 대모... 마님은 매정하게도 소년을 용서하지 않고, 아직 이 모든 현실이 버거워 보이는 소년에게 빚을 계산 받기 위해, 범죄를 알선한다. 그러면서 영화에선 처음 시인이 등장하게 된다.

 

  왠지 우울해 보이다 못해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시인(양조위)은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으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그는 소년에게 범죄를 지시하면서도, 괴로워한다. 그런데 철없는 소년은 처음의 두려움과 달리,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범죄의 묘한 매력에 차츰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소년은 이제 아예, 범죄조직 안에 발을 들여놓길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시, 처음 예상과 달리, 깊이 들여놓으면 들여놓을수록 조여 오는 죄책감에 소년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되고... 어쩔 수 없이, 소년은 다시 마님에게 찾아가, 자신의 원래 일인 씨클로로 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매정하기 짝이 없는 마님은 거절을 한다. 그리고 오히려 이제 소년에게 살인을 명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에서는 소년과 또 하나의 축으로써 소년의 누나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소년의 누나 역시, 마님의 애첩이자 심복인 시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처음, 둘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영화는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둘은 서로 이전부터 알았고, 사랑하는 사이처럼 비추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위 시인이라는 사람이 범죄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매춘을 알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소년의 누나는 그런 시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매춘을 거부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 소년의 누나는 쉽사리 거기에 적응을 못할 것처럼 비추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소년의 누나에게 수치심을 버리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을 고용한다. 아주 음흉해 보이는 40대 중후반 가량의 남자... 시인은 자신이 고용한 남자에게 저 여자는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며, 소년의 누나와 같이 있던 방을 나온다. 그리고선 걱정이 되었는지 복도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몰래 난간을 타고 올라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고문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한다.

 

  청순해 보이기 그지없는 여자는 두려움에 떨며, 의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여자의 발밑에는 세수대아와 생수통이 보인다. 천천히 시인이 고용한 음흉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지 않아?"

  그리고 계속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목마르지? 목마르지 않아?"

  그리고선 다시 여자에게 물을 먹이기 시작한다.

 

  "오줌 마렵지. 오줌 마렵다고 생각해."

  그리고 마침내, 끝내 거부할 것 같던 여자는 자신의 수치심을 버리고 소변을 보기 위해, 치마를 걷는다. 그리고 자신의 속옷마저 다리 사이로 빼낸다. 그러자 남자가 말한다.

 

  "앉아서 하지 말고, 서서 눠."

  서있는 여자의 벌린 다리 사이로 찔끔찔끔 내려오는 물줄기가 세수대아에 쏟아지고 있다. 그리고 난간에서 이 모든 과정을 훔쳐보고 있던 시인은 코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수치심을 잃어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소년의 누나인 여자는 차츰 매춘부로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애인인 시인의 소개로 인텔리계층으로 보이는 한 삼십대 남자와 마주하게 된다.

 

  어두운 성인 나이트... 여자는 매춘부 특유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고서, 한쪽 손에는 수갑을 찬 채, 유혹의 춤을 추고 있다.

 

  음악은 Creep.......

 

  시인은 남자에게 열쇠 키를 건넨다. 하지만 너무나도 괴로워 보이는 시인... 자신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맡겨버리고서, 돌아선 시인의 코에선 다시 코피가 쏟아지고 있다.

 

  다시 장면이 바뀌어, 여자의 얼굴은 멍이 들어있다. 그리고 양손은 수갑을 찼던 흔적으로 빨갛게 핏줄기가 그어져있다. 그 양 옆으론, 같이 매춘을 하는 여자들이 소년의 누나인 여자의 상처를 매만지고 있다. 하지만 돌연 참을 수가 없는지.. 돌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인에게 달려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 얘는 처녀였단 말이야......."

 

  괴로워 보이는 시인...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시인은 자신이 매춘을 알선했던 남자를 살해해 버린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는 거의 종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매춘부로 전락시킨 시인은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고... 한편 마님에게 살인명령을 받은 소년 또한, 살인을 하기 전날 밤, 잔뜩 술과 마약에 취해,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술과 마약에 의한 환각이었는지 소년은 다음 날 죽지 않고 깨어난다. 그리고 그 소년 곁에는 이제껏 소년을 놓아주지 않았던 마님과 그 일행들이 서있다.

 

 

 

 

 

 

  맞은편으론 자신의 애첩이자 심복이었던 시인의 불타버린 집이 보이고... 전날, 돌발적 사고로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정신지체아 아들을 잃어버린 마님이라 불리는 여자는 소년을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다. 그리고선 소년을 범죄 세계에서 놓아준다.

 

  마지막 영화는 이런 복잡한 고통의 과정을 겪고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소년이 끄는 씨클로를 타고, 어딘 가로 떠나는 소년과 소년의 누나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모습을 비춰주며, 끝을 맺는다.

 

 

  처음에 밝혔듯이 이 영화는 리얼리즘적인 요소를 다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하기에 내용 중간에서 잠깐 소개한 모파상의 '목걸이'나, 비토리아 데 시카의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과 같이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게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베트남의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로 돌입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기에 이는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린 파파야의 향기'와 같이 현대판 신데렐라 유형의 영화를 만든 트란 안 홍 감독에게서 왠지 리얼리즘은 어울려 보이지가 않는다. 특히, 영화를 본 이라면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 줄거리보다는 분명, 장면 하나 하나에서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가 우리를 압도하는 영화이다. 가령 예를 들면, 소년이 살인하기 전 날, 자살을 기도하면서 파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금붕어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괴로울 적마다 코피를 흘리는 시인이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장면이라든가... 오히려 모든 장면 하나하나는 이렇게 하나의 시적인 형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범죄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인이라는 설정 그 자체가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과 이 악의 구렁텅이라는 리얼리즘이라는 세계가 어디 어울릴 법하단 말인가? 아니, 그러고도 정녕, 우리는 그를 영화에서처럼 시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젠 우리에겐 머나먼 신화가 되어버린 고대로부터 흔히 시인이란 족속들은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분명 시인이라는 설화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어져 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그들이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로 구전되었느냐는 것이다. 사실, 시인이 아니더라도 그 누군들 신을 찬미하고,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싶겠는가? 그런데 왜 유독, 그들만 그런 영광의 딱지를 부여받았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순수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세상 모든 다른 이들에 대한 예증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세상 모두가 당연히 신을 예찬하고, 사랑을 노래했다면 시인이라는 대명사 또한 필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언젠가부터 우리는 시인에게서 사랑과 순수 그리고 좀 더 나아가 낭만과 희망 대신 고통과 절망이라는 딱지를 부여해 왔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대라는 곳에서는 그런 시인들이 고통과 절망에 허덕이다 못해, 모두 죽어버렸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순수하기 그지없던 고등학교 적, 나는 친구들과 함께 문학 소모임 비슷한 모임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절대적인 영향은 그 당시 우리를 휩쓸고 간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뭐, 이 영화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겠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여하튼... 그 당시 우리는 키팅 선생을 부르는 학생들의 '캡틴 오 마이 캡틴'에 열광하였고, 그래서 실제로 문학 모임을 결성함과 더불어 교회를 다니며, 창작 연극을 해보기도 하고... 밤새 신과 인간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 보기도 하고, 각자 불같은 짝사랑의 열병에 앓아 괴로워해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가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며, 키팅 선생을 떠나보내고, 더 이상 자란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듯이, 우리의 시인이었던 시절은 그 때로 모두 끝이 나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 미처 시인의 고통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키팅 선생은 그렇게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우리에겐 키팅 선생이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제론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가난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그 무엇 때문이었던지, 어쩔 수 없이, 아니 어차피, 범죄 세계로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은 소년을 범법자로 만들고, 자신이 사랑했던 처녀를 매춘부로 전락시킨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괴로움 끝에 자살을 해버린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이 모든 것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아마 어쩌면, 자신이 괴로워 할 것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거기에 쉬 적응하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한번쯤 생각해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리 그에게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은 모두 사랑과 순수가 가득하여 시인이라는 대명사가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 사랑과 순수에 대한 열망만 가득하여 시인에게 그 모든 고통을 전가시켜버리는 세상인 것을... 그러면서도 얼마나 그들은 자신의 타락과 동시에 시인으로서 태생적으로 지닌 자신의 고통을 갈망한단 말인가? 마치 자신이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그리고 소년의 타락을 바라보듯이... 게다가 어차피 그들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 험난한 세상에서 순결을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의 고통을 전염시키는 것이 그들에겐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자신은 한 때 사랑과 순수의 대명사였던 시인이니까... 아니, 소년과 처녀 모두 분명히, 다른 사람이 아닌 시인 그 자신에게서 절망과 고통을 배우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범죄의 손에 물들었고, 처녀는 순결을 상실했고, 시인은 이미 죽어버렸다.

 

  그렇게 시인은 죽었다. 그리고 이제 소년과 처녀가 아닌 다른 그 누군가들은 시인이 없는 세상에 살아남았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마지막 떠나지는 모습은 또 다른 시인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떠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진 그곳에 오늘도 또 다른 시인의 죽음이 있을지,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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